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니아 별자리와 천문전승 - 별자리 상세 26. 물염소자리
물염소자리(The Goatfish)는 오늘날 염소자리의 원형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한 별자리입니다.
염소 상반신에 물고기 하반신이 이어진 이 독특한 생명체는 기원전 3천년 대 말 메소포타미아 예술작품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때부터 이미 별자리로 정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지난 4천년 이상 밤하늘을 장식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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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물염소 형상 |
물염소자리 형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우르 3왕조 시대(기원전 2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기서 물염소는 물의 신 엔키(Enki)의 수행원으로 등장합니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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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 우르 3왕조(BC 2112~2004)의 인장 새겨진 엔키(Enki)와 물염소 |
엔키의 물은 모든 자연 서식지와 식물을 창조하는 원동력이며 생명의 탄생을 가져왔습니다.
수메르 신화에 따르면 엔키의 물은 우선 늪지와 늪지의 풀을 만들었습니다.
이 풀이 내륙으로 퍼져 나가 사과와 포도, 오이를 비롯한 각종 곡식이 만들어졌습니다.
엔키와 물염소 사이의 밀접성은 여러 경계석(쿠루두)에도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물염소는 거북이나 양 머리의 참모를 비롯해 엔키와 관련이 있는 여러 별자리 상징과 함께 등장합니다.
물염소가 이처럼 엔키와 강력한 연관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점성술 책에서는 비교적 인지도가 낮은 여신인 타슈메툼(Tašmetu)과 연관짓고 있습니다.
이 여신의 이름은 아카드어 샤무(Šamû)에서 파생된 것으로 대략 '탄원을 들어주는 분'으로 해석됩니다.
타슈메툼 여신은 신이 부여한 인간의 운명을 기록하는 신이자 화물선자리(the Cargo-Boat)의 주재신인 나부(Nabu)의 아내로 간주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별자리인 염소자리는 바빌로니아의 물염소자리 형상을 변형없이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일부 지느러미가 없어지거나 더해진 것을 빼고, 거의 유일하게 주목할만한 변화라면 고대 그리스의 별자리 형상은 꼬리가 좀 더 길게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따금 이 꼬리가 휘감겨 있거나 묶인 것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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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고대 그리스의 전통에 기반하여 그려진 염소자리(요한 바이어의 우라노메트리아) |
물염소자리는 황도대 별자리이고, 따라서 태양과 달, 여러 행성과 상호작용을 갖는 별자리입니다.
하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그리스 전통에서 이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야기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문 예언을 모은 자료에서 물염소자리와 관련된 예언은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 중 하나는 화성 출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에 화성이 물염소자리를 올라탄다면
에리두(Eridu)는 약탈을 당할 것이고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죽고 말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예언은 예상 밖입니다.
화성이 물염소자리에서 '대상 천체의 긍정적 에너지가 최대로 발휘되는 지점'으로 해석되는 이른바 Exaltation을 갖기 때문입니다.
점성술 체계 내에서 최고의 긍정적 에너지가 발휘되는 지점에 부정적 예언이 만들어지는, 모순이라 할 수 있는 현상에 대한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올라탄다'라는 의미는 화성이 고정되는 위치를 언급한 것이라는 겁니다.
즉, 화성이 역행운동에 접어들어 일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지점이 물염소자리와 겹치는 때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살펴보겠지만 행성의 역행운동은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악마의 상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점성술사들은 물염소자리를 두 개 부분, 즉, 염소 부분과 물고기 부분으로 분할하고 각기 다른 상징을 적용하여 예언이 갖는 일관성 부족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 실제 상황에서 물염소자리의 머리는 전혀 다른 별자리이자 오늘날의 거문고자리에 대응되는 암염소자리(the She-Goat)로 다뤄질 수도 있었습니다.
물염소자리의 머리가 갖는 상징은 주로 무리의 안녕과 연관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물고기 부분 역시 전혀 다른 별자리이자 오늘날의 남쪽물고기자리에 대응되는 물고기자리(the Fish)로 다뤄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염소자리의 꼬리가 갖는 상징은 주로 만조 또는 홍수를 예언하는 데 사용되었죠.
이에 대한 예는 아시리아 출토문서(SAA) 중 여러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만약 금성이 물고기자리에 접근한다면
그 땅에는 패배가 있을 것이다.
이 예언은 금성이 물고기자리가 아닌 물염소자리에 접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점성술사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물염소자리를 지칭하는 또다른 명칭은 '에아의 별(Star of Ea)'입니다.
(에아Ea는 엔키Enki를 일컫는 아카드어 이름입니다 : 번역자 주석)
만약 에아의 별이 어두워진다면
땅은 3년 동안 소출을 내지 않을 것이고
...
(땅의 생명을) 먹어치울 것이다.
이 예언은 물염소자리에 출현한 수성이 빛을 잃고 희미해지는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빛을 잃고 '어두워진' 행성은 일반적으로 역병의 전조로 해석됩니다.
이러한 부정적 예언은 물염소자리에 출현하는 수성을 다룬 다른 예언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물고기자리가 까마귀자리와 가까이 선다면
물고기와 가금류가 번성할 것이다.
이 예언에서 물고기자리는 물염소자리를, 까마귀자리는 수성을 의미합니다.
