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깊다

2012. 4. 22. 00:364. 끄저기/끄저기

솔직히 말하자면
EBS 역사 이야기를 통해 처음 접한 전우용 선생님은

참 재미없는 선생님이었다.

 

'일반 민중들의 삶에 주목한 최초의 역사학자.'
멋진 소개문구에도 불구하고 수업이 재미가 없다보니,
역사의 기록에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못하는 일반 서민들의 삶조차도
그닥 주목할만할 것이 못될거라는 느낌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며칠 후 트위터에서 우연히

전우용 선생님(@histopian)의 글을 보게 되었고
반가운 마음에 냉큼 팔로우를 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펼쳐지는 전우용 선생님의 모습!!!

140바이트에 담기는 약 100여개의 글자만으로 표현되는

촌철살인의 문구들!, 날카로운 풍자!!
무엇보다도 가장 맘에 들었던, 지식인의 풍모가 담긴 경쾌한 냉소!!!

트위터에서 만난 전우용 선생님의 모습은

EBS강의에서의 선생님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공중파 방송이다보니...

전선생님 성질 죽여가시면서 강의하신 거구나..^^

 

결국 냉큼 구입하여 읽은 '서울은 깊다.'

 

그리고 책을 덮는 지금, 왠만한 소설책보다 더 재미있게 읽힌 이 책에서
"민중들의 삶에 주목한 최초의 역사학자"의 위용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는 '그래 이거야. 내가 원했던 책. 내가 보고 싶었던 책이 바로 이런거란 말이지!' 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이다.
이런 생각은 심지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2012년이 아직 4월이 지나지 못했지만,
아마도 2012년 나의 최고의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1. 민초의 삶에 주목하는 시각의 매력
   EBS에서 처음 전우용 선생님의 강의를 봤을 때, 앞서 언급했듯, 강의가 별로 재미가 없다보니

   별달리 기록도 많지 않을 민초들의 삶을 주목해봐야, 자료가 얼마나 있을 것이며, 또한 무슨 대단하게 주목할만한 사건이 있을 것인지,
   결론적으로 뭐 재미가 있을것인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은 결국 '역시 무식하기 그지 없는 나' 자산의 모습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이 책에서 전우용 선생님은 민초의 삶에 주목하는 시각이
   얼마나 다채롭고 역동적이며, 얼마나 많은 지식과 이야기와 재미를 끄집어 낼 수 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서울의 뒷골목, 하수도, 거지와 무뢰배, 서울깍쟁이, 술도가, 시장이야기 등등...
   이런 이야기들은 특정 분야를 담당하는 전문 민속학 서적에서는 간간이 찾아볼 수 있거나

   찾아보았다 하더라도 주석이 가득달린 따분한 학구적 이야기이거나
   그나마 풍속학이나 민속학에서조차도 보이지 않던 얘기들임에도
   전우용 선생님은 이 모든 요소들을 방대하게, 깊이있게, 무엇보다도 가볍지 않으면서도 재미있게 다루고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도시는 생산을 하는 곳이 아니다. 즉, 끊임없이 소비를 하는 곳이다. 따라서 도시는 끊임없이 농촌을 수탈한다.
   여기까지는 왠만한 도시공학 입문서를 보는 듯 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전우용 선생님의 시선은 소비하고 수탈하는 도시 서울에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노는 놈들과 무뢰배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캬~ 이러한 시각, 이러한 전개. 나는 왜 이런 생각을 상상으로라도 하지 못했을까.
  
   책의 중후반은 개화기의 문화충격에 대한 민초들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지하철 1호선으로 이어지는 종로 전차의 시작과 여기에 얽힌 일화들, 사회사적 의미를 담은 이야기들,
   시간이라는 개념이 침투하는 이야기로서의 시계,
   사진과 시장 이야기, 생각지도 못했던, 정수기 통에 실려 있는 역사인 물장수 얘기,
   얼마나 찰진 단어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 준 복덕방 이야기.
  
   하나하나 뚜껑을 열때마다 거기에 켜켜이 쌓여 있는 이야기들이 들춰지고,
   그렇게 끝도없이 들춰지는 이야기들을 건져내며 책의 제목처럼 서울이 얼마나 깊은 곳인지, 

   과연 민초의 시각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시각인지를 뼈져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2. '깊은' 서울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에서는
   한국이 가지고 있는 '깊은 산'의 의미를 외국인과 공유하는 내용이 나온다.(순천 선암사 편)
   영어에서 산은 '높은 산'이지, '깊은 산'이 아니다.
   그러나 산의 능선이 첩첩이 포개진 대한민국 산야의 모습을 통해 '깊은 산'의 의미를 이해하는 외국인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깊은'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Deep'이 '깊은 산'과 같은 의미로 아예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Hubble Ultra Deep Field'는 허블 우주망원경이 장시간의 노출로 담아낸  원거리 우주를 의미하는데

