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끄저기/4.3의 사람들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8. 암살과 재판

다락방별지기 2025. 4. 18. 18:15

1948년 6월 18일 새벽 3시 30분 경.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와 잠자리에 든 박진경 연대장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문상길 중위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사건으로서, 오늘날 문상길 중위를 찾는 사람들은 모두 이 사건을 통해 문상길 중위를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극소수 의견이긴 하지만 문상길 중위가 범인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문상길 중위와 사관학교 동기로서 4.3당시 9연대 정보참모였던 이윤락 대위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어느날 내가 있던 감방으로

문상길 중위가 묶여 들어왔다. 
어떻게 된 것이냐 물었더니 

박진경이가 심하게 토벌작전을 전개해서 

사람들을 죽여대니 부하들이 암살했다. 
암살한 자는 알 바가 없는데 내가 주모자가 됐다. 
어쨌든 박대령의 죽음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내가 죽는 것이 떳떳하다.
- <4.3은 말한다> 3권, 206p - 

책에는 이 대화가 오간 날짜가 나와있지 않지만 1948년 7월 12일 즈음으로 추정된다. 
이날 문상길 중위가 서울로 압송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윤락 대위는 전임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사령관 김달삼의 4.28회담과 관련, 정보 오판의 책임을 쓰고 군기사령부 영창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윤락 대위의 증언은 문상길 중위가 박진경 연대장을 직접 살해하지 않았음은 물론 암살 사주에도 가담하지 않은 정황을 말해준다. 

또다른 기록도 있다. 
1948년 8월 14일자 국제신문 보도로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사진 1 국제신문 1948년 8월 14일자, 박진경 살해범 재판 기사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공범인 신상우의 사실 심리에 들어갔는데 신상우는 모두가 2등상사 양회천(도망으로 기소외인)의 사족과 실지 행동이라는 진술을 하여 군법회의장 내는 일시 소란하였다."


당시 문상길 중위의 재판을 보도한 신문사는 여러 곳이 있지만, 범행의 계획 및 실행을 문상길 중위가 아닌 다른 이가 도모했다는 기사는 오직 국제신문 기사에만 등장한다. 

 

하지만 이 기사는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실제 사건에서 자취를 감춘 이는 양회천 이등상사가 아닌, 이정우 하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상길 중위가 이 사건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일부 존재하긴 하지만 이는 극소수 의견일 뿐이다. 

사실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알 길이 없다.
사실이 정확히 밝혀지려면 당시 공판 기록을 봐야 하는데, 아직 그 공판 기록을 찾았다거나 봤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 경우 국방부에 문상길 중위 재판 기록 정보공개를 요청했지만 국방부에서 온 답변은 '부존재'였다.


사진 2 문상길 중위 판결문 공개 요청에 대한 육군 검찰단의 회신
판결문은 존재하지 않으며, 부존재 사유에는 '공공기관이 청구된 정보를 생산, 접수하지 않은 경우'로 적시되어 있다. 

정말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 걸까?
개인적으로 정보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숨겨야 할 이유가 없는 정보이기 때문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판결일이 1948년 8월 14일이라는 것이다.  
8월 14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 하루 전이다. 
법적으로 이 정보를 대한민국이 보존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혹시 미국에 있는걸까? 이 가능성은 아직 생각 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관련 기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박진경 암살사건은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명령과 복종이 생명과도 같은 군대에서 일어난 상관 살해사건이라는 측면에서 파장이 크기도 했지만, 사건의 동기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민족주의 진영에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문상길 중위 재판기록을 담은 기사가 비교적 많다. 
비록 보도문이 대동소이하여 보도자료를 기반으로 일괄적으로 써내려간 기사라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이따금 주목할만한 증언도 있다.

이제 그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사건의 전말

 

1948년 6월 17일 저녁, 제주읍에서 가장 규모가 큰 요정인 옥성정에서 박진경 연대장의 대령 진급 축하연이 열렸다. 

박진경 연대장은 6월 1일부로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당일 딘 군정장관이 직접 제주에 내려와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박진경 연대장에 대한 미군정의 신임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는 이 진급이 4개 전투대대를 지휘하는 여단장급 격상에 따른 진급이었다고 설명한다. 
실제 제주주둔 9연대는 4.3무장 봉기 이후 병력 충원이 계속 이루어졌다. 
4월 20일에는 부산 주둔 5연대에서 1개 대대가 충원되었으며, 대구에서도 6연대 1개 대대가 충원되었다. 
5월 4일 수원에서 창설된 11연대도 5월 15일부로 제주로 이전하였다. 
11연대는 기존 병력에 9연대를 흡수하고 5연대와 6연대에서 차출된 2개 대대를 흡수하여 명실상부한 연대급 규모를 갖추게 되었고 박진경 연대장은 11연대의 초대 연대장이 되었다. 

막강한 무력을 갖춘 연대의 최고 책임자이자 미군정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박진경 연대장의 진급 축하연은 그야말로 성황을 이루었다. 
축하연 준비에는 연대본부 취사병 뿐 아니라 읍내 전문 요리사들까지 동원되었고, 통위부 파견 장교와 11연대 참모는 물론 미군장교와 고위 공무원들이 모두 참여할 정도였다. 

