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1. 16:05ㆍ4. 끄저기/끄저기
93세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외침.
담백한 사실과 경험,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호소를 담아내는 데
13장의 분량은 전혀 짧게도 가볍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을 접하면서 가진 첫 느낌은 부러움이었다.
하나의 사회집단이 구성되는데, 그리고 그 사회집단에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그 사회의 연장자가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연장자가 '분노하라'고 외칠 수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가능성과 에너지를 품을 수 있겠는가?
1. 저자의 삶 - 스테판 에셀
이 책은 저자의 삶 자체가 만들어낸 책이라 할 수 있으므로
저자에 대한 이야기를 빼는 것은 오히려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저자인 스테판 에셀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드골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한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었다.
1944년 파리에서 체포된 저자는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되지만
극적인 탈출에 성공하였고, 종전 후 프랑스의 외교관으로서 유엔세계인권 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1948)하였으며, 유엔주재 프랑스 대사,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1917년 생인 저자는 이 책이 출간된 2010년 93세의 노인이었으나
1%와 99%의 시대에 대한 논란이 글로벌 이슈로 부각되기 전에 이미
프랑스 사회에서 불어 닥친 일련의 금융자본주의적 흐름에 분노하여 이 글을 쓰게 된다.
2. 무엇을 요구하고 있나.
저자는 우선 프랑스의 원칙을 묻는다.
현대의 프랑스는 1944년 3월 15일,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채택한 개혁안에 기초하며
이로부터 자유 프랑스가 지켜나가야 할 원칙과 가치가 설정되었다. 즉, 민주주의 프랑스의 정체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모든 시민들이 노동을 통해 스스로 살길을 확보할 수 없는 어떤 경우에도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사회보장제도와 퇴직연금제도의 완벽한 구축"
"공동 노동의 결실인 대표적 생산수단 - 에너지원, 전기와 가스, 탄전, 거대은행들의 소유권은 국가로 복귀되어야 한다는 점"
"경제계, 금융계의 대재벌들이 경제 전체를 주도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포함한 진정한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의 정립"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며, 노동계가 창출한 부를 정당하게 분배하는 일이 금권보다 중시되어야 한다는 점"
"언론의 자유, 언론의 명예, 그리고 국가, 금권, 외세로부터 언론의 독립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
저자는 프랑스가 이러한 원칙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기초가 슬슬 부정당하고 있다는 점에 분노하고 있다.
특히 복지정책에 돈이 들어간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 이유를
"레지스탕스가 투쟁의 대상으로 삼았던 금권이 전에 없이 이기적이고 거대하고 오만방자해졌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오만방자한 세력은 볼셰비키 혁명을 지독히 두려워한 가진자들의 두려움과 다르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 두려움이 이끄는 대로 생각없이 행동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따라서 자신의 세대가 그러했듯, 이러한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분노의 이유들은 감정이 아닌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나며,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고 일갈하고 있다.
저자는 현재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두가지 도전으로서
첫째, 극심한 빈부격차, 둘째, 인권과 지구의 현재 상태를 들면서 그 관심을 전지구적인 범위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서
예를 들어 절대적으로 열등한 무력이 부당하고 강대한 폭력앞에 일시적인 폭력(테러)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하면서도 폭력으로서는 절대 희망을 달성할 수 없다는 점 역시 명확히 하고 있다.
3. 인상깊었던 단어 '보편적'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세계인권선언의 문안이 작성되던 때의 일화였다.
1948년 당시 54개 회원국이 참여한 세계인권선언에 대해서
영어권 국가들의 대표들은 '국제적(International)'이라는 단어를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보편적'이라는 말로 대치되었고 우리가 세계인권선언으로 알고 있는 이 인권선언의 원어는 "보편적 인권 선언"이라고 한다.
단 한 단어의 차이는 거대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국제적, 세계적이라는 말은 개별 국가의 주권논리에 막힐 수 있지만 보편적이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주권논리의 상위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겉으로는 동참한다고 공언하면서도 실제로는 약소국 정복을 일삼는 국가들의 위선에
속아넘어가서는 안되며, 신속한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4. 부러움.
얇은 책이지만 사실 서평이라는 몇몇 찌질한 글로는 평가할 수 없는 부담을 지워준 책.
무엇보다 아쉬웠던건 바로 우리 나라의 상황으로 인한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부러움이었다.
우리는 식민지를 겪었으나 그 식민지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댓가로 인해
자기부정의 본능을 가지고 있었던 인간들이 계속 이 사회의 기득권을 쥔 채 유지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자기부정으로 살아남았던 사람들이고
이 경험이 마치 성공을 위한 조건인 양,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기부정을 강요해왔다.
그 결과 기업집단, 공공집단에서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라는 게 일반인들의 유일한 조직미덕으로 굳어진지 오래다.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삶을 사는데, 도대체 뭘 참아야 한다는 걸까?
비록 우리 사회도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그리고 제도적인 측면에서 정치의 민주주의를 달성하긴 했지만
여전히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최초 일제시대, 일본이 조선인에게 강요했던 자기 부정의 요구가 그리고 그러한 자기부정에 수긍했던 사람만이
사회에서 성공했다는 잘못된 예시가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
생각해 보라.
아직 우리나라는 "빨갱이"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있다.
이들이 얘기하는 빨갱이는 바로 해방 후 친일파를 과감히 척결하던 그 때의 빨갱이에 더도 덜도 아니다.
만약 해방 후 미국이 친일파를 척결했다면, 이들은 지금 지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반미주의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제 우리사회에서도 자기부정의 경험이 아닌, 자기노력으로 성공경험을 체득한 사람들이 사회의 주요세력으로 떠오르고 있고
그러한 자원은 앞으로도 더더욱 풍부해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비록 나는 93세의 노투사보다 훨씬 연로한 정신세계에 머물고 있는 소시민이지만
나도 분명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뭔가 기여할 수 있다는 씁쓸한 희망 또는 자기위안으로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