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을 위하여 - 철학자의 토사물

2014. 5. 24. 00:474. 끄저기/끄저기

 

1. 어휘를 얻는다는 것.

 

     세계는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은 이 물리적 실체를 시각이나 후각 등 오감에 의해 인지하고
     하나의 실체가 다른 실체와 명확하게 다른 패턴으로 인지된다면 
     다르게 인지된 실체에 새로운 이름을 명명함으로써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구분해왔다.

 

     이러한 분절화는 물리적 실체가 아닌 형이상학의 영역에서도 수행되었다.

     따라서 물리계든 형이상학의 영역이든 세상은 인간에 의해 지속적으로

     분절되어 왔고 그것은 하나의 단편적인 어휘의 형태로, 또는 일관된 진술

     에 입각한 사상이나 자연법칙의 형태로 누적되었다.

 

     그러나 그 분절화는 사람마다, 국가마다, 민족마다 차이를 보인다.

     그 차이는 단순히 표기체계만이 다른 것일 수도 있고, 관념 자체가 다른

     것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아예 분절화의 경계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민족마다, 국가마다, 사람마다 보유하고 있는 어휘에는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가나 민족이라는 경계를 인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대체로

     세계를 분절해온 결과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집단간의 묶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나타나는 분절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관이 있으며 이 세계관은 철저히 그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어휘에 의해 구성된다.

     물리적 세계의 총량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따라서 물리적 세계를 지칭하는 어휘가 많은 사람은 그 세계를 좀더 세분화하여 인지하고 있는 셈이다.
     관념적 세계의 총량은 사람마다 다르다.따라서 관념적 세계를 지칭하는 어휘가 많은 사람은 관념적 세계의 영역이 그만큼 넓다고 할 수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세월호 참사에 대해 우리 사회에는 정부의 책임을 묻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이 사람들을 국가를 전복하고자 하는 종북세력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후자의 사람들은 이른바 '빨갱이'라는 의미 범주에 '새누리당 및 그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즉 의미 분화가 아직 덜 이루어진 것이고, 종북세력이라는 말은 관념적 세계에 대한 명칭이므로 이들이 가진 관념적 세계의 영역은 그만큼 폭이 좁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휘를 늘려간다는 것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인지를 치밀하게 구성하려는 노력, 관념적 세계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세계가 분절되기 이전인 원시 사회에서는 이러한 분절화를 이뤄낸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갑자기 내리치는 빛덩어리를 신의 노여움이라고 분절해낸 사람은 신의 의지를 읽는 사람으로 인정되었고,

     이러한 사람들은 그 사회의 대사제(왕)로서 사회를 지배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현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물리계에서 새로운 법칙을 분절해내는데 성공한 사람들은 노벨상 등의 상을 수상하여 사회의 존경을 얻고
     새로운 사상을 주창한 사람들 역시 그 사회의 지식인으로서, 인류의 지적유산을 풍성하게 만든 위인으로서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라 불리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하나의 뭉뚱그려진 현상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분절해 냄으로서 대중의 공감과 이목을 끄는데 성공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런 말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어휘를 가진 자, 세상을 가지리라!

 

 

2. 내가 얻은 어휘.

 

     구구절절 이렇게 따분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의 나는 나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세상을 분절해 낼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세상을 분절해내는 어휘를 하나 더 늘릴 수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그 하나만으로도 내가 너무나도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 어휘는 바로 '단독성'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분명히 구분되며, 그 사람이 진실로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단독성'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단독성'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보편성'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단독성'과 '보편성'이라는 두 개의 어휘는 지배와 위계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려 했던 들뢰즈에 의해 분절된 개념으로서 
     들뢰즈에 의해 분절이 이루어지기 전에 동일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어휘는 '특수성'과 '일반성'이었다.

 

     그러면 들뢰즈는 '단독성'과 '보편성'을 '특수성'과 '일반성'에서 어떻게 분절해 낸 것일까?
     강신주는 그 분절화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다.

 

     들뢰즈 이전 서양형이상학 전통에서는 '일반성'과 '특수성' 개념의 구분이 핵심이었다.
     예컨데 '인간'이란 개념이 '일반성'이라면, 이것은 강신주나 김서연(이 책의 편집자) 혹은 김수영을 포괄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이 경우 강신주나 김서연 혹은 김수영은 일반성에 포섭되는 '특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3명을 죽이라고 하면, 이 세 사람을 죽이면 된다.

 

     사실 일반성과 특수성의 도식이 가장 극적으로 적용되는 사례가 자본주의다.
     사람이나 사물이 모두 돈으로 구매 가능한 상품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돈은 '일반성'을, 사람이나 사물은 '특수성'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일반성/특수성' 도식에 입각한 사유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일반성에 포섭되는 특수한 것들은 서로 교환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이로부터 일반성이 특수성을 지배한다는 지배와 위계의 논리가 탄생한다.