박진경 연대장은 축하연을 마치고 제주농업고등학교 내에 있는 연대본부 집무실로 귀대하여 잠들었다.

그리고 새벽 3시 30분 경, 연대본부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M1소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박진경의 우측 어깨에서 좌측 옆구리로 관통하였고 박진경은 그대로 절명했다.  

사건 직후, 연대본부가 발칵 뒤집혔다. 
4~50명에 달하는 연대병력 전체가 연병장에 비상 소집되었으며, 한 시간 후 도착한 헌병대는 한 명 한 명의 총기와 탄약을 검사했다. 

당일 정오, 딘 군정장관이 총포 연구자 2명과 수색견을 대동하고 내도했다. 
이들은 M1소총에서 발사된 탄환이 강선에 의해 고유 무늬가 새겨지는 것을 단서로 모든 M1을 조사했다. 
당시 M1 소총은 부산 5연대에서 들어온 2대대, 대구 6연대에서 들어온 3대대에 지급된 상태였다.
5월 20일 집단 탈영 사건이 발생한 9연대에는 M1소총이 지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범인을 잡아내지 못해 나중에는 9연대 장병들이 소지한 99식 총도 모두 검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사건 발생 후 3일 뒤인 6월 21일, 최경록 중령이 신임 11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최경록 중령은 딘 군정장관으로부터 '박대령의 암살범을 조속히 체포하라'는 특별 당부를 받은 상태였다. 

이로부터 얼마 후 연대 본부에 투서가 날아들었다.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를 잡아보면 암살사건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연대 인사참모 최갑중 소령이 1개 소대 병력을 이끌고 문상길의 애인인 고양숙 집에 병으로 누워 있는 문상길 중위를 체포하였다. 
문상길 중위가 체포된 것은 6월 25일 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연대 정보과장이었던 김종평 중령은 문상길 중위의 체포 현장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처음엔 범인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동행토록 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문상길은 진짜 아팠는지 어땠는지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그땐 초여름이어서 날씨가 무더웠는데 

그의 가슴에 '아까징끼' 같은 게 붉게 묻어 있더군요. 

부적이 땀에 젖어 색깔이 묻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의심하게 된 것이지요. 

부적을 했다는 그 자체가 수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통위부에 사건보고도 할 겸 상경했는데 

통위부에서는 문상길을 제주도에 그대로 두면 위험하니 

바로 서울로 데리고 와서 

정밀취조를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주도로 다시 내려갔습니다. 

미군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정보국 고문관 존 리드 대위와 함께 

문상길을 서울로 압송해 왔지요. 

- <4.3은 말한다> 3권, 205p -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이 서울로 압송된 날은 7월 12일이다. 
이들에 대한 취조는 대략 열흘 후인 7월 23일 일단락되었다. 

 

재판

1948년 8월 9일, 이응준 대령을 주심으로 하고 이지형 중령이 검찰관을 담당한 재판이 통위부 고등군법회의실(지금의 남산도서관 자리)에서 열렸다. 

관선변호인으로 김흥수 소령이, 민선변호인으로 김양이 있었다. 

 

당시 재판은 군인과 관계인에게만 방청이 허락되었다. 

재판 내용이 여러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지만, 대체로 내용이 비슷비슷한 이유이다. 

아마도 보도자료나, 특정인의 인터뷰 등 취재 소스가 한정되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당시 여러 신문을 통해 보도된 재판 내용을 날짜별로 분류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8월 9일 오전 9시에 개정된 1일차 심리에서는 검사측의 기소이유와 범죄사실 증인심문이 있었다. 

신문지상에 보도된 기소문은 다음과 같다. 


사진 3 문상길 중위 공소내용이 담긴 1948년 8월 10일자 현대일보 기사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대령 암살범 군재

제주도 폭동진압 총지휘관 고 박대령 살해범 조선경비대 제11연대 근무 문상길 중위 외 5명에 대한 공판은 예정대로 9일 상오 9시 정각부터 남산군기대사령부에서 고등군법회의재판장 이응준 대령 즉심하에 개정되었는데 먼저 공판은 검찰관 이지형 중령의 별항과 같은 피고들의 기소문의 낭독에 이어서 그당시 때마침 현장에서 살해사건을 목격한 백소령 이하 4명에 대한 증인심문이 있은 다음 공판은 상오 12시 20분 경 일단 휴정되었고 하오 1시부터 다시 속개하기로 되었다.

제11연대 중위 문상길은 동대 하사 신상우, 하사 손선호, 하사 배경용, 상사 양회천(이정우 기소외 2명) 등과 공모하여 1948년 6월 18일 오전 3시 50분 박진경 대령을 불법암살하였음.

  문상길은 1948년 4월 22일 폭도들과 연락하여 동연대원 40명을 도O도망케 하였음.

  손선호, 배경용, 양회천, 신상우는 문상길, 이정우 등과 공모하여 1948년 6월 18O 박진경 대령을 살해하였음.

  강승규 (11연대 1등중사)는 1948년 6월 17일 손선호와 공모하여 박대령 암살범행을 불법방조하였음. 

