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끄저기/4.3의 사람들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6. 거절의 이유

다락방별지기 2025. 4. 11. 12:18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피어오르는 봉화를 신호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촉발됐다. 

이날 하루동안 제주도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가 무장대의 습격을 받았다. 
네 명의 경찰이 사망하고, 두 명이 행방불명 되었으며, 민간인도 여덟 명이나 피살되었다. 
무장대에서는 두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때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때까지 6년 6개월동안 제주도는 오늘날 우리가 '4.3사건'이라 부르는 유혈사태를 겪게 된다.




사진 1. 다랑쉬 굴 앞에 놓인 비석과 검정고무신
4.3사건에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오직 하나, 나라야 어찌 됐든 순박하게 일상을 살아갔을 양민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했다는 사실이다. 
그 선량한 사람들을 죽여댄 무장대는 이미 죗값을 치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무장대가 처벌 받았듯이 진압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양민을 살해한 대한민국 군경도 하나하나 색출하여 처벌해야 한다.
서훈을 박탈하고 국립묘지에서 이장시켜야 한다. 
그것이 내가 4.3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유일한 관점이다. 


4.3이 발발할 당시 문상길 중위는 모슬포 주둔 9연대 1대대 3중대 중대장으로 보임중이었다. 
4.3당시 문상길 중위의 이름은 모두 세 개 사건에 등장한다. 

첫 번째 사건은 4.3당일 행적으로서, 9연대의 4.3 직접 가담을 거절하는 장면이다. 
두 번째 사건은 1948년 5월 20일 밤, 9연대 장병 41명의 집단 탈영 사건에서이다. 
마지막 사건은 1948년 6월 18일, 박진경 연대장 암살 사건이다. 

이 세 개 사건은 모두 '문상길 중위가 남로당의 끄나풀로서 각 사건을 주도한 것'이라는 기본 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연 이러한 평가가 타당한 것인지 각 사건 하나하나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번 장에서 다룰 항목은 바로 첫 번째 사건, 4.3직접 가담을 거절하는 장면이다. 

반공투사 vs 빨갱이

4.3 당일, 9연대 지휘관 김익렬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당시 김익렬 중령은 제주를 방문한 3여단장 백선엽 장군을 응대한 뒤, 귀대하던 중이었다. 
4월 2일 밤, 김익렬 일행은 한림여관에 유숙했으며 그곳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았다. 
당시 한림은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경찰관 2명 부상, 민간인 6명 부상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김익렬 일행은 현장을 무사히 빠져나와 아침 8시에 부대로 귀환하였다. 
김익렬 연대장은 귀대 즉시 비상대기 명령을 내리고 사복으로 갈아 입힌 부대원들을 각지로 보내 정보를 취합했다. 

그런데 김익렬 연대장이 자리를 비웠던 4월 3일 새벽, 9연대에는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 
2003년 발행된 정부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파견원이 최후적 지시를 가지고 국경(國警) 프락치를 만나러 갔던 바, 
프락치 2명은 영창에 수감되어 없었음으로

할 수 없이 횡적으로 문상길 소위를 만났던바,  
이 동무의 입을 통해서 국경에는 이중세포가 있었다는 것, 

그 하나는 문소위를 중심으로 해서 중앙직속의 정통적 조직이며 
또 하나는 고승옥 하사관을 중심으로 한 제주도 출신 프락치로의 조직이었음.

그래서 4.3투쟁 직전에 고하사관이 문소위에게 

무장투쟁이 앞으로 있을 것이니 

경비대도 호응궐기해야된다고 투쟁참가를 권유했던 바
문소위는 중앙지시가 없으니 할 수 없다고 거절한 바 있었다고 함.

 

이 말을 듣고 파견국경공작원은 깜짝 놀랐으나 

이렇게 된 이상 어찌할 수 없으니 

제주도 30만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고
또한 우리의 위대한 구국항쟁의 승리를 위하여 

기어코 참가해야 한다고 재삼재사 요청하였으나 
중앙지시가 없음으로 어찌할 수 없다고 결국 거절 당했음. 

