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9월 23일.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가 수색 동방 5리 지점, 육군 처형장에서 처형됐다.
문상길 중위는 1948년 9월 23일 3시 25분, 손선호 하사는 잠시 뒤인 3시 45분에 총살이 집행됐다.
8월 14일 사형 판결 후 각개각층에서 사형은 부당하는 탄원이 일었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사형 집행은 한 차례 미뤄졌고, 문상길 중위 및 손선호 하사와 함께 사형을 언도 받은 신상우 일등중사와 배경용 하사는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문상길 중위와 함께 항상 따라 다니는 이름이 손선호 하사이다.
끝까지 감형되지 않고 함께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문상길 중위의 흔적을 쫓으며 손선호 하사에 대한 기록도 찾아봤지만, 손선호 하사에 대한 기록은 그나마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문상길 중위의 흔적에 비해서도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있는 기록이라곤 1950년 1월 북조선 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회가 발행한 기관잡지 <청년생활> 1월호가 거의 전부였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책의 내용은 사실보다는 방향이 우선시 되는 책으로 신빙성이 매우 낮다.
아래 내용은 내가 그동안 찾은 손선호 하사의 기록을 약력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괄호 안의 내용은 내가 보충 설명을 달은 것이다.
일시 | 내용 | 출처 |
1927년 | 손선호는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고향에는 노령의 부모와 조부모가 있으며 5명의 형제가 있다. |
청년생활 1950 1, 32p |
성장기 | 손선호의 부친은 빈한한 소작인이다. 손선호는 어렸을 때부터 학대와 압박을 받으면서 자라고 소학교도 중도 퇴학하였다. 한동안은 지주집에서 머슴 생활도 했다. 그는 부친과 함께 가혹한 육체노동에 종사하였는데 이때부터 일본놈들에 대한 반항심과 증오심이 깊이 간직되어 있었다. |
청년생활 1950 1, 32~33p |
1945년 8월 15일 | 손선호는 즉시 민청에 가입했다. (민청은 1946년 4월에 만들어진 조직이므로 날짜 신빙성은 낮다. 그저 광복 후 이런 일을 했다라는 의미로 뭉뚱그려 표현한 것 같음) |
청년생활 1950 1, 33p |
1946년 10월 | 10월, 인민항쟁이 일어나자가 제1선에서 자기희생적인 애국심을 발휘하였다. (대구 10월 사건을 말함) |
청년생활 1950 1, 33p |
1946년 10월 이후, 정확한 시점 미상 |
손선호 대구 6연대 3기로 입대하였다. 인민항쟁 후 반동경찰의 엄중한 추궁을 피하면서 동무는 국방경비대 제6연대에 제3기로 입대하였으며 입대한 후 대내에서 자기의 사업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대구 6연대는 1946년 2월 18일 창설되었다. 청년생활 기록에 따르면 대구 10월 사건 이후 입대한 것이니 입대 시점은 1946년 10월 이후라 할 수 있다. 손선호의 입대 시점에 따라 문상길 중위와 만날 가능성은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 문상길 중위가 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한 것은 1947년 1월 13일이다. 일단 산술적으로 따지면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의 동선이 겹칠 가능성이 있는 기간은 약 2개월 정도이다.) |
청년생활 1950 1, 33p |
1948년 3월 | 손선호 하사는 부사관 교육(위생병 교육으로 추정)을 받기 위해 부산 5연대에 파견되었다. |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 295p |
1948년 3월 부산에 있는 하사관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수업 중 4월에 뜻밖에도 소위 '제주도 토벌대'로 동란을 계속하고 있는 제주도에 강제파견을 당하게 되어 여기서 손동무는 가렬한 무장투쟁의 현실에 부닥치게 되었던 것이다. | 청년생활 1950 1, 33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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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10일 | 부산 주둔의 제5연대 제2대대(대대장 오일균 소령)제주도 비행장에 도착, 제9연대 배속 (한국 전쟁사 1권에는 5연대 2대대가 1948년 4월 10일 제주도에 도착했다고 하지만, 다른 기록과 비교해 봤을 때, 오일균 대대가 제주에 도착한 시점은 4월 20일인 것 같다. 부산 5연대에서 부사관 교육을 받던 손선호 하사는 이때 제주에 내도하게 된 것 같다.)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제1권 - 해방과 건군, 438p |
1948년 4월 20일 | 미군정, 미고문관 드루스 대위와 부산 제5연대 소속 1개 대대를 제주도에 파견 |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
손선호 하사가 5연대 2대대 제주 출동시 위생병으로 편입되어 제주도에 오게 됨 (원 출처인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이라는 책에는 이 부분의 출처로 '자유신문 1948년 7월 13일자'를 말하고 있으나 해당 신문에는 이런 내용은 존재하지 않았음) |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 295p | |