  전기 문상길은 지난 4월 20일경 동연대 근무 고승옥의 연락으로 당시 폭도대대장 김달삼과 만나 도주병 4명을 때마침 주번사령의 임무를 기회로 도주케 하였음. 이어서 문은 5월 중순경 제2차로 김달삼과 회담하여 김으로부터 박대령을 살해할 지령을 받고 기회를 노리던 중 전기 피고인들과 은연중 공모 드디어 6월 17일 박대령의 진급 축하연을 기회로 제주 옥성정에서 감행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취침한 후 즉 18일 상오 3시 50분 손선호는 사수, 배경용 전지담당, 신상우, 이정우, 양회천 등은 현장지휘를 각각 담당하여 박대령을 살해하였다. 


다음날인 8월 10일 오전 9시 30분, 2일차 심리가 있었다. 
이날은 이응준 재판장으로부터 사실 심리가 있었는데 변호인 측에서는 전일 검사가 낭독한 조서가 고문에 의해 작성된 허위진술이라는 반박 변론이 있었으며 이에 대한 증인 심문을 진행하였다. 

 

이날 증인 심문은 기억해야 할 내용이라 생각한다. 

문상길 중위에게 고문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증언을 거부하였다.

불법 고문이 자행됐을 것이라는 심증이 더더욱 굳어지는 대목이다. 

 

다행히 그의 수치스러운 이름이 신문 보도를 통해 역사에 남겨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진 4 1948년 8월 11일자 경향신문 기사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피고인들을 고문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이의 증언 거부 소식이 담겨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대령 암살범 군재회의

제주도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범에 대한 국법회의는 9일 오전에 이어 오후 1시 30분부터 속개되었다. 
이지형 검사로부터 사건 총지휘자 김달삼과 두 번이나 만난 문상길(23세) 중위와 저격범 손선호(23세)하사와 이를 도와준 배경용(19세)외 4명에 관한 청취서류의 낭독으로 이날의 공판을 끝마치었다. 

그리고 제2일인 10일에는 오전 9시 30분부터 이응준 대령 재판장으로부터 사실심리가 있었는데 이날 변호인 측은 전일 검사가 낭독한 조서는 고문에 의한 진술이라는 반박변론이 있은 후 증인심문으로 들어가 당시 제주도 군기대장 이풍우 중위 외 5명에 대한 증인심문이 있었으나 고문에 관한 증언을 거부하였음으로 변호인 측은 이번 재판은 법정중심이 아니라 검사중심이었다는 이의를 제출하고 오전 11시 30분 휴정하였다. 

 

이러한 신문 보도에 더해 가혹한 고문이 있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사진 3으로 소개한 기소문 자체에 있다. 

 

기소문을 보면 문상길 중위에게 덧씌워진 죄목에 '9연대 집단 탈영 사건'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날짜가 4월 20일, 4월 22일로서 전혀 맞지 않는다.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재판의 기소문이 얼마나 엉터리로 작성되었는지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날인 8월 11일, 3일차 심리가 속개되었지만 3일차에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기사가 존재하지 않아 찾을 수 없었다. 

 

이튿날인 8월 12일, 오전 9시 반부터 4일차 심리가 있었다. 

이날 심리는 전체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심리였다고 할 수 있다.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피고들이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 이유를 진술하였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진 5 1948년 8월 14일자 조선중앙일보 기사.
문상길 중위의 법정 진술이 담겨 있다. 동일한 내용이 1948년 8월 14일자 대한일보에도 실려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박대령은 도민을 무조건 탄압
문상길 중위 진술
박대령암살 제4회 공판

박대령 암살사건의 제4회 공판은 지난 12일 동 장소에서 상오 9시 반부터 개정되었는데 문상길 중위에 대한 심문이 개시되자 문중위는 소위 산측 사령관 김달삼과의 관계에 대하여 전후 2회에 걸쳐 만난 일은 있으나 암살지령에 대하여는 이를 단연 부인하였다. 
문중위는 검사심문에 정연한 태도로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4월 3일 제주도 소요가 봉기 이후 전11연대장 김중령 재임시와 박대령 부임 후의 대내 공기는 전반적으로 변하였다.
경찰의 폭도와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대하여 김중령 지휘밑에 경비대는 도민을 선무하기에 노력하여 그들의 신의를 받었으나 박중령 부임 후로는 경찰과 협력하여 소요부대에 무조건 공격명령이 나렸으며 도민도 탄압하기 시작했으므로 도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고 경비대 내부 공기도 동요하였다.

나는 김중령의 동족상잔을 피하는 해결방침에 찬동하였으며 처음으로 김달삼을 만난 이유는 김중령과 회견시키기 위하여서였고 두 번째는 박대령 부임 후였는데 그때 김달삼은 삼십만 도민을 위하여 박대령을 살해했으면 좋겠다고 하였을 뿐 절대 지령을 받지 않었다고 주장하는 동시 심리조서에 서명 날인 한 것은 전기고문 끝에 눈을 막은 후 조서에 대한 기록 내용 여하를 모르고 강제적으로 무조건 날인한 것으로 이 법정에서 진술한 것이 진실이라고 굳게 그 조서날인에 대하여 부인하였다. 