 

     들뢰즈는 지배와 위계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그는 강신주, 김서연, 김수영, 그리고 들판의 이름 모를 꽃들 각각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는 개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일반성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소모품처럼 소비되어 온 개체들의 삶을 긍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일반성'이란 기준에서 개체나 사건을 교환 가능하다고 보는 '특수성'이란 개념을 극복해야만 했다. 

     이런 고민이 응결되어 나온 개념이 바로 '단독성'이다.
     이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체성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모든 개체나 사건들이 다른 것과 교환 불가능하다면, 이들은 어떻게 서로 관계 맺을 수 있을까?
     그래서 들뢰즈는 '일반성'과는 다른 '보편성'의 원리를 제안한다.
     그것은 지극히 단독적인 것만이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다는 원리이다." (116~117)


 

 

3. 서툴게 시도해본 잡생각들

 

     내가 몸담고 있는 IT 업계에는 '가동율'이라는 말이 있다.
     특정 조직원 중 프로젝트에 계약되어 현재 매출을 발생시키고 있는 팀원의 비율이 얼마인지,
     개개 팀원으로 보면 1년 중 매출을 발생시킨 기간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따지는 용어이다.

 

     이 단어는 철저히 '일반성/특수성' 논리에 근거한 단어이다.
     특수한 개인을 일반적인 비율 속에 예속시킴으로서 비율 속의 개인은 치환이 가능한 존재로서 치부되기 때문이다.

 

     '가동율'이라는 말 자체가 워낙 사람 냄새가 아닌 기름 냄새가 나는 단어이다보니
     몇 년 전 '가동율' 대신 '투입율'을 사용하자는 의견이 개진된 적도 있지만
     이 단어 역시 기름 냄새가 조금 줄어들었을뿐 기본적인 개념은 '일반성/특수성'의 범주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숫자의 입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기업의 입장에서
     퍼센테이지로 나타나는 수치는 의사소통 및 결정에 있어 효과적인 근거가 될 것이다.

     기업의 본질은 자본주의이고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지배와 위계의 논리만큼 맹위를 떨치는 것이 없는만큼,
     아무리 첨단 산업이라는 IT라 한들 당분간 이 범주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성원 하나하나가 '단독적'인 구성원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거나
     '단독적'인 구성원이 되게 하기위한 제도적 배려가 없다면
     기업이 그토록 원하는 창의적인 회사(그래서 결국 매출 증대에 기여하는 회사)를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한 개인은 주체보다는 타자와의 관계로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 사람 자체보다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아들로서, 딸로서, 친구로서, 직원으로서, 국민으로서 등등의
     일반화에 익숙한 경향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무엇"으로서 존재감이 강화되는 개인은 대체 가능한 '특수성'의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오히려 그 개인이 관계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관계의 주체로서 불리고, 철저하게 그 자신의 색깔이 강회되어 갈수록,
     즉, 관계로부터, 배경으로부터 철저하게 독립되어 '단독성'을 획득할수록 오히려 보편적인 "누구의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를 따라가고
     내 판단이 아닌 다른 이의 판단에 쉽게 경도되는 개인은
     언제든 치환 가능한 일반인들 속의 특수 개인으로 남게 된다.

 

     따라서 내가 내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치환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소리쳐 알리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소리, 자신만의 판단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단독적인 존재가 되어야만 그 개인은 인류라는 보편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아가게 되는 것이다.

 


4. 강신주의 토사물

 

     이 책은 '강신주'가 '김수영'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송별사이다.

 

     강신주에 의하면 김수영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김수영이 김수영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시를 쓰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한 사람이다.

 

     본 책에 등장하는 김수영의 각종 시와 산문들은 철저하게 단독적인 존재가 되려 노력했던 김수영,
     그래서 보편적인 시의 반열에 자신의 시를 올릴 수 있었던 보편적인 시인 김수영이라는 관점하에 재단되고 평가되고 있다.

 

     또 한편 이러한 평가는 강신주가 '강신주'이기에 할 수 있는 김수영에 대한 해석의 시도였다.
     즉, 강신주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김수영을 평가함으로서 자신의 단독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강신주의 말마따나 이 책을 김수영에 대한 조사(弔辭)나 묘지명(墓誌銘)으로 헌정하고 
     강신주는 김수영을 떠나 강신주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 한 가지 각오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철저하게 강신주가 소화시키고 게워낸 김수영을 받아 먹어야 한다는 각오 말이다.

 

     이건 김수영의 시를 김수영의 시 그대로 한 번 접해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겐 대단히 치명적인 선택이다.
     그것이 대단히 치명적일거라는 생각을 책을 읽고나서 알게 되었으니 나란 놈은 얼마나 둔한 놈인가!

 

     하지만 강신주가 게워낸 김수영이나마 내게는 너무나 황공하기 그지없는 토사물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강신주가 되씹어준 김수영의 시가 아니었다면 나는 절대 김수영의 시를 소화시키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이 2012년에 발행되었으니
     과연 강신주는 이후 철학자 강신주로서 단독적인 걸음을 걸어오고 있다.

     그가 우리 인문학계에 또하나의 단독자로서 우뚝 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