 

이리하여 4.3 투쟁에 있어서의 국경 동원에 의한 거점분쇄는 실패로 돌아갔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164페이지에 등장하는 이 문구는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라는 무장대 노획문서를 재인용한 것으로서 제주4.3사건이 남로당 중앙당이 개입한 사건이 아니라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즉, 문상길 중위는 남로당 중앙당 조직에 속한 인물인데 문상길 중위가 4.3에 개입하기를 거절하였으니 남로당 중앙당은 4.3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례로 등장하는 것이다. 

사건의 내막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6년 11월 16일, 제주에 9연대가 창설되었다. 
이후 연대 주둔 지역에서 병력을 충원한다는 미군정의 뱀부계획에 따라 제주에서도 모병이 시작되었으며, 1947년 3월 10일, 1차 모병이 있었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 따르면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에서는 총 네 명의 세포가 9연대에 입대했다고 한다. 
고승옥, 문덕오, 정두만, 류경대라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 정두만은 일본으로 도피하고 류경대는 전향하였다. 
결국 4.3이 발생했을 때는 고승옥과 문덕오만이 세포로 활동하는 상태였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남로당 제주도당이 제주에서 무장봉기를 결정한 것은 1948년 2월 신촌회의를 통해서였다. 

이들의 무장봉기 계획에는 9연대 병력을 동원하여 제주시감찰청을 습격하겠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빈약한 무장의 무장대만으로는 적진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제주시 감찰청까지 습격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들은 9연대에 침투한 세포에게 병력 동원 가능성을 타진했고 다음과 같은 답을 받았다. 


9연대 전체 병력 800명 중 400명은 확실성이 있으며, 
200명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고, 

반동은 주로 장교급으로서 하사관과 합하여 18명이니 

이것만 숙청하면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했다.
그러나 9연대에는 차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동차 5대만 보내주면 좋고, 

만약 불가능하다면 도보라도 습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 <한라산은 알고 있다. 묻혀진 4·3의 진상(1995)> p76

즉,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무장항쟁을 결정하고, 그 일환으로 무장봉기 당일 9연대 병력을 제주감찰청 습격에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그 가능성까지 타진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행에 이르지 못한다. 

 

당일 파견원이 차를 준비해 9연대가 주둔해 있던 모슬포까지 갔으나 파견원이 맞닥뜨려야 했던 현실은 9연대에 침투해 있던 두 명의 세포가 모두 영창에 입감되었다는 것과 '중앙에서 지시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실행에 반대하는 문상길 중위였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4.3당시 드러난 문상길의 행적은 모두 문상길이 9연대에 잠입한 남로당 세포라는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관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문상길 중위가 취한 행동은 무장대의 일에 협조하는 것이 아니라 훼방놓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두 명의 세포를 영창에 가둬놓은 것은 훼방을 넘어 적극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미군정기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항상 실수를 저지른다. 

미국과 소련, 남한과 북한, 이승만과 김일성, 반공과 빨갱이 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나는 이 관점이 정말 잘못된 관점이라고 생각하지만 백번 양보하여 이 이분법으로 문상길 중위의 행동을 평가해 보겠다. 

 

4.3당일 무장대가 침투시킨 두 명의 세포를 영창에 가두어 놓고, 4.3무장 봉기 동참을 호소하는 파견원의 지시를 거부하는 문상길의 행동이 '반공과 빨갱이' 중 어디에 속한다고 보는가?

이 세상이 반공투사와 빨갱이, 두 종류만 존재한다면 문상길의 행위는 어디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가?