 

박진경 대령 암살 사건 당시 직접 총을 쏜 혐의로 기소된 손선호 하사 이하 다른 피고인들의 진술은 아래와 같다.


사진 6 1948년 8월 14일자 한성일보 기사. 
손선호 하사를 비롯한 피의자들의 진술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건심문을 계속
박진경 암살 공판 제4일

기보한 조선국방경비파견 전 제주도 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범 제4일 고등군법회의는 12일 오전 회의에서 증인심문에 이어 오후 1시 반부터 다시 속개되었다.

먼저 피고 6명 중의 최고계급자인 문상길 중위의 계속사실심문이 있었고, 이어 범행현장지도의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이정우(미체포)와 범행 당시 행동을 같이했다는  신상우의 사실심문이 있었다. 
그는 '박진경 대령은 동포를 학살하고 진급했다', '미군인이 직접 위장을 달아 주었다' 등등 흥분된 어조로 진술하였으며 다음 양회천, 강승규, 배경용 등 피고의 사실 심리를 필한 다음 '카-빙' 총으로 박대령을 저격하였다는 손선호(22, 하사관)가 법정에 나서자 법정은 한층 더 긴장해졌다.

손선호는 범행에 이르게 된 동기를 말하라 함에 태연자약한 태도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삼천만을 위해서는 삼십만 제주도민을 다 희생시켜도 좋다, 민족상잔은 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실지 행동에 있어 '무고한 양민을 압박하고 학살하게 한 박대령은 확실히 반민족적이며 동포를 구하고 성스러운 우리 국방경비대를 건설하기 위하여는 박대령을 희생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양민을 학살하고 압박한 구체적 사래를 들면 많다.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있을 때에는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삐라 등으로 선무 공작을 했었으나 박대령이 내임하자 직접 공격 명령을 내리고 만약 부락민이라도 명령에 응하지 않을 때는 무조건 사살해도 좋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양민이 들로 일하려 가다 경찰에 피살된 사실, 그 시체를 가지러 간 아들의 피살, 또 '오라리'라는 부락의 참상, 경찰의 사촉으로 살인과 방화를 감행한 박근택의 무죄석방,경비대원들의 전투 중의 비행, 음식을 제공하고 안내까지한 사람의 사살, 부락민을 체포해 가지고 폭도라고 하야 포로로 하는 사실 등등이 박대령 래임 후의 사태이라고 하고 이에 분격해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도주할 의사는 없었다고 부언하였다. 

이어서 제5일 공판은 13일 오전 9시부터 개정되어 강승규의 재심문이 있었고, 다음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재임 당시의 방침 상태, 명령계통 등에 관한 증언이 있었고, 이어서 총사령부 총참모장 정일권 대령의 5월 3일 이후 '브라운' 소장 '딘' 군정장관등의 현지 지휘 사령부의 명령에 의하여 단시일 해결책으로 단연 공격작전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증언이 있었고 다음 당시 작전 부장이었다는 임부택 대위의 증언으로 오전 심문을 끝마치었다. 

 

8월 13일, 심리 5일차에는 참고인 진술이 있었다. 

참고인으로 재판에 출석한 사람은 김익렬 전임 연대장과 11연대 작전참모 임부택 대위, 총사령부 총참모장 정일권 대령이 확인되며 문상길 중위의 애인이었던 고양숙 씨도 참석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그녀가 재판에서 어떤 증언을 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임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경우 박진경 암살사건 후 미군 방첩사령부(CIC)에 의해 소환되어 서울 명동에 자리잡은 안가에서 조사를 받았다. 

김익렬 장군 유고에 따르면 '사건 발생, 이틀 후에 소환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1948년 6월 20일 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김익렬 연대장은 여수 주둔 14연대장으로 보임 중이었다.

미군 방첩사령부의 조사는 한 달이 걸렸고, 이에 따라 14연대장은 교체되었으며 조사결과 박진경 연대장 암살사건과 관련이 없음이 밝혀져 온양 13연대장으로 보임하게 된다. 

 

그런데 이날 재판에서 주목할만한 두 가지 증언이 있다. 

 

첫 번째는 정일권 대령의 증언이다. 

사진6, 기사 인용문 중 밑줄 그은 부분이 그 부분인데 정일권 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정이 이미 5월 3일부터 적극적인 공세로 방향이 기울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미군정의 방침을 통위부가 인지한 시점일 뿐, 미군정의 방침은 그 이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단적인 증거가 바로 박진경 연대장이다. 

 

대개 박진경 연대장의 부임을 1948년 5월 5일 제주읍에서 열린 수뇌부 회의 이후 갑작스럽게 결정된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박진경 연대장이 이보다 훨씬 전부터 이미 제주 9연대장으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은 경비대사관학교를 5기로 임관하고 제주로 부임한 채명신 소위의 자서전을 통해 알 수 있다.  

 

국방경비사관학교 5기생 임관한

채명신 소위를 비롯한 9명이

제주도 발령을 못마땅해 하는 내용이 등장한 이후 내용

...

볼이 잔뜩 부어 찾아간 우리에게 

통위부 인사참모인 박진경 중령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양해를 구한다.

