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에서 벗어나다.

2023. 10. 19. 20:011. 별과 하늘의 이야기/하늘앓이 - 별지기의 이야기들

예전에 한국아마추어 천문학회라는 단체에서 3년 간 연수국장을 맡은 적이 있다.

 

한국아마추어 천문학회는 학회 내에 담당업무를 나눈 이런저런 '국'이 있다.

지금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그나마 제대로 운영되는 부서는 연수국이 유일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연수국이라는 부서에서 책임진 영역이 천문지도사를 양성하는 부분인데 

이 일이 지원자에게서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서 

돈을 받은 이상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급여를 받고 하는 일이 아니었고 일종의 '자원봉사' 였다. 

 

물론 나는 그 일을 자원봉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일 자체가 재미있었고 그 일을 통해 내가 배운 게 오히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일을 맡고 보니 이왕 하는거 제대로 해야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나름 내 삶의 한 부분을 깊게 떼어 열정을 쏟았던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내가 연수국장을 맡고 중점을 둔 부분은 제대로 된 평가였다.

 

한국아마추어 천문학회의 주요 구성원들이 학교 선생님들이었고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일이 교육과 평가라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 문제가 없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일을 맡아보니 당황을 넘어 충격이라 할 정도로 아무 기준이 없었다.

 

그때 만든 여러 기준 중 하나가 '관측기'였다.

 

적어도 천문지도사라면 남에게 천문에 대해 가르칠만큼의 역량을 갖추어야 했고

아마추어 천문 영역에서 그 역량은

본인이 직접 필드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관측'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내외 자료와 국내 천문 동아리의 관측 일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최종적으로 '딥스카이 관측기' 표준 양식을 수립할 수 있었다. 

 

딥스카이 관측기 표준 양식

표준 양식을 수립했다는 것은 관측자체도 자체지만

우수한 관측과 그렇지 못한 관측을 평가하는 객관적 지표도 함께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행성과 달, 일식에 대한 표준 관측기 기준도 수립하고 싶었지만 

그것까지는 역량이 부족하여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딥스카이 관측기 표준을 수립하고

이 양식에 의거하여 관측과 평가를 진행한 것은 지금도 내게 큰 보람으로 남아 있다.

 

 

문제는 그 이후 오랜 동안 나 자신에게서 발생했다.

 

나는 이미 한국아마추어 천문학회를 떠난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저 관측기 양식에 얽매여 관측을 진행하고 있었다.

 

'학습과 평가'라는 측면에서 규정된 관측기다보니 사실 좀 귀찮은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날 그날의 시상과 투명도를 우선 확인해야 했는데

시상을 확인하려면 내 망원경에서 구현 가능한 최고 배율을 선택하여 별상을 확인해야 했다. 

 

망원경, 가대, 접안렌즈, 필터를 적는 부분은 

결국 내가 가진 장비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자꾸 반복되는 부분이었다. 

 

여러 배율로 확인하는 것에 대해서도 

"한 배율로라도 밤새 실컷 뜯어보면 소원이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저런 배율로 바꿔 보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쨌든 관측기에 규정된대로 관측한 내용들도 꽤 있고 일부는 이곳 블로그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참고 : M57 관측기 )

 

그런데 이렇게 규정된 관측을 계속하다보니

어느 순간 관측기를 쓰는 게 참 재미없는 일이 되어 버렸고

그래서 관측기를 쓰고도 정리하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다. 

 

지난 월요일(2023년 10월 16일)

관측을 나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 그냥 내가 쓰고 싶은데로 쓰자. 

그날 그날, 내 가슴이 보라는 걸 보고, 내 가슴이 느끼라는 걸 느끼고 그 느낌을 적도록 하자. 

내가 봐서 좋으면 그만이지. 

이런 형식이 뭐람?

 

그날 관측을 마친 후 두 편의 관측기를 적었다.

 

북극성NGC 6826에 대해서였다.

 

재미있는 것은 전혀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음에도 관측기를 쓰는데

여러 자료를 동원하느라 꼬박 하루씩 이틀이나 걸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나온 글이 내 마음에 너무너무 들었다. 

 

 

그래!

이게 관측기지. 

그 누구의 관측기도 아닌

나와 나만의 하늘이 담긴

나의 관측기!

 

참 뿌듯했다.

 

난 왜 그 동안 '관측기'라는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걸까?

 

가만 생각해보니 '딥스카이 관측기'를 만들기까지 고생했던 수고에 대한 보상심리였던 것 같다.

참 내 마음인데도 내가 모른다.

그 마음이라는게 째째하기 이를데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위로하기로 했다.

 

그래.

그때 너 수고 많이했어.

정말 열정을 바쳐서 했어.

그러면 된 거야.

사라져버린 것에 미련을 두지 말자.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여전히 지금 여기 함께 있는

바로 나의 시각과 나의 느낌이니까.

 

 

그렇게 형식을 벗어던진 첫 날 너무 즐거운 관측을 했다.

가슴이 뛰고 잠자코 있던 설레임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일 또 나가야지.

그 하늘 아래

나만의 하늘을 만나러 말야!

 

이제부터 이 하늘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