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 궁 - 는적거리는 삶의 위대함

 

매해마다 세계문학상 수상작품을 들춰보는 이유는 세계문학상 수상작들이 하나같이 경쾌한 톤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이상문학상 못지 않은 묵직한 삶의 냄새를 풍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1년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유령'을 시작으로, 작년 수상작인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이어져 오는 글들은 원래 내가 세계문학상을 찾아보던 이유를 상당히 상실하고 있다.

작품의 톤들이 하나같이 음울해지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13년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에메랄드 궁'은 이러한 경향에 정점을 찍는 작품인 것 같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더 이상 이러한 느낌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토리가 묵직해지면 그 느낌때문에 작품이 표방하는 삶의 모사는 가볍게 느껴지는 단점이 있었고, 작년과 재작년 수상작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에메랄드 궁'은 묵직한 스토리에 못지 않은 묵직한 삶들이 모사되고 있고
이상하게도 그 묵직함들이 하나같이 생기발랄하기가 이를데가 없다.

 

 

아....너무 멋지다! 이런 불협화음 말이다.

 

 

1. 한 방있는 캐릭터들의 향연.
    우선 이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면서 이 작품이 채택한 소재가 너무나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텔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느낌이라는게 작품의 소재로서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곳은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장소이면서도 눈부실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장소이다.

    그곳을 드나드는 군상은 너무나도 머나먼 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일것 같기도 하면서도, 

    바로 지금의 내가 들어서기를 주저하지 않을 욕망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양가 감정은 이쪽 우주에서 저쪽 우주까지 멀리 떨어져 있는것 같기도 하지만 하나로 딱 붙어 있는, 태초부터 원래 하나였던 원자핵 같기도 하다.
   
    그러니 이런 희안한 느낌의 괴리를 이어붙이려면 왠만한 강력 접착제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적찹제로 등장하는 하나하나의 캐릭터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끈끈하고 질척거리기가 이를데 없고
    그 캐릭터가 끈끈하면 끈끈할수록, 질척거리면 질척거릴수록 상황에 제대로 맞아 들어가는 오묘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이렇게 끈끈하고 질척거리는 캐릭터들을 톱니바퀴 돌아가듯 맞아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보통 내공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정말 경이로운 것은 소재도 소재고, 사건도 사건이거니와 온통 질척이는 흙탕물 같은 캐릭터들이 하나하나 가지고 있는 생동감이다.
   
    그 생동감들이 희안하게 서로 부딪히며 파열음을 내고 있는데 그 파열음이 그렇게 아름다운 화음일 수가 없다.
   
    한편 여기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저마다 한 방을 가지고 있다.
   
    으례 구질구질한 스토리에서 등장하는 피해자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고 하나하나가 킬샷을 제대로 날릴 줄 아는 가해자들인 것이다.
   
    특히 만명슈퍼의 안주인 명옥이 에메랄드 모텔의 317호에서 자살한 장면은 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였다.
    그저 사라져버릴일만 남은 줄 알았던 패배자 명옥이 어쩌면 이렇게 확실한 킬샷을 날릴 수 있는가 말이다.
   
    상만도, 선정이도, 심지어는 에메랄드 모텔의 주인인 연희마저도
    에메랄드 모텔이라는, 자신들을 이어주고 있는 유일한 매개체에 할 수 있는 모든 저주를 퍼붓고 있다. 

    저주하고, 다시 정리하고, 다시 저주하며 망쳐놓고 다시 정리하고...

    그것은 삶에 대한 좌절을 상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태어났으니 살아가야 하는 삶의 질곡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결국 그 공간에 매여 있는 모든 이들은 피해자이고 패배자일 수밖에 없음에도 

    이들은 너무나 간절하게, 아니 그저 본능적으로 자신이 패배자임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에게 의도치 않은 생채기 내기를 서슴지 않는다.
   
    물론 핵펀치는 휘황찬란한 에메랄드 모텔의 불빛으로 감싸버리려했던 연희의 상처를 리와인드 - 리플레이 시키는 순진무구의 캐릭터(였던) 혜미다.
   
    끈적끈적하고, 질척질척 거리는 캐릭터들을 창조해내신 작가에게 찬사를!
    그리고 그 캐릭터들을 엮어내 말로 표현못할 농밀한 밀도를 만들어내신 작가에게 경의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2. 는적거리는 삶의 위대함.

   '청계천 8가'라는 내가 좋아하는 민중가요가 있다.
  
   가사 중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이 부분을 들을 때마다 귀밑이 서늘해지는 전율을 느끼곤 한다.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이 책 에메랄드 궁을 보면서 보다 진하게, 길게 느낄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 위대함의 의미는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위대함이다.
   사전적 의미가 주인공으로서, 주체로서, 영웅으로서, 위인으로서의 위대함을 말한다면
   산다는 것이 위대하다 말할 때 그 위대함은 견뎌내는 자들의 위대함을 의미한다.  
   
   한 번 살아보겠노라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명을 얻은 것이다.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상황에,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무대위에 올라왔는데
   더더욱 기가 막힌 건 언제인지 모를 그 때까지 상황이라는 무대에서 뭔가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모두는 그게 멋진 것이든, 가증스러운 것이든 간에 뭔가 하면서 지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음에도 주어진 상황에서 꾸역꾸역 살아간다는 것은 말이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지금 이 무대에서 꾸역꾸역 살아간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실수와 상처를 주고받고, 그렇게 생겨난 생채기에 또 익숙해져서 산다.

   그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삶의 본질은 냉혹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러한 냉혹한 삶에 지치다가 약간의 안도가 느껴지는 그 때,
   연희가 혜미의 아이를 받아 안듯이 덥석 '처음부터 다시~'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젠장!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 말이다!
  
  
정말 오랜만에 소설다운 소설, 작품다운 작품을 읽은 것 같다.

 

서평을 쓰기 전에 내가 앞서 세계문학상 수상작품들에 대해 어떻게 서평을 썼는지 한 번 읽어보았다.
난 왜 이렇게 심사위원들한테 불만이 많았던 것일까 싶다.

 

그래서 정말 이번엔 세계문학상 심사위원들께 감사하고 싶다.
엄한 심사평을 안 달아주셔서 말이다.

뭘 써논들, 다 개차반 같았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