사실 이건 인사비밀인데

내가 그곳 9연대장으로 가게 됐어.

귀관들도 알다시피 폭동이 벌어진 그 제주도 말이야.

하지만 9연대 사병들이 모두 제주도 출신들 뿐이니

어떻게 그 폭동을 진압할 수 있겠나.

그래서 고심 끝에 내가 귀관들을 뽑았지.

- 채명신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50p - 

 

국방경비사관학교 5기생의 임관이 있었던 것은 1948년 4월 6일이었다. 

채명신을 비롯한 9명의 임관 소위들이 인사발령 사항을 알고 이를 항의한 것은 이때 즈음일 것이다.

이를 통해 박진경 연대장 내정이 이미  4.3무장 봉기 시점부터임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애초에 미군정이 협상보다는 무력진압에 방점을 두었다는 것 역시 추정할 수 있다. 

 

박진경 중령은 학도병 출신으로 일본군에 복무 당시 제주도 주둔 공병부대 장교로 복무했다. 

이미 제주도를 군사지리적으로 잘 알고 있는데다가 오사카외국어대학 영어과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해 미군정으로서는 제주도를 무력 토벌하는데 박진경 만큼 적임자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제주도에 대한 박진경의 인식이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바라보는 경찰의 인식과 그대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글을 쓴 채명신은  북한 황해도 출신이다. 

채명신을 비롯한 나머지 8명 장교들의 출신지역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으로서 이러한 행위 역시 서북청년단을 제주도로 투입한 경무국의 행동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주목할 증언은 임부택 대위의 증언이다. 

비록 임부택 대위의 진술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보도하는 기사는 없으나 판결 선고 후 김양 변호사의 인터뷰를 보도를 통해 임부택 대위가 어떤 증언을 했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진 7 1948년 8월 18일자 조선일보 보도.

동기는 애족적
총살언도는 이해곤란

국방경비대 박대령 암살사건 군법회의는 14일 문상길 중위 외 3명에 대한 총살언도로 폐정하였는데 동법정에 민간 변호인으로 종사하였던 김양 변호사는 동 사건 판결언도는 이해하기 곤란하다고 다음과 같이 소감을 말하였다. 

금번 암살사건 관계자의 범행동기가 추호의 신심사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민족정기에 살고 죽으라는 국방경비대 자체의 신조에서 우러나온 애족적 신념의 소치라는 것은 피를 토하는 듯한 피고 등의 진술로 명백하다. 
왜 박대령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하는 것은 박대령의 참모관으로서 증인 출두한 임부택 장교의 진술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박대령 부임 전 평화복구를 목적으로 도민을 선무하고 그들과 다정하여진 피고들은 다음과 같은 박대령에 복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즉, 조선을 위하여서는 30만 도민을 전부 희생시켜도 좋다.
그리고 '산사람' 토벌을 주목적으로 하는 것보다 각부락을 수색하여서 부락민을 전부 검거하여라. 
이때에 피하는 자가 세 번 정지명령에 불응하면 총살하여라.   
이상과 같은 박대령의 명령에 불복하는 피고들은 민족을 위한 거사로 살해를 결행하였던 것이다. 
정지명령에 불응한다고 총살당한 부락민이 전기 임장교의 기억에 남은 것만으로도 2~3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일본군사상 히유의대 사건인 5.1사건 주모군인에게도 사형이라는 판결은 없었다. 
항차 조선민족끼리 애족 애국적 신념의 발로 결과가 이러한 사형으로 보상된다면 사람을 나무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떼어버리는 것 같다. 
한편 김양 씨는 동 사건의 감형진정서를 통위부장 및 현 군정장관에게 제출코저 작성하고 있다한다. 

 

기사에 따르면 11연대 작전참모로 재임한 임부택 장교 역시 '정지 명령에 불응한다고 총살당한 부락민이 기억에 남은 것만으로도 2~30명이 넘는다'고 증언하였다는 것이다. 

 

박진경 연대장의 가혹한 토벌작전

 

내가 이 증언을 중요하다고 보는 이유는 극우측에서 박진경 연대장의 가혹한 토벌을 한사코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4년 발행된 책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에서는 박진경 대령이 '100명의 폭도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사람을 평가할 때는 말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박진경 연대장이 9연대에 부임한 이후 제주에서 벌어졌던 작전 이력을 한 번 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이런저런 자료를 취합하여 정리한 주요 내역은 아래와 같다. 

참고로 경찰 토벌 작전은 박진경 연대장의 직접 명령관계가 불분명하므로 제외하였다.

