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9. 23:55ㆍ4. 끄저기/끄저기
"지구에 황인종들만 살았다면 인류는 아마 아직도 말이나 타며 활이나 쏘고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인터넷 포탈 사이트 댓글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CERN의 강입자가속기 실험을 통해 힉스를 발견한 것 같다는 뉴스가
보도되던 때였던것 같다.
말을 타고 다니며 활을 쏘고 다니는 것만해도 사실 기술 문명의 진보 역사에서
엄청난 진보를 이룬 수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미 인류의 문명 수준이 빅뱅이후 10억 X 10억 X 10억분의 1초 시점에
발생한 일을 논의하는 수준에 이른 현 시점에서 아직도 말이나 타고 다니는 문명
수준밖에 도달하지 못한 지구를 생각하면 갑갑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든, 저런 관점에서 바라보든 잊지 말아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책상에 앉아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나를 비롯해서,
사실 대부분의 문명소비자 계층은 자연상태에서는 불 하나 피울지도 모르는, 태고적 무지몽매한 원시인들보다 더 나약하고 무지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작 기술적이거나 생산적인 측면에서 스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국가 또는 종족, 인종의 예를 들어 무엇은 무엇보다 열등하며, 어디는 어디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작 인종차별이나 국가 혹은 종교의 우열을 들어 얘기하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찌질이'들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특히 이 책을 접하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는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민족들은 대대로 천대받고 멸시받아온 역사가 있고 인종차별의 피해에서도 빠지지 않는 단골 피해 인종임에도
그 어느나라 못지 않은 인종차별이 횡행하고 있는 곳이라는 특이성이 있다.
역지사지의 역량 부족과 아전인수의 과밀로 인해 정작 이 책에서 저자가 언급하고자 하는 중요한 내용들은 머리에서 싹다 잊어버리고
"재레드 다이아몬드 박사와 같은 세계적인 석학께서도 일본이 우리 한국의 후손이라고 하셨다!"라는 내용만 남게 될까 심히 우려스럽다는 점이다.
분명히 밝히거니와 전체 내용에서 한국, 또는 일본과 관계된 내용은 극단적으로 지엽적으로 다뤄지며
이 책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전체 맥락에서 이 부분은 아무런 변수도 되지 못한다.
이 훌륭한 책이 또 하나의 경계선을 긋는 원인으로 오용되기보다, 남과 나를 가르는 경계선을 지우는데 활용되기를 바랄 뿐이다.
1. 흐트러진 실타래를 갈라내는 학자적 열정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하나의 현상이 있다.
그리고 그 현상을 해석해 보려는 사람이 있다.
일반적으로 임의의 현상은 해당 현상을 해석하려는 관찰자의 의지와 성향에 의해 쉽게 오독되는 경우가 왕왕 존재한다.
나와 같은 필부들이 대부분 저지르는 잘못이거니와 왠만한 학자적 훈련을 갖춘 분들도
환경과 끊임없이 교감하며 형성된 자신의 틀을 깨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존재한다.
이 책을 보며 놀랐지 않을 수 없던 점 하나는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이러한 측면에서 시종일관 판단의 틀이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기원전 8,500년경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작물의 재배가 시작되고, 작물의 재배가 전파되거나 또는 시차를 두고 독립적으로 작물의 재배가 시작된
지역들이 나타나는데, 이처럼 작물의 재배가 시작되거나 전파되는데 있어서 해당 지역이 다른 지역과 다르게 가지고 있었던 환경적으로 유리한 이점은
무엇이었는가를 파헤치는 점.
각 지역에서 가축화에 성공한 야생동물의 차이는 왜 발생하는가에 대한 접근에 대해서도 역시 유라시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지역에서 가축의 후보가 될만한 종의 차이에서부터 이미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는 점.
작물의 재배가 가져온 잉여 생산량의 증가와 이로인한 대규모 인구 밀집 지구(도시)의 생성, 다양한 가축들로 인해 발생하는 전염병의 역사.
문자와 기술의 전파. 특히 분열된 사회에서 나타나는 기술 발전의 양상과 지역간 기술 격차의 심화 등.
우리가 그저 피상적으로 알고 있거나 심지어는 인종과 국가를 서열화하여 줄세우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기술 문명의 격차가,
사실은 집단이나 인종의 우월성이 아닌, 지리적, 환경적 요소에 크게 영향받은 결과임을 설명하는 저자의 자세는 이미 그 연결고리마저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심하게 꼬여버린 실뭉치를 하나하나 주도면밀하게 분석하여 풀어내려는 위대한 학자적 열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2. '환경'이라는 요소는 어디까지 우리위에 군림하는가?
이 책 전반에 걸쳐 저자가 제시하고, 사용하고 있는 판단의 틀은 '환경'이라는 제약변수가 절대적이다.
