바빌로니아 별자리와 천문전승 - 별자리 상세 15. 들판자리
들판자리(the Field)는 오늘날 페가수스자리대사각형의 원형이 되는 별자리입니다.
농경이 처음 시작된 '비옥한 초승달지대'는 레반트 지역에서부터 메소포타미아 북동부 산악지대에 이르는 아치 형태의 넓은 고지대를 말합니다.
이 지역은 튼실한 곡물을 생산해 낼 수 있을만큼 충분한 비가 내리는 구릉지대입니다.
반면 메소포타미아 중심부를 차지하는 하천 유역과 평원은 농사를 지을만큼의 충분한 비가 내리지 않는 지역이죠.
이처럼 불리한 조건은 기원전 6천년 대에서 5천년 대 사이, 광활한 관개수로망 개발과 관개농업으로 극복되었습니다.
이 고된 승리는 하천유역에 있는 비옥한 충적토의 잠재력을 깨웠으며 인구의 팽창과 도시문명의 성장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렇게 개척해낸 비옥하고 광활한 보리밭을 별자리로 등극시키는 일은 신석기 혁명을 이끈 고대 농부들의 업적에 걸맞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별자리가 들판자리입니다.
계절적 특성을 강하게 가지는 별자리로서의 들판자리는 관개된 물로 성장을 시작하는 보리와 함께, 그리고 만수위를 향해 수위를 높여가는 유프라테스강 및 티그리스강의 수위와 함께 떠오릅니다.
따라서 들판자리 예언에 관계농업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들판자리에 금성이 보인다면
하늘로부터 비가 내리고 샘으로부터 홍수가 발생할 것이다.
서쪽 땅의 작물이 풍성해질 것이고,
버림받은 목초지는 다시 일궈질 것이다.
또다른 예언 중 상당 수는 홍수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만약 들판자리의 별들이 반짝반짝 빛난다면
홍수가 올 것이다.
그 별들이 떠올라 횃불처럼 빛난다면
모든 땅에 가뭄이 퍼져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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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덴데라 황도대(the Dendera Zodiac)에 그려진 들판자리와 물고기자리 |
들판자리는 관개수로로 분할된 직사각형 형태로 그려집니다.
덴데라 황도대에서 들판자리는 물고기자리 사이에 딱 들어맞게 위치합니다.(그림 1)
우리가 알고 있는 바빌로니아 유래 요소와 맞닿아 있는 이 그림은 들판자리가 '페가수스자리대사각형'을 형성하는 네 개의 밝은 별에 의해 구획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판자리는 관개수로가 지나는 땅 뿐 아니라, 지하수의 신화적 개념인 '압주'를 묘사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샘물과 강, 호수에 담수를 공급하는 원천이죠.
오늘날 사용되는 영어 단어 'abyss'는 수메르어 압주(Abzu)에 뿌리를 두는 단어입니다.
이 거대한 지하수 저장고는 고대인의 의식 속에 세상의 모든 물을 채우는 풍요의 왕국이었으며 그 끝모를 깊이는 모든 지혜와 신비의 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또한 압주는 자비롭고 지혜로운 신 엔키(Enki)의 특별한 거주지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엔키는 종종 물줄기가 울타리를 치는 사각형 공간 안에 머무는 것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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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지성소에 앉아 있는 엔키의 모습 |
엔키에게 봉헌된 에리두(Eridu)의 고대 신전은 거룩한 석호 중간에 있는 작은 섬 위에 지어졌습니다.
이 신전은 '에-압주(E-Abzu)'라 불렸습니다.
이는 '심연에 있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반인반어와 대홍수 이전에 인류에게 문명을 선물해 준 일곱 현자를 비롯하여 여러 신화적 존재가 엔키 주위에 모여 엔키를 보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신화적 존재들은 여러 신화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존재의 원형이 되죠.
일곱 현자는 종종 물고기 비늘을 걸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림 3)
이들이야말로 지식과 지혜의 깊이를 꿰뚫어보는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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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물고기 비늘을 뒤집어 쓴 현자의 모습, 아카드어로 압칼루(apkallu)라 합니다. |
들판자리는 '물 아쉬-간(Mul Aš-Gan)'으로 표기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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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기는 아카드어로 '이쿠(iku)'라고 읽으며 '경작지'를 의미합니다. 또한 이 표기는 약 60제곱미터에 해당하는 표면적의 측정단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
'간(Gan)' 표기는 관개수로가 흐르는 밭을 묘사한 것입니다. 수평으로 그어진 선은 작물에 물을 공급하는 좀더 폭이 좁은 도랑을 상징합니다. 이 표기를 '이쿠(Iku)'라 읽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학자는 들판자리를 '물 아쉬-이쿠( Mul Aš-Iku)'라 주장합니다. '아쉬(Aš)' 표기는 쐐기문자 표기 중 가장 기본이 되는 표기로서, 숫자 1, 또는 단수형 부정관사의 의미 등, 다양한 의미를 갖습니다. '들판'은 '간(Gan)' 표기 하나로 쓰이곤 합니다만 특정 공간을 표현할 때는 '아쉬(Aš)'를 붙인 '아쉬 간(Aš-Gan)'이 좀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별자리의 이름으로 '아쉬 간(Aš-Gan)'이 쓰인다는 것은 들판자리가 압주의 비교대상으로서 신화적으로 사용됨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특별한 용법을 <창조 서사시(Epic of Creation)>와 같은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조서사시에서 창조신은 우주를 측량하기 위한 도구의 하나로 압주를 사용하였습니다. |
들판자리는 수메르 문학에서 언급되는 몇 안되는 별자리 중 하나입니다.