일시 내        용 정보출처
1948년 5월 6일 박진경 연대장 부임
박진경이 국방경비대 사령부의 인사부서에서 일하다가 9연대장으로 임명된 이유는 일제시대 일본군으로 제주도에 복무한 경험이 있어서 섬의 지형과 산악요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섬으로 떠나기 앞서 딘 장군에게서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해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개인적으로 받았다.(이 대목은 존 메릴의 논문에서 인용한 것임)
4.3은 말한다 2권 
199p
1948년 5월 12일 경비대 애월면 한 마을에서 창으로 무장한 25명 체포 (애월면 광령 2리)
경비대는 (오등마을 부근에서)굴속이나 천막에 살고 있는 193명을 체포했다. 그 포로들 중 1명은 경비대에게 반란군 아지트까지 안내하는 것을 승낙했다. 나머지는 조사가 진행 중이다.
4.3은 말한다 3권
98p
미군 G2보고서 재인용
1948년 5월 14일 한림지서 피습사건 경찰 1명, 무장대 4명 사망
응원경찰대의 추격으로 무장대 여러명의 부상자를 낸 채 퇴각,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슬포 9연대 트럭도 달려와 추격에 합세.
5월 14일 경비대는 경찰을 도와 한림을 공격해온 습격자들을 격퇴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습격자 5명을 사살했다.
4.3은 말한다 3권
39p
미24군단 G2보고서
5월 14일 오후 6시부터 21일 오후 6시까지 경비대는 송당리와 교래리 사이에서 굴 수색, 게릴라를 소탕하는 작전을 폈다.
이 과정에서 게릴라 7명을 사살하고 2백명을 포로로 잡았다.
4.3은 말한다 3권
57p
1948년 5월 15일 박진경 연대장 11연대 초대 연대장 취임.
수원에서 창설된 11연대는 이날 제주로 이동하였고, 기존 9연대와 2개 차출 대대를 흡수함
제주4.3추가진상조사보고서
애월면 강창두(18) 귀가 중 토벌대에 연행되어 수산리 냇가에서 총살
(토벌대가 경비대인지, 경찰인지는 구분되어 있지 않음)
제주4.3추가진상조사보고서
1948년 5월 16일 경비대 오등리, 오라리에서 작전을 벌여 1명을 사살하고 169명을 포로로 잡음.
경비대에서는 1명의 전사자(이등병) 발생.
미24군단 G2보고서
1948년 5월 19일 송당리와 교래리 사이 울창한 숲 지역에서 작전하던 경비대 5중대는 여자 21명을 포함, 약 2백 명의 포로를 잡았다. 포로들은 심사를 위해 제주공항 활주로로 끌려왔다.
게릴라 7명이 사살되었다. 
미6사단 G2보고서
1948년 5월 20일 모슬포 주둔 대대(기존 9연대) 집단 탈영사건 발생, 모슬포 부대 무장해제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1948년 5월 21일 박진경 연대장, 모슬포 대대를 방문하여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입감된 대청단원 박근택 석방.
박근택이 풀려나자 이번에는 오라리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어쩔 수 없이 제주경찰서에 유치, 38일간 구금된 후 다시 석방된 그는 1948년 9월 15일 경찰학교에 9기생으로 입교한 뒤 경찰이 된다.
4.3은 말한다 2권
161p
1948년 5월 22일 집단 탈영병 중 20명, 모슬포에서 체포, 이들은 모두 총살된 듯. 4.3은 말한다 3권
131p
1948년 5월 23일 경비대는 제주도 중산간 지역의 작은 마을들을 고립시키면서 혐의자들을 미군과 한국인 정보팀의 심사 결과에 따라 체포, 구금시키고 있다. 
432명을 신문했으나 선별작업이 빨리 완결되지 않고 있다.
미24군단 G2보고서
1948년 5월,
날짜미상
김종평 중령(9연대 정보과장)의 진술
48년 5월 하순께로 기억됩니다. 조천면 교래리로 가는 쪽에 '바늘 오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폭도가 많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경비대원들을 이끌고 그곳에 가보았더니 맨 부녀자들만 있었는데 그 숫자가 몇 백 명은 족히 됐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들은 토벌대가, 경찰들이 와서 다 죽인다고 하니까 그곳으로 피신했다는 겁니다. 그들을 제주비행장으로 데리고 와서 천막을 치고 수용시켰습니다.
4.3은 말한다 3권
143p
1948년 5월 26일 11연대 현승단 일등병 전사
(어떤 작전이 있었던 건지는 기록이 없음)
제주4.3추가진상조사보고서
1948년 5월 27일 유동열 통위부장, 제주 포로는 3,126명이라고 발표 4.3은 말한다 2권
256p
1948년 5월 29일 '4월 3일에서 5월 25일까지의 피해상황 통계'
사망자는 160명, 경비사령부의 분류에 의하면 경찰관 및 그 가족, 양민, 관공리는 41명, 폭도는 118명이라고 함.
조선일보 1948년 5월 29일자
1948년 5월 30일
~
6월 2일(또는 4일)
전도수색 1차 작전개시(5월 30일 ~ 6월 2일, 작전기간은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음)
미군사령관 브라운 대령, "제주도 서쪽에서 동쪽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다."고 밝힘
4개 지대는 '한림면 금릉리 ~ 구좌면 종달리', '한림면 음부동 ~ 성산포', '한림면 금악 ~ 성산면 온평리', '대정 ~ 온평리' 구간임.
작전간 포로 596명
경비대는 이 기간(5월 28일 ~ 6월 4일)동안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에서 서로 관통하는 소탕작전을 계속했다.  체포자 596명 중 427명을 심사했으며 77명을 더 조사하기 위해 감금하고 있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 278~284p
4.3은 말한다 3권
102,139p
미군G2보고서
경비대는 5월 31일, 오후 8시 30분, 대정면 중산간지대의 동굴 속에 있던 인민사령부를 공격하여 포로 10, 사살 2, 99식 소총, 죽창, 대검, 전화기, 각종탄약, 화약뇌관, 중요서류 등 포획함 4.3은 말한다 3권
152p
한밤중에 관음사를 이중, 삼중으로 포위했습니다. 새벽녘에 공포를 쏘면서 경내로 진입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인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주지스님만이 총성이 울리는 와중에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합니다.  출동부대는 스님을 마차 위에 묶고 물고문까지 하면서 무장대와의 내통 여부를 취조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주 출신 9연대 병사, 강덕윤 3기 증언)
4.3은 말한다 3권
149p
 6월 초께 한 번은 조천 신촌마을 포위작전을 전개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은 다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에는 1개 중대에 경찰관 2명씩 파견나왔습니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잡아들이면 혐의자 분류작업은 그 경찰관들이 주로 했습니다. 밤중에 마을을 포위했다가 새벽에는 집집마다 수색을 했습니다. 병사 3명이 1개 조씩 편성되었습니다. 제주 출신끼리 조가 편성됐을 때에는 이심전심으로 검거작전이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 사람이라고 모두 죄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병사끼리 눈짓으로 풀어주는 경우도 왕왕 있었는데 조금 있으면 또 잡혀와요. 달리 갈 곳이 없으니 집에 있다가 잡혀올 수밖에 없었지요. 조천마을 기습작전 때는 키가 큰 장교가 진두지휘를 하는데 알고봤더니 서종철 대위였습니다.
(제주 출신 9연대 병사, 강덕윤 3기 증언)
4.3은 말한다 3권
146p
1948년 6월 1일 박진경 대령 진급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제1권 - 해방과 건군
1948년 6월 14일 ~ 6월 17일 전도수색 2차 작전
한라산을 4개 방향에서 포위하여 정상쪽으로 수색하는 개념
이 작전에서 약 3,000 명이 체포됐고 심사를 받았다. 
현재 여성 2명을 포함해 575명이 제주의 포로수용소에 있으며 4개 심문팀의 심사를 받고 있다.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 285p
경비대는 어승생악 인근에서 유격대 물자공급 지점을 발견했다. 
일제 칼 5자루, 총검 4자루, 등사기 1대, 돈 55만원 노획
4.3은 말한다 3권
103p
미군 G2보고서
어승생악 인근에서 무장대의 물자창고 기지를 발견하여 공격했는데,그 과정에서 6월 15일 11연대 이배섭 하사가 전사 제주4.3추가진상조사보고서
경비대는 제주에서 작전명령 제4호를 완료했다.
53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 중 4명은 탈주하려다 사살당했다.
이 작전에서 경비대는 약 2톤 가량의 잡용품을 노획했다. 
섬의 지휘자는 산에서의 작전은 완료한 것으로 믿고 있다.
4.3은 말한다 3권
103p
미군 G2보고서
6월 17일 박진경 대령 진급 축하연  
6월 18일 새벽 3시 30분 경 피살  

