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8. 20:36ㆍ4. 끄저기/끄저기
우주론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아니 좀더 사실에 맞게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우주에서 아무런 변수도 되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심지어 인간은 종속변수조차 되지 못하는 존재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이 '우주'라는 것에 대해 탐구를 해온 역사는 곧 '인간'이 주변부로 철저히 내몰리는 역사 그 자체였다.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새로운 도구가 개발되고 방법론이 개선될수록 인간이 중심에서 내몰리는 역사는 계속될 것이고
그 속도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오히려 가속이 붙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주눅들 필요는 전혀 없을 것 같다.
인간이 주변으로 밀려난다는 것은 그만큼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과학적 발견이 풍성해 진다는 의미일 테고,
결국 그러한 발달과 발견을 주도하고 있는 주체는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 한 자락은 남을 수밖에 없다.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에서 철저한 주변자로 계속 남아 있기만 할 것인가?
언젠가는 우주를 마음껏 누비는 인간으로, 그래서 우주의 중심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하나의 변수로 우뚝 설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한 날이 올 수 있을지 여부를 쉽게 판단해 볼 수는 없겠지만,
누적의 힘을 믿는 나로서는 인간이 자멸의 길을 피할 수만 있다면 당당히 우주의 한 문명으로 성장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때가 좀더 빨리 앞당겨지기 위해서는 과학의 발달도 발달이지만, 기술 못지 않는 인문학적, 정서적 준비도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기술은 가치판단에 따라 자원을 할당받기 때문이다.
이 책 '우주 속으로 걷다.'는 이런 측면에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 책이다.
1. 우주 감상문?
언뜻 책의 제목과 분위기는 또 하나의 우주론 설명서처럼 보이지만,
이 책은 전혀 우주론과는 상관없는, 우주를 관조하고 사색하는 감상문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아주 단적인 예를 하나 인용해 보자면 아래와 같다.
“이 단순한 원자핵은 기본 입자 사이에서 발생한 최초의 복잡한 공동체였다. 흥미롭게도 모든 관계는 비용을 지불한다. 원자 단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중성자가 양성자에 그저 들러붙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성자와 양성자는 결합을 위해 변화를 겪어야 한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자신의 질량 일부를 포기한다. 이것은 빛이 되어 우주로 내보내진다.
누가 이것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양자 세계의 창조를 위해서는 입자들의 본질적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가 추측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 창조에 빛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누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p24)
적어도 나는 ‘중성자’, ‘양성자’와 같은 단어가 ‘포기’, ‘희생’ 과 같은 단어와 어우러진 문장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책을 펼치고 한 장 한 장 넘겨가다보면 엉뚱하게 펼쳐지는 정서과잉에 당황을 하게 된다.
그 당황의 와중에 책읽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군데군데 기대치 못했던 멋진 표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한 번 읽고 나서야 이 책이 의도하는 바를 나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과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우주의 역사를 그리며 그 역사의 의미를 한 번 생각하기를 권유하고 있는 책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의도를 생각하고 난 후 책을 한 번 더 읽어보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우주를 사색하면서 말이다.
이 책은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우주에 대한 사색을 한 번 끄집어내 볼 수 있는 그런 독특한 책이다.
2. 우주를 사색하며 느껴야 할 가치란?
사실 우주라는 자연에 가치를 표시하는 단어들을 대입시키고 그 가치의 의미를 사색하는 것은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러한 일을 해 본적이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일을 너무나도 일상다반사로 저지르는 사람들은 골수 기독교 신자와 같은 사회악에 속할만한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이러한 시도를 한 번 해 보는 것이 나름 가치가 없지는 않을 것 같다.
의외성만 제외하고 이 책에 쓰여있는 우주 감상문은 나름 훌륭하고 아름다운 구석이 상당히 존재한다.
“우주와 지구의 진화를 조명해 보면 물질의 창조적인 자기조직화 역동성을 보다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데카르트도 뉴턴도 몰랐던, 물질에 관한 진정한 진실은, 용융되었던 암석이 40여억 년에 걸쳐 스스로 호랑나비와 왜가리
그리고 모차르트의 음악으로 변신하였다는 것이다.
이 엄청난 과정을 무시하면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의 역할이 단지 비활성 물질을 재설계하는 일이라는 환상에 빠진다.(p147)”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아직 인간은 우주의 종속 변수조차 되지 않는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미미한 존재일지언정 현재 과학 기술은 우주의 역사를 측량할 수 있는 수준 – 정확히 측량하는 수준과 혼동하지 말 것. – 에 도달해 있다.
45억년에 달하는 지구의 역사는 생명체를 만들거나, 인간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행된 것은 결코 아니긴 하지만,
결국 사색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만들어졌고, 그 인간이 우주를 탐구하는데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렇게 탄생한 인간은 어떻게 우주와 상호교감을 해야 할까?
우주는 아름답긴 하나, 개체에 제공하는 환경은 냉혹하기만 하며,
창조는 항상 대대적인 파괴와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당위론에 둘러싸인 윤리나 종교 체계로만으로 우주와 교감할 수는 없다.
저자는 이 시점에서 인류가 좀더 당당해지고, 용감해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 책을 마치고 있다.
“우리는 광역적 파괴의 한 중간에 서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심오한 창조의 순간이다.
우리는 지구의 생애에서 새로운 시대가 건설되는 순간에 속해 있다.
인간의 역할은 137억 년에 걸친 창조적 사건의 역동성과 공명하여 자의식을 심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패턴에 적합한 방법으로 살기 좋은 도시를 구축하고 건강한 작물을 재배해야 한다.
우리의 역할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새로운 질서를 향해 우주의 에너지가 발현되도록 성심성의를 다하는 일이다.
우리의 운명은 다른 생명체와 인류가 공영할 수 있도록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지역적으로 생기가 넘치는, 여러 형태의 지구 문명을 출현시키는 것이다.”
(P 160)
많은 분량이 되지 않는 책이지만, 이 책에는 수많은 지식들이 녹아 있음이 분명했고,
그 지식들에 대입시킨 감상은 그다지 노골적이지도, 과하지도 않았으며 나름 정제되어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을 느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과연 ‘인간’이라는 종은 저자가 마지막에 강조하는 인간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을만큼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마치 옛날 네안데르탈인들이 호모 사피엔스와의 얼마안되는 중첩기를 두고 전멸했듯이 지금의 인간 역시 새로운 종에 자리를 내주어야 할 지도 모르고,
만약 그런 상황이 된다면 그 새로운 종은 우주의 역사를, 많은 인간들이 오도하듯이, 자신들을 만들어내긴 위한 역사였다고 오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인간이라는 종은, 그리고 그 수많은 인간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나라는 개인은
우주와 어떤 측면에 있어서 상호교감을 하는 것이 의미있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며 몇몇 아름다운 문구를 메모해놨다.
그 메모들과 함께 우주에 대한 사색은 아름답고 폼나기는 하지만 공허하기만 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며 독서를 마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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