아메리카의 문명국가는 왜 유럽을 정복하지 못한 반면 유럽은 어떻게 아메리카의 문명 국가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유럽 지역의 국가나 인종이 우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럽은 유럽대로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아메리카는 아메리카대로 자신의 환경에
적응해야 했는데 그 적응의 진행 과정에서 기술의 격차를 만들어낸 환경적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관점은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으로 대변되는 서구기술문명의 우월성 및 이에 궤를 같이하는 인종차별주의의 견해에 대하여 분명
명쾌한 반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인류를 혁신과 발전의 주체가 아닌 환경에 종속되는 수동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것 같아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의 견해는 결코 이러한 감정에 양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견해를 따라가다보면 우리가 관성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들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 선입견, 편견의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명한 발명가 들은 모두 유럽, 미국 쪽에 몰려 있고, 이 발명가들에 의해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실 이 발명가들의 발명품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한 발명도 아니고, 발명의 결과가 의도한대로 맞아떨어진 것도 아니다.
드라마틱한 위인전의 기술과는 달리, 실제 위대한 발명은 그 이전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시도, 개량되었던 선례가 있었고,
그러한 일련의 연결선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발명은 발명 그 자체보다는 그 발명이 의도치 않은 효과가 - 발명가 자신이 아닌 - 누군가에 의해
시도되었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발명이 유럽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들어 그 지역 주민이나 사회의 우월성을 언급하는 기초가 되는 견해에 대해서도
저자의 의견은 명쾌하다.
혁신은 특정 지역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 어느때든 발생한다.
심지어 어느 지역은 반혁신의 물결에 휩쓸려 과거로 회귀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땅덩어리가 넓을수록, 더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을수록 혁신의 사례는 더 자주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중국처럼 일찌기 중앙집권화된 사회가 아니라, 예전부터 뿔뿔이 찢어져 있었던 유럽의 경우 혁신이 뒤쳐진 사회나 집단은 혁신을 받아들인
사회나 집단에 의해 지배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용이 더 적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고, 이러한 현상은 경쟁을 촉발시키고
경쟁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아이디어를 지닌 사람들 역시 자신의 아이디어가 특정 지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다른 지역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던 것 뿐이라는 것이다.
3. 새로운 혁신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사람들
장대한 인류의 서사시와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 이 책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의 가치는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어쨌든 현재 지구 문명은 국가라는 집단의 형태에 의해 뿔뿔이 쪼개져 있고,
무엇보다도 그 집단간의 관계는 배타적인 이해관계를 근저에 깔고 있다. 즉, 국가간의 경쟁 구도가 뚜렷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날 후기 산업사회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기업'이라는 좀더 노골적인 경쟁주체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왜 아시아는, 그리고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은, 기술문명의 경쟁에서 유럽에 뒤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규명하는 문제는
기업의 경쟁력을 지속하는데 있어서 분명 유용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혁신이나 아이디어는 어디서든,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며,
혁신이나 아이디어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그 혁신이나 아이디어를 또다른 시각에서 평가할 줄 알았던 다른 생각의 사람들,
그리고 그 혁신이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상시적 경쟁구도라는 요소들은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조직이 비대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관리하며, 개진된 의견에 대해 서로 평가할 줄 아는 조직을 만드는 것으로 모방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에필로그를 보면 이 책의 가치를 알아챈 기업인들에게서 혁신과 발전을 계속하는 기업을 위한 자문 요청 및 강연 요청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인류사의 정리에 해당하는 이 인문학 서적이 학계자체보다도 기업인들에 의해 주목받고, 더 활용되고 있는 이 사실이 저자가 설명한 바대로,
경쟁사회에서 보다 더 기술문명이 쉽게 받아들여지고 성장하는지를 표현해주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는 듯 하다.
하나의 잘 만들어진 텍스트가 인류의 지성사에 미치는 영향은 물론
인류 사회의 기원과 흐름에 대한 명쾌한 시각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방향까지 제시한다는 점에서 보면
저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책이 사회 각 부분에 끼칠 수 있는 파급력은 상상 이상의 폭을 가진 것임에 분명하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무지의 영역이 하나하나 깨어져 나가는 느낌을 이처럼 지속적으로 느낀적도 드물었던 것 같다.
사실 나 자신은 사실에 대한 관찰이나 있는 그대로의 설명보다는 가치판단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상당하여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가감없이 인지하고 묘사할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그 다음의 과정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에게는 과거를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해보는 안목이 언제나 지혜의 가장 큰 부분으로 인정되어 왔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런 안목이 갖추어졌을 때, 새로운 혁신과 발전의 과정에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총, 균, 쇠가 나 자신의 발전을 지속시키는데 필요한 것으로 지적해 준 고마운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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