이상이 박진경 연대장 부임 이후 피살 당할 때까지의 대략의 내용이다. 

 

4.3당시 무장대는 봉기 초반부터 300명 안팎으로 보고되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명을 넘어 수천 명이 체포되는 내용이 곳곳에 보이는데 과연 '100명의 폭도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침으로 삼는 이의 행동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을 쓴 이들은 박진경 대령의 행적을 옹호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김익렬 연대장을 거짓말쟁이로 모는 것에 상당한 분량을 할당하고 있다. 

김익렬 장군이 유고 실록에 '우리 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박진경 연대장이 부대원들에게 훈시했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박진경 연대장의 잘못을 질타하는 내용이 다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알아야 한다. 

박진경 연대장의 무자비한 토벌 행적은 제3자의 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박진경 연대장 본인의 행동에 의해 만들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말이다. 

 

안타깝게도 제 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토벌 작전은 대한민국 육군 제1호 작전이 되었고, 박진경 연대장 장례식은 대한민국 육군 제1호장이 되었다. 

 

판결

 

8월 13일, 5일차 심리는 참고인 진술에 이어 검사의 구형과 변호인 측의 최후 변론으로 종결됐다. 

다음날인 8월 14일, 선고가 있었다. 

검사와 변호인이 주장한 내용과 선고 내용이 신문에 자세히 보도되었다. 