즉 수성이 물염소자리에 출현하는 때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들은 물염소자리가 갖는 상징의 범위를 모두 다룬 것은 아닙니다.
물염소자리가 갖는 상징의 근원을 좀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이 별자리가 여러 다른 별자리의 이름을 차용하여 불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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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양머리조각 지팡이와 물염소자리 |
물염소자리와 직접 연결되는 이야기가 없다보니 이 별자리의 상징을 파악하려면 간접적 단서 쪽으로 우회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단서는 물염소자리가 가지는 별달력으로서의 속성입니다.
물염소자리가 만들어진 때는 기원전 3천년 기 중반에서 후반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여명에 이 별자리의 머리와 뿔이 솟아오르는 때는 동지 때였습니다.
꼬리까지 완전히 떠오르는 때는 그 다음달이었죠.
이를 통해 물염소자리가 동지와 관련하여 새로운 탄생을 상징하는 특성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서는 별지도 상에서 이 별자리와 주변 별자리를 함께 보면서 찾아낼 수 있는 정보입니다.
물염소자리가 새 시대에 새로 만들어진 별자리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별자리 지도에 물염소자리처럼 계절적 상징주의를 구현하는 구 시대의 별자리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구 시대의 별자리를 통해 물염소자리가 갖는 다양한 상징적 요소를 알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죠.
그러면 이 구 시대의 별자리는 무엇일까요?
아마 이 별자리는 물염소자리 위치에서 한 달 또는 두 달 상관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추정해 본다면 물염소자리가 갖는 상징은 11번째 달과 12번째 달(오늘날의 1~3월)에 떠오르는 수사슴자리(the Stag)와 물고기자리(the Fish)에서 끌어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뿔을 달고 있는 물염소의 머리는 수사슴으로부터 파생된 것입니다.
이 수사슴은 천상의 물과 긴밀하게 연결된 고대의 별자리이며 태양의 재탄생과 강력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죠.
마찬가지로 물염소가 갖는 물고기로서의 속성은 확실히 물고기자리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점성술 전승에 따르면 물고기자리는 물에 잠긴 겨울로부터 구조되어 마른 땅으로 안전하게 구조되는 태양과 연관이 있습니다.
물염소자리는 수메르어로 '물 수후르-마쉬-쿠(Mul Suhur-Maš-Ku)'로 기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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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드어로는 '수후르마쉬(suhurmaš)'라 하는데 이는 신화적 존재인 '물염소'를 의미합니다. |
'수후르(Suhur)'로 읽히는 표기의 가장 초기 의미는 '끈으로 묶인 한 쌍의 물고기'입니다. 이 표기의 원래 의미는 몸집이 큰 잉어입니다만 동시에 '한 묶음의 낙엽'이나 '술', '다발', '볏'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양'을 의미하는 '우두(Udu𒇻 )' 표기와 유사한 '마쉬(Maš)' 표기는 '어린 양', '새끼 양'을 의미합니다. 막지막에 등장하는 '쿠(Ku)'표기는 '물고기 떼'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수후르-마쉬-쿠는 '염소-물고기'로 해석될 수 있으며 좀더 한정적으로는 본다면 '염소-잉어'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
이상의 내용을 기반으로 추정해본다면 물염소자리는 훨씬 더 오래 전에 만들어진 별자리인 수사슴자리와 물고기자리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사슴과 물고기가 함께 그려진 그림이 고대 미술에 자주 보인다는 것 역시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합니다.
일례로 기원전 5,500 년 경의 유물인 사마라 토기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짐승이 함께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림 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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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메소포타미아 북부 후기 신석기 문명을 형성한 사마라(Samarra)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 수사슴과 물고기 |
사마라 토기에는 구불구불하게 길게 뻗어나온 뿔을 가진 네 마리 수사슴과 여기 저기 흩어진 12마리의 물고기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기다란 뿔을 가진 짐승과 물고기라는 이중 모티브는 수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상징이며 고대 예술에 나타나는 주요 모티브 중 하나로서 이로부터 물염소라는 독특한 생명체를 상상할 수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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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수사슴과 물고기 문양이 새겨진 우르크 출토 인장 |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물염소자리는 기원전 3천년 대 중후반에 새롭게 만들어진 별자리입니다.
이 별자리는 우주의 심연에 잠겨 있는, 한겨울 태양의 발생단계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어떤 가설에서는 물염소자리를 새롭게 탄생한 태양의 수호자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좀더 직접적으로는 물염소자리 자체가 한 겨울, 온통 물에 젖은 채로 이제 막 탄생하는 태양 자체이기도 합니다.
이 태양은 앞으로 여러 달을 거치며 천상의 물을 가로질러 갈 것이고 재탄생이 약속된 봄의 한 가운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참고 별자리 : 물고기자리(the Fish), 암염소자리(the She-G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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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석
1. 이 글은 천문작가 Gavin White의 책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와 천문전승을 담은 에세이집 Babylonian Star Lore (ISBN-13 : 978-0955903748)를 번역한 것입니다.
2. 별자리 이름이 현대 별자리 이름과 혼동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는 '이탤릭체'로 표시하였습니다.
3. 본 글은 저자의 허락을 받아 포스팅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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