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 - 힐링

2012. 12. 25. 20:144. 끄저기/끄저기

관람일시 : 2012년 12월 23일 18시 

관람장소 : 김포공항 롯데 시네마


위대한 원작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일거다. 


세대를 가로지르며  파생되는 제 2 의 작품들.

그리고 그렇게 파생된 작품이 또 저마다의 색깔로 만들어내는 감동의 도가니란...


사실  이 영화가 빅토르 위고의 그 유명한 소설 '레 미제라블'을 원작으로 한다는 것 외에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 영화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전무했다. 


작년, 올해 계속 나는 스크린과는 그닥 친하지 않은 성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영화가 개봉된 12월 18일 전후로는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국면으로 인해, 

그리고 대통령 선거 이후로는 아직까지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멘붕 상태로 인해서

메스컴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스크린 소식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뮤지컬 영화라는 사실 또한 극장에 앉아서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계속 스피치가 나오지 않고 노래가 나오는 상황이 10분 정도 지속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안주인께 "이거 뮤지컬 영화였어?"하고 질문을 했을 정도이니...

(나는 정말 포스터에 있는 러셀 크로우를 보면서 이 영화가 뮤지컬 영화일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


1. 리얼리즘에 대한 또 다른 생각. 

    주연 배우들의 명성은 둘째치고, 왠만한 블록 버스터 못지 않은 영화의 엄청난 스케일에 압도 당하면서 

    영화를 마치고 나서 나는 "왜 영화를 뮤지컬 영화로 만들었을까?" 라는 의문을 달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로 표현된 대사 하나하나를 배우의 감정이 그대로 이입된 대사로 표현했다면 

    더 훌륭한 영화가 되고, 더 감동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물고 들어가다보니 뭔가 모순에 맞닥드리는 지점이 있었다. 

    

    리얼리즘이란 일종의 현장감, 현실감에 대한 자격지심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를 포함하여 무대에서 시연되는 모든 작품은 현실을 모사한다. 

    역설적이게도 현실을 모사하는 모든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리고 리얼리즘이 모든 공연예술의 목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리얼리즘에 집착하느니 다른 요소의 강점을 충분히 살려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영화를 제작한 팀과 배우를 그대로 해서 같은 영화를 뮤지컬이 아닌 그냥 일반 영화로 만들면 어떻까?

    그리고 그 두 개를 비교해보면 어떨까?

    과연 스피치 영화가 뮤지컬 영화보다 더 리얼하고, 그래서 더 감동적일까?

    결국 여기서 확답을 못하겠더라...

    

    비록 러셀 크로우의 노래는 시종일관 불편했지만, 

    그것보다 백배 천배의 어색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앤 헤서웨이가 부른 'I dreamed a dream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아름답고 충분히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2. 개개인의 어깨에 가볍게 들어올려진 거대한 스토리

    명작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 

    우선 스토리가 거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희안하게도 그 거대한 스토리 내에서 개개인의 스토리가 선명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야기는 사람에게서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저마다의 사건을 겪는다. 

    하지만 그 사건은 하나의 극에 존재하는 다른 사람 및 사건들과 유기적으로 얽혀 나간다. 

    



    무엇보다도 그 조합이 그리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음에도 결국 그 조합이 한 시대의 상황과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

    거대한 한 편의 서사시를 봤다고 느껴짐에도  주인공은 물론 조연의 성격 하나하나까지 생생이 기억이 날 정도로

    개인에서부터 패러다임이 수립되는 그 지점까지 뻗어나가는 구조가 치밀하다는 것!


    내가 느끼는 전율의 근거는 바로 이러한 구조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도 그러한 구조를 뼈저리게 느끼고 그래서 뼈져린 전율 역시 함께 느꼈다.

    솔직히 말하자. 노래이기 때문에 그 전율이 더더욱 강했다.  

        

    

3. 48%에게 바치는 힐링    

    영화의 크랭크 인을 언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정말 2012년 12월 19일 이후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48%를 위한 힐링 영화임에 틀림없다.


    나의 시선은 항상 고정되어 있고, 그래서 한 곳 만을 바라보게 되고

    거기에 스스로 사명감까지 부여한 목표의식을 더하게 되면

    머리마저 주위를 돌아보기 거부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 객관성을 잃고 편협함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마음에 위안을 받은 것이 있다면, 

    내가 그토록 갈망하는 대한민국의 방향이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닳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삼'이라는 부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새삼'을 붙여 하나 더 얘기해보자.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가 너무나도 일천하다는 것을 '새삼' 깨닳았다. 

    

    한마디로 첫 술에 배부르기를 바란 격이다. 

    

    1992년 3당 합당에도 불구하고 신한국당(새누리당의 전신)이 총선을 싹쓸이하는 것을 보고 좌절한 스무살 청년이 있었고

    2012년 말이 필요없는 멘붕에 빠진 사십살 중년 아저씨가 있다. 

    

    나는 2032년 예순의 할아버지가 똑같은 상심에 빠져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솔직히 인정하자. 

    내가 바라는 대한민국은 살아생전 내 눈으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극심한 반공교육에 박정희, 전두환에 대한 충성교육으로 유년과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결국 나는 각성했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간절히 바라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자라나는 세대들 역시 각성할 것이다. 


    그들은 한반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풍요 하에 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더더욱 많은 숫자가 더더욱 명료하게 각성하리라. 


    그 가운데 풍요함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내 것을 나누어 주는 삶을 유지하자.

    그것만이라도 충실히 수행한다면 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내 할 일을 충분히 수행한 사람 중 한명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