사진 8 1948년 8월 15일자 한성일보 기사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4명에 사형언도
박대령군법회의 일단락
암살공판


박대령 암살사건 제5일(8월 13일) 고등군법회의는 오전 증인 심문에 이어 오후에는 취조관의 증인 심문이 있었다. 
증인심문이 끝난 다음 변호인으로부터 무죄석방 해달라는 중간재판 요구가 있었으나 각하되고 재판은 계속되어 이지형 검찰관으로부터 
범죄사실의 범위와 실행요건에 대한 결론과 그릇된 민족지상이념에서 군대의 생명인 규율을 문란케 한 중범죄에 대해서는 사형도 줄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이어서 관선 변호관 김홍수 소령의 문중위 이하 각인은 산사람의 지령을 받은 일도 없고 또 무슨 사상적 배경도 없고 다만 민족애와 정의감에서 나온 범행이었으니 특별히 고려해 달라는 변호가 있은 다음
김양 민선 변호인으로부터
'금번 제주도 소요사건의 직접 원인이 일부 악질 경관과 탐관오리의 비행에 인하였다는 것은 이미 각 책임자들이 지적하는 바이다. 
해방된 이땅에서 제주도민들이 가진 그 모든 불평과 본의 아닌 민족 상잔에서 쓰러진 동포의 주검을 본 이 젊은이들이 어떻게 하면 이것을 방지하고 30만 도민을 구할 수가 있을까하는 고민 끝에 어리석고 좁은 판단이나마 자기 생명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뼈아픈 각오로 이러한 범행을 감행한 것이다. 
물론 박대령을 암살한 것은 유죄요 잘못이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는 또 오늘날 이 혼란에 빠지고 있는 사회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8.15 정권이양을 앞두고 바야흐로 완전자주독립하려는 이 때, 왜세가 재무장하고 이땅을 다시 침략하려고 노리고 있으니 이러한 용감한 
젊은 생명은 살려두었다가 차라리 우리 조국을 위하여 죽을 기회를 줄 것을 바라며 또한 그들은 반드시 민족을 위하여 싸울 것을 믿는다'는 변호가 있어 변호인의 말끝마다 묵묵하든 방청객의 얼굴에는 눈물이 호수같이 밀리고 감개는 물끓듯이 용솟음쳐 보였다. 

이날로 끝마칠려고 애쓰던 동 회의는 14일 다시 제6일공판으로 들어갔다. 
극도로 긴장된 법정에는 곳 언도가 나리어 조선경비법 제35조에 의하여 문상길(장교), 손선호, 배경용, 신상우(하사관)의 4명은 사형, 양회천(하사) 무기징역, 강승규(하사) 5년 징역, 황주복(하사) 무죄, 김정도(하사) 무죄가 전달되지 방청석은 다시 슬픈 눈물에 잠겼다.

 

이상이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재판기록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재판이 관계인만 방청할 수 있는 비공개 재판이었던만큼 언론 보도 이상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재판에 참고인으로 참석한 김익렬 연대장은 유고 실록을 통해 문상길 중위의 최후 진술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재판은 예상하였던 것보다 간단하게 끝났다.
검찰관의 심문에 범인들은 3인 모두 죄상 전부를 순순하게 인정하였으므로 재판은 한 시간도 못 되어 끝났다. 
그들은 범행동기에 관하여 자기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다른 정치적 목적도 없었고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 군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민족반역자를 총살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이 군인의 임무라고 끝끝내 주장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사고를 저질러서 본의 아니게 김익렬 연대장에게 피해를 주어 죄송하다"고 사과하였다. 

재판장 이응준 대령은 범인들에게 최후로 법정에서 진술할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범인들은 사전에 심적으로 서로 상의하여 두었던지 문상길 중위가 3인을 대표하여 "진술할 말은 별로 없으나 재판장 이하 전원과 김익렬 연대장에게 최후의 부탁이 하나 있으니 들어 주겠느냐?"고 하였다. 
재판장은 "들어 줄 만한 말이면 들어 줄 터이니 말하여 보라."고 하였다.

문상길 중위는 정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박진경 연대장님을 사살하였으나 본인 개인에 대해서는 대단히 죄송하게 여긴다."
(처음으로 ‘연대장님’이라는 존칭어를 썼다. 그 전에는 줄곧 ‘민족반역자’라 하였다)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의 총애를 받은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 안다. 
우리 3인에게 총살형의 선고를 내리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이 법정의 성격상 당연히 총살형이 선고될 것이며 우리는 그 선고에 마음으로 복종하며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과 김 연대장도 장차 노령하여지면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나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일순간 법정은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단상과 단하의 방청객 할 것 없이 전부가 안색이 굳어졌다. 
이응준 대령은 창백한 안색을 짓고 한참 말없이 앉았더니 법정휴회를 선언했다. 
재판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었다. 
김익렬 장군 실록 유고

 


사진 9 김익렬 연대장 재임시 9연대 장교 기념사진 (사진 출처 : 월간조선 2012. 8)
한가운데(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김익렬 중령, 앞줄 오른쪽 첫 번째가 문상길 중위이다. 
어찌보면 군대 특유의 딱딱함이 묻어날 수 있는 사진이지만 나는 이 사진에서 반대로 '여유'가 느껴진다. 

김익렬 연대장은 '군인은 목숨을 바칠 만한 명분,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대의가 있어야 복종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진에서 느껴지는 '여유'는 제대로 된 인식을 가진 리더와 지휘관들이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분위기라 생각한다. 

 


사진 10 박진경 연대장과 11연대 장교 기념사진. (사진출처 :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
1948년 6월, 작전회의를 마치고 찍은 사진이라는 설명이 있다.  
뒷줄 왼쪽에서 3번째가 박진경 연대장이다. 
박진경 왼쪽 사람이 재판에서 박진경의 학살이 사실임을 증언한 임부택 작전참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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