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끄저기/4.3의 사람들 8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6. 거절의 이유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피어오르는 봉화를 신호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촉발됐다. 이날 하루동안 제주도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가 무장대의 습격을 받았다. 네 명의 경찰이 사망하고, 두 명이 행방불명 되었으며, 민간인도 여덟 명이나 피살되었다. 무장대에서는 두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때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때까지 6년 6개월동안 제주도는 오늘날 우리가 '4.3사건'이라 부르는 유혈사태를 겪게 된다.사진 1. 다랑쉬 굴 앞에 놓인 비석과 검정고무신4.3사건에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오직 하나, 나라야 어찌 됐든 순박하게 일상을 살아갔을 양민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했다는 사실이다. 그 선량한 사람들을 죽여댄 무장대는 이..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5. 악마화

1.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 2024년 12월 3일. 모슬포에서 문상길의 흔적을 찾아 헤매다 돌아온 나는 피곤에 지쳐 일찍 잠들었다. 그 밤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해제되었다는 것을 나는 아침에 눈을 뜨고서야 알 수 있었고 급히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그로부터 122일이 지난 2025년 4월 4일. 내란수괴가 탄핵되면서 사건은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헌법 재판소에서 선고문이 낭독될 때, 내 귀에 꽂힌 문구가 있었다.  한편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으므로  이 문구를 들으며 문상길 중위가 생각났다.  문상길 중위가 이 시대의 청년이었다면, 국회로 병력을 이끌고 간 부대의 중대장이었더라면,국회 한쪽 구석에 부대원들..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4.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문상길이 아직 대구에 있었을 때, 그는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영창 혹은 감옥에 구금되었던 것 같다. 구금된 그를 꺼내 준 분이 있다.  집성촌 어르신의 증언에 따르면 그 사고가 제주에 부임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그 사건이라는 게 무엇이었을까?난 이런 일에 마음이 끌린다. 역사의 거대한 사건이 아닌, 어쩌면 인간 문상길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될지 모를 그 사건 말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기억하는 이는 이제 이 세상에 없는 것 같다.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구금된 문상길을 꺼내 주셨다는 그 분을 뵙고 왔다.이렇게 대전 현충원 장군묘역에 잠들어 계신다.  문상길의 흔적을 쫓으면서 대한민국 창군 주역이라는 여러 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게중에는..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3. 증언과 족보 비교

중평리에 나가 문중 어르신과 함께 할 저녁식사 거리로 안동찜닭을 포장해왔다.찜닭이 참 맛있었다. 포장을 기다리는 동안 아주머니는 계속 걸려 오는 주문 전화에 대응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포장을 하고 나올 때 아주머니께서 서울에서 온 거냐고 물어보셨다.그렇다고 하니 당신도 서울에서 오셨다며 반가와 하셨다. 내가 서울에서 온 건 말투를 듣고 아셨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안동은 그동안 말로만 듣던 경북 사투리가 살아 있었다.  찜닭 덕분에 푸짐해진 저녁식사를 문중 어르신과 함께 하고 족보를 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사진 1 문상길 중위를 재발견하게 해준 남평문씨대동보 제6권.족보만큼 이 세상에 쓸모없는게 있으랴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건 가문이 아..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2. 뒤엉킨 기록과 기억

사진 1오늘 문상길 중위 관련 인터뷰를 할 어르신을 만나뵈었다.어르신은 한창 과수원에 묘목을 심고 계셨다. 문상길 중위와는 같은 항렬에 16촌이라 하시니 8대조가 같은 분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 16촌이라면 남과 다름 없다. 하지만 씨족 사회 전통이 강한 이곳 안동에서 16촌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어르신은 젊으셨을 때 문중 유사를 맡으신 적이 있었다고 하신다. 그래서인지 문중의 일을 비교적 폭넓게 아시는 것 같았다. 어르신은 1950년 생이시다. 문상길 중위께서 돌아가신 후 태어나셨으니 문상길 중위를 경험으로 기억하실 수는 없는 분이다. 하지만 집안 어르신을 통해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비롯해서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안동에 와서 안상학 시인을 만나려 한..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1. 어린 시절 뛰놀았을 마을길

사진 1 문상길 중위 생가 터.안동시 임동면 마령리 대곡천 건너 수몰지구에 위치한다. 다행히 갈수기여서 한때 남평문씨 집성촌이었던 생가 터에 갈 수 있었다. 비석은 민속자료 제69호 기와까치구멍집 터임을 알리는 비석이다.  그가 떠나고 7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를 경험으로 기억했을 사람들도 거의 다 세상을 뜨셨다.그나마 건너들은 이야기조차도 희미하게 기억하는 극소수의 어르신이 남았다.  그 중의 한 분을 뵈러 안동을 향했다.  궁금한 게 있었다. 청년 문상길이 나고 자라 운명의 땅 제주도를 향하기 전, 그가 겪었던 어떤 사건이 궁금했다.  1926년(병인년) 9월 8일.문상길이 태어난 날이다. 족보에 새겨진 날이니 아마 음력일 것이다. 양력으로 변환하면 1926년 10월 14일 목요일이다.  문상길이 ..

'사람'을 찾아가는 거친 여정

이산하 작가의 장편서사시  시를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제주 4.3 사건동안 억울하게 죽어야만 했던 수많은 제주 사람들이 정말 공산주의 혁명을 찬동하여 항쟁을 한 것처럼 오해할만한 표현이 곳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시각이 순진무구한 제주 인민을 빨갱이로 몰아 죽인 잔악한 군경세력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이산하 작가의 후기를 읽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었다.  이 시가 쓰인 1986년 대한민국에는 4.3사건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라곤 정부 입맛에 맞는 자료 외에는 전무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산하 작가가 밝히고 있듯 당시 4.3 사건에 대해 그나마 접할 수 있었던 자료로서 정부와는 다른 시각을 가진 자료는 가 전부였다.하지만 이 책은 일본에서 조총련으로 활동하는 인..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진혼제

2024년 9월 23일.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진혼제가 열린 고양시 용두동에 다녀왔다.  문상길 중위는 1948년 9월 23일 3시 25분, 손선호 하사는 잠시 뒤인 3시 45분 총살되었다.  이들이 총살당한 이유는 바로 직속상관 박진경을 살해했기 때문이다.박진경은 제주 4.3사건 당시 협상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려 했던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된 후 후임으로 연대장에 임명된 사람이다. 그는 임명된 후 강경 진압에 나섰으며 고작 40여일 동안 무려 5천명에 달하는 제주도민을 체포했다.  박진경은 강경진압으로 공을 인정받아 대령에 진급했다.그리고 진급 축하연을 벌인 그날(48년 6월 18일) 숙소에 돌아와 잠든 후 손선호 하사가 쏜 두 발의 총에 살해됐다.  혹자는 박진경 살해를 주동한 문상길 중위와 손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