1948년 4월 | 손선호 동무는 불을 뿜는 듯한 어조로써 자기의 동료들에게 이런 말을 루차 하였다. 친일 매국도당을 무찌르고 한라산에서 제주도 인민들과 함께 목숨을 바칠 것이다. |
청년생활 1950 1, 33p |
1948년 5월 3일 | 손선호는 토벌대의 숙사인 서비행장 안에서 동지를 규합하기 위한 조직 선전 공작에 전력을 집중하는 한편 5.10 망국단선을 분쇄하기 위하여 1개 소대를 인솔하고 자기의 담당구역인 한림면 일대의 각 투표장을 하나씩 하나씩 파괴하고 다니었으며 드디어 3일에는 한림지서원들이 인민을 학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도하게 되자 북바치는 의분심을 제지할 수가 없어 즉시로 한림지서를 급습하여 집중사격으로써 지서를 여지없이 파괴하고 지서원들을 배로 비양도 도주케 한 뒤 지서를 점령하여 일체의 서류를 소각하고나서 근변 부락민들 수백명을 집합시켜 놓고 '망국 단선 단정 분쇄!', '인민공화국 만세!'를 호소하여 전 부락민들의 열렬한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 청년생활 1950 1, 35p |
1948년 5월 23일 | 손선호는 기아시위를 조직함. 일반병사들에게 급식증가의 구호를 주어 수백의 병사의 태업을 조직하고 박진경 앞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밥그릇을 가지고 기아시위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박진경으로 하여금 완전히 병사들의 요구를 실행케 하였다. |
청년생활 1950 1, 36p |
1948년 5월 27일 | 손선호는 진급 요구를 구실로 태업과 시위를 조직하였다. 이와같은 투쟁과정에서 손동무는 점점 더 뜨거운 신뢰를 동포들로부터 받게 되었으며 승리에 대한 신념은 확고해 갔으며 살인지휘관 박진경에 대한 증오심은 더욱 증대하여 갔다. 오직 자기 혼자의 생명을 바치어 살인귀 박진경을 처단함으로 전국방경비대원에게 애국적 격려를 주고 30만 도민의 투쟁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다면 이 이상없는 영광이다. 이것이 그 당시의 손동무의 진실한 충성이었던 것이다. |
청년생활 1950 1, 36p |
1948년 6월 18일 | 박진경 연대장 암살 (직접 총을 쏨) | |
1948년 9월 23일 | 문상길 중위와 함께 처형됨 |
이상이 손선호 하사에 대해 찾아볼 수 있는 기록의 전부였다.
<청년생활>의 글들을 보면 손선호 영웅화를 위해 조작을 넘어 망상이라 할 수 있는 글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작 이런 글을 소개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자괴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그런데 뜻밖에 귀중한 내용을 볼 수 있었다.
4.3 관련 유튜브 방송 댓글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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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4.3관련 유튜브 방송 하나에 달려 있던 댓글로서 손선호 하사님 친척분이 달으신 댓글. |
이 댓글을 보고 너무나 반가와 내 전화번호와 함께 연락을 달라는 대댓글을 달았으나 유튜브 정책 때문인지 지워져 버렸다.
이 분을 만나뵐 방법이 없을까?
이 댓글은 2년 전에 달린 댓글로 되어 있다.
2023년 경 달린 댓글이라는 뜻이다.
별도의 아이디 없이 작성자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좀 나이가 드신 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사실'이다.
손선호 하사님은 경주월성손씨 양반집 자제였던 것이다.
물론 양반집이라고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북한 잡지 <청년생활>에 등장하는 '빈한한 소작인', '학대와 압박', '소학교 중퇴', '머슴생활', '가혹한 육체노동', '반항심과 증오심' 등은 손선호를 '혁명전사'로 부각하기 위해 과장 또는 조작된 표현일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2025년 4월 27일 내용추가
안상학 선생님으로부터 손선호 하사에 대한 새로운 내용이 밝혀졌다는 소식이 왔다.
제주4.3연구소에서 이사장을 지내셨던 김영범 교수님께서 친족 후손을 만나 족보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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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 경주손씨 대동보 1권 264쪽에 등장하는 손선호 하사 내용. |
우선 손선호 하사의 본명은 손순호였다.
손선호 하사님은 경주손씨 낙선당파 22세손이셨다.
병인년에 출생하셨으니 문상길 중위와 동갑이다.
아내 분의 약력도 있고, 자제분에 대한 정보도 있다.
사망하신 때가 정확하게 적혀있다.
무자년 8월 21일.
양력으로 변환하면 1948년 9월 23일, 처형이 집행된 날이다.
무덤에 대한 정보도 적혀 있는데 김영범 교수님이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무덤은 헛묘라고 한다.
손선호 하사님에 대해 정보 역시 하나하나 제대로 규명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됐다.
제주 방송의 관련 보도 : "박진경 대령 암살 '4.3의인' 손선호, 본명은 손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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