들판자리는 <엔키와 세계질서(Enki and the World-dorder)>라는 시에 등장합니다.
이 시에서 들판자리는 이미 고도로 발달된 신화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 측면에서 다음의 인용구는 '압주' 표기에 대한 폭넓은 주석으로 생각됩니다.
이 표기는 압주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을 품은 '지혜의 신전'임을 암시합니다.
주님(엔키)께서 바다에 신전을 세우셨다.
거룩한 신전이다.
신전의 내부는 공들여 지어졌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내부는
인간의 지식을 넘어선다.
신전의 포좌는 들판자리에 걸맞게 위치한다.
거룩한 신전의 상부는
전차자리(the Chariot)를 향하여 배치되었다.
그 무시무시한 두려움은 밀려오는 파도와 같고
그 화려함은 놀랍기만 하다.
심연을 일컫는 수메르어는 '압주(Abzu)'입니다. 이를 표기할 때는 순서를 뒤바꿔 '주 압(Zu: Ab)'으로 적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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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아카드어로는 '압수(apsu)'로 읽습니다. '압수'는 '지하수'를 의미합니다. |
'주(Zu)' 표기는 동사로 자주 쓰이는데 이때는 '알다'라는 뜻입니다. 반면 '압(Ab)' 표기는 '신전', '경내', '집'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또한 이 표기는 '바다'나 '대양'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됩니다. 이 두 개 표기를 같이 써 '압주(Abzu)'가 되는데 의역하면 '지혜의 집' 또는 '지혜의 신전'이 됩니다. |
또하나의 수수께끼는 들판자리가 바빌로니아의 신년 축제에서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축제는 신전의 문이 개방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의식을 주재하는 사제는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둑(Marduk)과 짜르파니투(Şarpanitu)에게 기도를 드리기 앞서 유프라테스 강에 몸을 씼어야 했습니다.
그 후 사제는 신전 마당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 선 후 '들판자리와 마르둑 신전 에삭일라(E-sag-ila)는 하늘과 땅의 형상이다.'라고 세 번 외침으로써 신전을 축성하였습니다.
이 예식이 있어야만 신전의 문이 열렸고, 그때에야 비로서 악사와 가수를 비롯한 신전 직원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들판자리와 마르둑 신전이 '하늘과 땅'의 형상이 될 수 있는지는 <창조 서사시(Epic of Creation)>의 난해한 문장을 통해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티야마트(Tiamat)를 처치한 마르둑은 우주의 원초적 상태를 살피고 위대한 창조의 질서를 생각했습니다.
마르둑은 천국과 하늘, 심연을 각각 질서에 맞게 배치하고 각각의 왕국을 담당할 신을 할당하였습니다.
이 시에서는 '간(Gan)' 표기는 '공간의 측정'으로 쓰입니다.
마르둑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천국의 돔과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물의 심연 사이에 하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압주를 측정하면서 그 의미가 우주론적 수준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마르둑은 천국을 가로질러 가며 머물 곳을 조사하였다.
마르둑은 에아(Ea)가 사는 압주를 모방하여 하늘을 만들었다.
주님(마르둑)은 압주를 측정하였다.
그리고 '위대한 신전'인 압주와 같이
엔릴(Enlil)의 거처인 하늘을 만들었다.
그는 천국에서 아누(Anu)와 엔릴, 에아의 지성소를 만들었다.
그것은 에샤라(Ešarra)이며 위대한 사원이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천국 및 심연과 마찬가지로 바빌로니아 우주론에서는 지구를 네 개의 모서리를 가진 사각형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네 개 모서리의 왕'이라는 왕의 호칭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호칭은 기원전 3천년 대 후반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 난해한 사상은 바빌론이라는 도시 개념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후에 만들어진 세계 지도를 보면 바빌론은 유프라테스강이 가로지르는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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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바빌론 지도 |
바빌론 발굴 결과는 이 그림이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실제 성벽이 직사각형 형태로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방어를 위해 성벽 주위를 따라 해자를 만들고 여기에 유프라테스 강물을 끌어들였습니다.
그 결과 바빌론이라는 도시의 전반적 배치는 신비롭게도 관개수로에 둘러싸인 사각형 들판을 묘사한 '간(Gan)' 표기를 닮게 되었습니다.