 

지워져버린 사상, 민족주의

 

이분법적으로 본다면 문상길의 행위는 '반공투사'의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상길 중위가 '반공투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반공투사와 빨갱이 사이에 수많은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문상길 중위가 서 있었던 자리, 아니, 그 시대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사람 대부분이 서 있었던 자리가 반공투사와 빨갱이라는 두 극단 중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극우 측에서는 문상길 중위를 빨갱이로 규정한다. 

문상길 중위가 무장대 총사령관이었던 김달삼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 역시 문상길 중위를 빨갱이로 간주하는 중요 근거 중 하나이다. 

 

물론 문상길 중위는 김달삼과 친분이 있었다. 

 

남로당 대정면책으로 1947년 3.1사건 직후 옥고를 치루고 일본으로 망명한 바 있는 이운방 씨는 문상길 중위가 ' 말타고 거닥거닥 와서 유유히 말 매어놓고 김달삼 집에 며칠 머무르다 가기도 했다'는 증언도 했다. 

군인 신분인 문상길 중위가 사가에 나와 며칠 씩이나 유숙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지만, 나는 이 증언을 거짓이라고 평가하기보다는 '그만큼 친분이 있었다'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상길 중위는 김달삼과 어떻게 친분을 갖게 된 것일까?

 

어떤 이들은 문상길 중위가 대구 10.1사건 때 이미 김달삼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극우 측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물론 근거는 없다. 그냥 아무말 대잔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보다는 더 넓게 받아들여지는 시나리오가 있다.

극우는 물론, 중도 측에서도 널리 인용되는 것이다. 

김달삼은 대정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리고 당시 대정중학교는 9연대 연병장 한구석에 천막을 치고 수업을 진행했다. 

김달삼이 대정중학교 교사이고 문상길은 9연대 장교이니 이때 자연스럽게 친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김달삼이 대정중학교 교사로 근무한 것은 아무리 늦게까지 잡아도 1947년 3월 1일까지이다. 

반면 문상길 중위가 9연대로 부임한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봐야 1947년 4월 말이다. 

 

그렇다면 문상길 중위는 언제 김달삼과 친분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문상길 중위가 9연대 모병관으로 근무하면서 지역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린 결과일 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 9연대의 모병 광고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진 2. 1947년 4월 22일. 제주신보에 실린 9연대 모병 광고문. 
제1대 연대장인 장창국 명의로 실린 광고문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방 후 2. 해방은 되었다 하나 자주독립 평화의 길은 아직 요원하다.
순박한 인민은 정치모리배들의 간계에 넘어 좌우 양 진영으로 놓여 골육상쟁하는 어리석은 멸망의 길로만 다지고 있다.
인민들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 손으로 나라를 세우고 우리 손으로 일하는 나라를 원하고 있다.
이 위대한 공동목적에 단결 못 될 이유는 내변(奈邊)에 있는가?
조국은 바야흐로 존망의 기로에 서고 있다.
이 위급한 순간에 주의나 이론은 무용의 장물이다.
오직 행동만이 능히 조국을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국방경비대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동포를 사랑하고 조국을 위하여 순국하려는 피끓는 젊은이들의 애국군사기관이다.
우리들은 모국의 주구도 아니요, 일개 정당의 이용기관도 아니다.
다만 안으로는 자주독립을 추진시키고 밖으로는 국방의 중책을 완수하려는 국가의 간성이다.
분열과 모략만을 일삼고 사리사욕과 권력만을 야심하는 우리의 열악한 국민성을 완전히 청산하여야 한다.
자기 자신의 영웅되기 전에 먼저 복종의 미덕을 배우자. 복종은 단결의 길이다.
이론보다 실천을 사랑하고 타를 비방함보다 복종을 사랑하는 애국청년들은 다 오라.
군대는 그대들의 입대를 쌍수로 환영한다.
오라! 다 같이 철석 같은 단결하에 조국광명의 길로 지도하자.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진주한 미군은 순전히 '효율적'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일제에 부역한 이들을 행정에 다시 참여시켰다. 

