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순례하다

2012. 4. 1. 23:264. 끄저기/끄저기

햇수로 치면 벌써 4년전.

그러니까 2009년의 일이다.

 

회사에서 정말 옮기고 싶은 팀이 있었는데

번번이 팀 전배를 약속해 주셨던 팀장님이

두 분이나 교체되었고,

정말 전배를 해 주실 것 같았던 세번째 팀장님도

이래저래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원했던 전배가 이래저래 실행되지 않다보니,

그리고 하필이면 당시 하던 일이 사사건건 안 풀리다보니

나는 결국 회사 생활을 접을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을 한다면

당연히 회사를 그만 둔 그 다음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결국 안주인과 진지안 상의 끝에

당시 한참 뜨고 있던 제주도 올레길목에서

게스트하우스 또는 민박을 하기로 합의를 했다.

 

은행에 빚을 내어

그길로 제주도에 가서 땅을 계약하고

집을 내놓고...

모든 일이 착착 돌아가고 나서 2개월 후

팀장님께서 내가 그토록 원하던 팀 전배를 해 주었다.

 

결국 나는 지금 현재 회사 생활을 계속하고 있고,

은행에 빚이 있는 한편, 

                                                                                                                                         팔자에도 없이 제주도에 내 소유의 땅이 있는 처지가 되었다. 

 

지금도 간혹 회사에서 '나는 우리 팀 덕분에 시골에 땅 좀 있다.'고 농담반 진담반의 얘기를 하곤 한다.

 

내가 만약 그 때 정말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에서의 삶을 선택했다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물론 나는 제주도에서 살아가고 있을 내 모습을 부정적으로 보지도,

그리고 현재 내 삶을 긍정적으로 보지도 않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정말 다른 건 하나 있었을 것 같다.

그건 다름아닌 내가 그 당시에 바로 제주도로 내려가 집을 지었다면

너무나 후회스러운 집을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설령, 그 집이 게스트하우스라 하더라도, 나는 집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 '집을, 순례하다'와 '집을 생각한다'라는 책은 이러한 나의 무지를 깨닫고 

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집을 순례하다'는 일본의 주택전문 건축가인 나카무라 요시후미 씨가 

20세기 건축의 거장이 설계하고 건축한 아홉개의 집을 방문하고 기록한, 말 그대로 '순례기'이고

'집을 생각한다'는 나카무라 요시후미 씨가 생각하는 집이 갖추어야 할 열두 가지 풍경을 정리한 책이다. 

 

집에 대해 그려지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웅장한 것을, 아기자기한 것을, 세련된 것을 의미하거나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모든 내용들은 그 집에서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갈 사람들에게 포커싱되어 있다. 

 

사람이 어떻게 길모퉁이를 돌아 멀리서 집을 보며 다가오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디에 앉아 휴식을 취하게 되는지,

어떻게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창문을 내다보고, 햇빛을 받아들이게 되는지, 

어떻게 가족과 만나게 되고, 어떻게 잠자리에 들게 되는지.

 

정작 중요한 일상의 스토리는 4년 전 내가 생각하는 '집'이라는 하드웨어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던 요소들이었다.

그러나 실상 집은 하드웨어가 아닌, 삶이라는 소프트웨어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결국 내 머릿속에서 4년 전에 처음 그려본 언덕위의 그림집이라는 깡통은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내가 걸어가게 될 동선, 내 손이 닿게될 곳곳의 느낌들, 아니 그것보다도

그 곳에 직접 가서 집터 주위에 불고 있을 바람과 냄새를 먼저 맡아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다. 

 

내가 언제 제주도에 내려가서 살게 될지 모르겠다.

과연 설문대할망께서 나를 제주도의 인연으로 초대해 주실 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계기였든, 그곳에 한 자락의 땅이 있음으로 해서

가끔은 또 다른 삶을 꿈꾸게 되는 에너지가 되고 있다.

 

만약 내게 그것이 허락되어 내 손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게 되면,

그것은 '집'이 아니라, 그 때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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