이와 동일한 개념이 '바빌론'을 의미하는 여러 표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바빌론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인 에키(E-ki)는 '관개수로의 도시'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에(E)' 표기는 '제방', '도랑', '관개수로', '도랑으로 둘러싸인 땅'을 의미하는 '이쿠(iku)'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볼 때, 바빌론이 들판자리와 연계된 도시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분석하지 않더라도 별지도 자체에서도 같은 개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들판자리 자체와 그 주위에서 메소포타미아의 기본 지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 들판자리는 바빌론과 메소포타미아 중심의 풍요로운 평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들판자리를 둘러싼 강줄기는 오늘날의 물고기자리에서 물고기를 서로 묶은 끈을 상징하는데 이것이 바로 티그리스강 및 유프라테스강인 것입니다.(그림 5)
(참고로 두 개 강이 천구상에서는 좌우가 바뀐 모습으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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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메소포타미아의 기본적 지도 형태로 만들어진 물고기자리와 들판자리 |
비록 이 지도가 아무리 기본적 형태만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이 지도야말로 아마도 '세계 최초의 지도'일 것입니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수메르 문학이 기반으로 하는 들판자리의 형태는 4천 년 이전까지 거슬로 올라가고, 제 생각대로 이 별자리가 최초로 만들어진 별자리 중 하나라면 그 기원이 7천 년 전까지 소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래 전이라는 사실은 메소포타미아가 고대 천문학의 발상지이며,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여러 별자리가 만들어진 문화적 용광로라는 사실을 확연히 보여줍니다.
(이에 대해서는 '살해당한 영웅들(the Slain Heroes)' 항목에서 좀더 확장된 관점으로 다루었습니다.)
점성술에서 들판자리는 화성의 별칭으로 종종 사용됩니다.
반면 들판자리가 수성, 금성, 목성을 상징한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들판자리가 이렇게 여러 행성의 속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들판자리와 연관된 예언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들판자리의 활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들판자리는 다양한 행성의 속성을 뛰어넘어 농경문화와 강력한 연관관계를 가지는 다른 별자리의 정체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시리아 출토문서(SAA, State Archives of Assyria)에서는 밭고랑여신자리(the Furrow)와 삯꾼자리(the Hired Man)가 들판자리와 동일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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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보리 이삭이 장식된 전투곤봉의 머리부분 |
들판자리에 대한 두 개의 변형된 예언이 이를 적절하게 보여줍니다.
달무리가 끼어 있고 들판자리가 달무리 안에 들어있다면
보리수확량이 줄어들 것이다.
달무리가 끼어 있고
별무리(플레이아데스)를 거느린 들판자리가
달무리 안에 들어 있다면
소떼가 늘어날 것이다.
첫 번째 예언에서 들판자리는 실제로는 밭고랑여신자리를 의미하며, 두 번째 예언에서 들판자리는 삯꾼자리를 의미합니다.
이 두 예언에서 '들판자리'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예측의 성격입니다.
보리는 자연스럽게 씨앗이 뿌려진 밭고랑과 연결되며 소떼는 삯꾼자리와 연결됩니다.
별자리로서 삯꾼자리의 형상이 바로 양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들판자리와 관련된 예언을 보면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사들이 새로운 예언을 만들어낼 때 어떤 방식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예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이미 있는 예언에 이런저런 변수를 추가하는게 일반적이었습니다.
다음의 예언은 새로운 주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반'이 무엇인지를 추정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만약 들판자리가 첫 번째 달(오늘날의 3~4월)에 떠오른다면
관개된 경작지가 늘어날 것이다.
이 예언은 기본 공식에 해당하는 예언입니다.
여기에 변수가 추가되면서 총체적이고도 상호 연관된 일련의 체계로서의 예언이 만들어집니다.
그 특별한 경우의 하나로써, 네 개 변수로 분할되는 예언을 만들어볼 수 있습니다.
만약 들판자리가 첫 번째 달에 떠오르지만 남쪽 별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카드의 경작지는 더 이상 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방향 별 변수가 추가됩니다.
예를 들어 북쪽 별은 수바르투(Subartu)의 경작지와 연계되며, 동쪽 별은 엘람(Elam)과, 서쪽 별은 아무르(Amurru)와 연결되는 식입니다.
또한 이에 더해 각 별이 결합한다거나, 어두워진다거나, 초록색이 된다거나, 빨간색이 된다거나 하는 조건들이 추가되면서 여러 예언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천문 예언에 속하는 상당수의 예언이 실제 상황을 관측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책상 위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참고 별자리 : 아누니툼자리(Anunitum) , 제비자리(the Swal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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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석
1. 이 글은 천문작가 Gavin White의 책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와 천문전승을 담은 에세이집 Babylonian Star Lore (ISBN-13 : 978-0955903748)를 번역한 것입니다.
2. 별자리 이름이 현대 별자리 이름과 혼동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는 '이탤릭체'로 표시하였습니다.
3. 본 글은 저자의 허락을 받아 포스팅한 글입니다.
원문과 번역문 모두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 및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