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7. 22:59ㆍ4. 끄저기/끄저기
'사랑'이라든가, '정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항상 느껴지는 감정 중의 하나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마력과도 같은 힘에 대한 경외감이다.
임의의 행위나 감정 덩어리들 중에서
특정 목적을 향해 일관성있는 패턴을 보이는 행동이나 감정을 모아
하나의 단어로 묶어버리는 행동.
나는 간혹 이러한 느낌에 전율을 느끼기도 하지만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룬 문자로 봉인'하는
이 위대한 행동을 처음 한 천재는 북유럽 신화의 말마따나
인간이 아닌 신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만약 역으로 이 특정 단어에 묶인 의미덩어리들을 해방시킨다면
그 하나하나의 의미, 행동, 감정의 바다에 빠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게된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정의'이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묶인 이 한권의 책에는 '정의'라는 단어에서 해방된
의미와 감정과 행동이 길길이 날뛰고 있다.
그리고 그 의미와 감정과 행동의 상충에 고민해야 했던 인류의 역사 또한 그대로 담겨 있다.
1. 역설덩어리 '정의'의 인식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던, 정말 지금생각하면 뭐 하나 무서울게 없었던 그 시절,
약 2년간에 걸쳐 나는 내 인생에서 되돌리고 싶지 않은 아픈 시절을 보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원인 중 하나로 , 내가 '정의란 보편적이며, 원칙적으로 정해져 있는
실체가 있다'고 '착각'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야 4.2)
그 때는 칼과 창은 악이고, 보습과 낫은 선이었던 시절이었다.
이 사실은 내겐 흑백논리만큼이나 당연했고 따라서 비가역적인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칼이나 창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보습과 낫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무지에 다름 아니었다.
2. '정의'는 '고민하라'의 또 다른 표현.
책의 내용도 시종일관 이런 패턴이다.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하나의 상황이 제시되고 그 상황에 대한 판단을 요구한다.
판단이 되었다면 그 상황에 대한 역설과 모순 상황이 제시되고 그 상황에 대해 처음의 판단이 유효한지를 묻는다.
역설적인 상황에 대한 사고의 혼란이 발생하고, 그러한 혼란에 대답하고자 했던 인류 지성의 이론이 소개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답은 제시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 대해 함부로 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경험"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답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던 "판단 훈련"뿐이다.
그러나 결국 이 책이 의도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정의의 본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을 받으며, 그 질문에 답을 할 때, 심사숙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책이 담고있는 목적, 그리고 저자 마이클 샌델이 의도하는 것은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 인상깊었던 대목 - '서사적 존재'
이 책이 불러일으킨 센세이션은 현재 대한민국이 처해있는 상황에도 무척 시의적절해 보인다.
너무나도 쉽게 답이나 방향의 결정이 반복되는 우리 사회.
그것에 대해 역시 반복되는 격렬한 저항과 반발, 그리고 그것을 가차없이 찍어누르는 야만적인 권력의 반복.
과연 지구의 한켠을 점유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구성원들은 얼마나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러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훈련을 받기는 했던 것일까?
실제 대한민국의 현실이 많이 부족하더라도,
이러한 책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베스트셀러가 되었었던 대한민국 역시 희망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미국이 그냥 공짜로 세계 유일의 강대국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
한편 책의 여러 내용중 인상 깊었던 내용은 서사적 존재로서의 개인에 대한 내용이었다.
"내 나라가 한 일에 대해서는 내가 그 책임을 떠맡기로 직간접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이상 내 책임은 없다.
이 같은 개인주의는 현대의 미국인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미국 흑인에게 나타나는 노예제의 영향을 보고도 일체의 책임을 부인하면서
'나는 한 번도 노예를 소유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매킨타이어는 젊은 독일인의 예를 제시하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1945년 이후에 태어났으니, 나치가 유대인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든
현재 자신과는 도덕적으로 연관성이 없다"고 믿는다.
매킨타이어는 이 예에서 도덕적 천박함을 발견한다. "나는 사회적. 역사적 역할과 지위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P311~312 발췌)
아마 일본에 지속적으로 사과를 요구하고, 공교육을 통해 새로운 세대가 일본에 대한 채권의식을 훈련받는 우리 상황에서 고민이 필요한 내용일 듯 하다.
이 내용은 우리가 일본에 과거의 만행에 대해 계속 사과를 요구하고,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철학적 근거로 사용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근거를 한 번 확장해보자
- 친일파의 자손들은 이 사회에 사죄해야 할까? 그들의 재산은 친일의 댓가에 기반한 것이므로 국가에 귀속되어야 할까?
- 대기업이 골목상권에까지 침입하면서 자영업자들의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이로인해 서민 경제가 피폐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대기업에 소속된 직원들은 이에 대한 책임을 일정부분 나눠지고 세금을 더 많이 내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할까?
그 단체에 소속된 것만으로 죄의식을 공유해야 하는 걸까?
이 정도의 질문만으로도 한 번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계속 확장한다면 같은 논리에 가해자로서 걸려들지 않을 사람들이 많지는 않아 보인다.
이러한 문제를 겪지 않으려면 어느 지점에선가는 논리의 확장을 끊어야 할 텐데 이를 위하여 근거삼을 만한 철학적 기반은 또 무엇일까?
책을 덮으며 이러한 질문에 고민을 해야 했다.
아마도 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겠지만, 그것이 어렵다고 해서 고민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책을 통해 양심과 이성이 계속 고민을 요구한다는 각성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고민을 하기 전이나 고민을 하고 나서나 취할 수 있는 행동방향에 변함이 없다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