   아마 이때의 Deep은 '깊은 산'의 '깊은'과 대응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깊은 서울'의 느낌 역시 물론 우리 한국인들만이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은 모르겠으되, 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는 서울처럼, 아니 서울보다 훨씬 오랜 세월의 역사를 켜켜이 쌓아둔 도시들이 많다.
   물론 유럽의 도시들, 팠다하면 역사 유물이 쏟아져 나와서 아무 개발도 못하고 있다는 로마를 비롯하여
   파리, 런던, 마드리드 등, 역사를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런 도시들 역시 '깊은'이라는 의미를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쪽 동네에 이처럼 일반 민초들의 시각으로 도시를 바라봐줄 역사학자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없을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방점을 두고 싶은 것은 분명한 건 우리는 그런 시각을 가진 역사학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학자께서 서울에 얼마나 두껍게 인문학적, 문화적 지층이 퇴적되어 있는지를 밝혀주시고 계시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울을 '깊은' 도시로 인식시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한 집단에서 한 두 분의 지식인으로 인해 그 집단 전체가 누리게 되는 자긍심이자 혜택인 것이다.
   (전우용 선생님 감사합니다.)
  
3. 짜잘한 감상의 조각들.
   아주 불공평하고 삐뚤어진 생각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나는 지역적으로 경상도를 맹주로 하고 있는 신라의 문화에 대한 삐딱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 알고 있다. 그냥 심정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이 '서라벌'에서 이어진 어원을 가졌다는 고등학생때의 언어변천 도식도 마음에 안들었다.
   그래도 배운 것이 그거다보니, EBS 역사이야기에서 전우용 선생님 '신시(神市)'에서 유래된 서울의 이야기를 하실 때 '어..그거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책의 첫번째 장인 '신시(神市) 서울'에서도 역시

   성역을 의미하는 삼한의 소도 -> 솟은 벌, 솟벌, 솟은 울, 솟울 로 이어지는 서울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제시하시고 있다. 

   아! 사실이라고 믿었던 생각이 깨져나갈때의 이 쾌감이란!

   그것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ㅋ
   물론 전우용 교수님의 의견 역시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지만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는건 서라벌이 서울의 어원이라는 시각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나는 이제부터 서울을 '성스러운 도시'가 어원인 것으로 인정할 것이다.
   더 멋지잖아!!!
  
   책을 계속 읽으면서 자칭 역사학자라는 분의 언어에 대한 감수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예를 들어 동물 이름 앞에 '똥'을 넣어 부르는 것은 개, 돼지, 파리 밖에 없다든가(이유가 분명했고),
   땅거지의 역사적 어원(정말 역사적 어원이 있더라...그 놀라움이란..)
   '어섭쇼'라는 애매한 존대법의 역사적 근거,
   '전'(어물전, 골뚜기전 등), 점포의 점, 방의 의미차이,
   돌아다니는 장사꾼의 3음절 호객과, 한자리에 정주한 좌고의 많은 정보를 담은 빠른 템포의 호객 차이 등,
   거의 모든 장에서마다 등장하는 접두사, 접미사의 의미,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어원과 그 역사적 근거 등등은
   역사학의 위력이 단순히 과거만을 들추는 것이 아님을,
   전선생님의 지식의 폭이 깊이뿐만 아니라, 폭에 있어서도 대단히 방대하심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개인적으로 24장 '물장수' 부분은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었다.
   노비의 '노'는 땔나무를 운반하는 종, '비'는 물을 운반하는 종.
   단순히 성구분인줄로만 알았는데, 물은 원래 여자가 날랐다는 사실과 멋지게 랑데뷰된다.
   그리고 원래 여자가 하던 일이므로 물장수는 비천한 직업이었다는 것.

   개화기 수도시설이 들어오던 얘기, 그리고 물의 공급이권에 얽힌 갈등 이야기들.
   수도보급율이 높아진 이후 10년만에 물부족 국가로 전락하고,

   수도물에 대한 불신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물장수(각종 생수, 광천수, 정수기)이야기는
   어릴적 실제 겪었던 경험이 연계되면서 아련했던 예전의 기억까지 떠올릴 수 있었고
   지금 집에서, 사무실에서 보는 '정수기 통'에서마저도 켜켜이 쌓인 역사를 느끼게 해주었다.
   
전우용 선생님의 글은 앞으로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계속 구입하여 읽어볼 생각이다.
이미 트위터를 통해 전우용 선생님의 글을 타임라인에서 가장 먼저 찾아서 읽어보고 있다.

매일매일 새로운 지식의 편린을 받을 수 있다는 즐거움. 

책을 통해 더 큰 지식들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전우용 선생님은 2012년 4월의 내겐 대단히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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