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24. 23:47ㆍ4. 끄저기/끄저기
세계사에서 르네상스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다뤄진다.
아마 르네상스 이전 시기까지 카톨릭의 패러다임이 워낙 강력하게, 그리고 워낙 장기간 동안 유럽을 뒤덮고 있었으니 중세 패러다임의 변혁을 말하는 르네상스는 이전 패러다임의 강력함에 힘입어 더욱 의미있고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리라.
하지만 결론적으로 유럽의 문명이 지구 전역을 장악한 지금의 상황에서 르네상스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일 수밖에 없겠지만, 르네상스의 디테일 하나하나로 들어간다면 그게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피부에 와닿을 얘기는 아닐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중세 유럽의 공용어인, 아니 지배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의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씌어진 작품!
마치 라틴어 성경인 불가따(Vulgata)가 신에 의해 통치되는 중세를 열었듯이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젖힌 국민문학의 비조로서의 평가되는 단테의 신곡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 이상 또는 그 이하의 의미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1. 신곡에서 발견한 "익명의 그리스도인"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라면 그다지 관심을 둘만한 내용은 아니라고 본다.
더더군다나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라 하더라도 지옥과 연옥, 천국에서 만나는 군상과 사건들은 단테가 동시대의 사건과 인물들에 대해 투영한 본인의 감정을 이입한 것이니 공감을 느낄 단서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구태여 성당의 신부님이나 수녀님께서 이 책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면 카톨릭 교리 체계에 충실한 지옥, 연옥, 천국의 모습이 구스타프 도레의 삽화와 적절히 어우러져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교재 정도로 활용이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따라서 책에서 그다지 특별히 언급할만한 내용은 없지만 하나 짚고 넘어갈만한 내용이 있다면 천국편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이들의 구원에 대한 내용이다.
"어찌하여 이들이 천국에 올 수 있었단 말인가?"
단테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그 영혼들이 다시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트라야누스 황제나 리페우스 모두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사람인 것이 사실이나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 그리스도 오심을 고대하듯
의로움을 드러낸 사람들은 이교도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천국은 인간의 열렬한 사랑과 소망에 양보하는 수가 있지만,
그것은 신의 의지가 그분의 덕성에 양보한 경우를 뜻하는 것이랍니다."(P280)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칼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중 믿을 교리로 선포된 이 교리는 그간의 배타주의 그리스도교의 근간을 바꾼 혁명이라 할 수 있는 교리이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로마 카톨릭이든 개신교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사건으로부터 유래한 원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 원죄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죽음으로 보속되었기에 원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고백이 있어야만 용서될 수 있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원죄가 남아있게 되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기존 그리스도 교리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는 그리스도교가 물리적으로 전파될 수 없었던 시대와 공간을 살다간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모순을 제기한다.
지금도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선전문구가 의미하듯이 설령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교 교리를 듣지 못했던 시대나 공간에 살아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리스도교를 믿을 수 없었다 해도 그 사람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지옥편에 등장하는 '림보(형벌이 없는 유일한 지옥)'라는 공간은 이러한 자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만들어낸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칼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 밖에 있는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동일한 삶을 사는 선한 사람이라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의 지상 명령은 그 동기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즉 더 이상 구원의 조건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파하는 '선교'라는 행동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카톨릭은 그 동기가 '구원의 조건 제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알리고 공유하여 기쁨을 함께 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즉 '구원받기 위해서 믿는다'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이를 함께 나누면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칼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20세기 카톨릭이 이전의 카톨릭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획기적인 교리라고 생각하며 이것이 내가 '천주교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는 중요한 원인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천국편에 나오는 이 부분이 내 머리를 한번 치며 읽혀진 것이라 생각한다.
2. 신곡과 엉뚱하게 연결된 사춘기의 감성
개인적으로 내겐 단테 신곡이라는 책이 갖고 있는 묘한 마력이 있다.
2006년 폴란드 프로젝트 출장 휴가 기간에 갖게된 이탈리아 여행 중,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내려다본 피렌체의 모습은 내게는 무척이나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피렌체의 모습이 내게 가져다준 행복은 신곡이라는 작품 때문이 아니라 신곡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체의 이미지가 피렌체와 연결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신곡의 작품 해설서에서 베아트리체는 작가 단테가 아홉살에 처음 보고 사랑에 빠진 첫사랑의 여인으로 나온다.
하지만 단테는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을 이룰 수는 없었고, 젊은 나이에 죽음으로써 영원한 청춘과 사랑의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여인 베아트리체는 중년에 돌아갈 수 없는 어둠 속을 헤메는 단테를 빛의 길로 안내하는 천국의 여인으로 나타난다.
이 이야기의 느낌은 마치 우리나라 소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사춘기 소년들이 느끼는 로망과 같은 느낌을 공유한다.
나 역시 사춘기 시절, 그런 애련한 몽상에 빠졌고, 그 때, 사진으로 시청탑과 두오모의 둥그런 지붕이 보이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바라본 피렌체의 모습이 사춘기의 감성과 결합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2006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느꼈던 행복은 바로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바라본 피렌체의 모습이 내 가슴속에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사춘기 소년의 감성을 불러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이 책을 "읽히지 않고 칭찬을 받고 있으므로, 이 칭찬은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동일 문화적 유산을 공유하는 유럽의 철학자가 이런말을 했을 정도이니 하물며 대한민국에서는 아마 문교부 권장 도서 이상의 의미는 없을거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로서는 사춘기의 감성이 녹아있어 나름 유익한 시간을 가져다 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