특히 친일경찰의 부활과 이들의 행동은 민심 이반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방경비대의 모병 전략은 경찰과는 사뭇 대비되는 것이었다.

바로 민족주의가 강조되었다는 것인데,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사진2로 인용한 모병 광고문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민족주의'가 미군정기 사회를 바라보아야 할 주요 축의 하나라는 점이다. 

이제막 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국을 꿈꾸는 이들이 그리는 미래는 민족이 하나가 되는 민주주의 국가였지 이승만이 집권하는 국가도, 김일성이 집권하는 국가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집권 전에도 집권 후에도, 그리고 이승만의 유산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극우 세력도 자신의 입장에 반대하는 세력을 끊임없이 '빨갱이'로 몰았다.

심지어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딘 미군정장관까지 빨갱이로 몰았다.

이 유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전광훈과 전한길을 비롯한 윤석렬 지지 세력이 윤석렬 탄핵을 지지한 대부분의 시민을 빨갱이로 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시민이 빨갱이가 아니라, 상식을 가진 민주공화국의 시민이라는 것을 말이다. 

 

해방 정국도 마찬가지였다. 

식민지배를 갓 벗어난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식을 가진 민족주의자였다. 

당연히 신생 조국의 간성이 되겠다고 군에 입대한 사람들 대부분도 민족주의자였다. 

청년 문상길 역시 그 중의 한 명일 따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들이 어울려, 조국의 미래를 토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모병을 위해 영외를 자주 드나들며 여러 청년을 만나야 했던 문상길 중위가, 지역 청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던 김달삼을 만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라는 점은 자연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행간의 의미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둘은 친구일지언정 정치적 동지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4.3 당일 사건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제 이 사건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자. 

 

파견원이 최후적 지시를 가지고 국경(國警) 프락치를 만나러 갔던 바, 
프락치 2명은 영창에 수감되어 없었음으로

할 수 없이 횡적으로 문상길 소위를 만났던바,  
이 동무의 입을 통해서 국경에는 이중세포가 있었다는 것, 

그 하나는 문소위를 중심으로 해서 중앙직속의 정통적 조직이며 
또 하나는 고승옥 하사관을 중심으로 한 제주도 출신 프락치로의 조직이었음.

그래서 4.3투쟁 직전에 고하사관이 문소위에게 

무장투쟁이 앞으로 있을 것이니 

경비대도 호응궐기해야된다고 투쟁참가를 권유했던 바
문소위는 중앙지시가 없으니 할 수 없다고 거절한 바 있었다고 함.

 

이 말을 듣고 파견국경공작원은 깜짝 놀랐으나 

이렇게 된 이상 어찌할 수 없으니 

제주도 30만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고
또한 우리의 위대한 구국항쟁의 승리를 위하여 

기어코 참가해야 한다고 재삼재사 요청하였으나 
중앙지시가 없음으로 어찌할 수 없다고 결국 거절 당했음. 

 

이리하여 4.3 투쟁에 있어서의 국경 동원에 의한 거점분쇄는 실패로 돌아갔음.

 

이 글에서 색깔을 달리 처리한 부분은 행간을 읽을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통해 다음의 사항을 유추할 수 있다. 

 

첫째, 김달삼은 문상길 중위에게 4.3 무장봉기와 관련된 일체의 내용을 공유하지 않았다.

문상길 중위에게 9연대 병력을 동원하자고 권유한 이는 김달삼이 아니라, 고승옥이었다. 

그것도 4.3 무장봉기 직전에야 얘기했다. 

 

둘째, 파견원이 문상길 중위를 접촉한 것은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횡적으로' 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맥상 '그나마 안면이 있는 사람이니 도와주지 않을까?'라는 희망사항으로 읽힌다. 

즉, '할 수 없이 그나마 안면이 있으니 도움을 청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문상길 중위를 만났다는 것이다. 

 

이상 첫째와 둘째 내용은 문상길 중위와 4.3무장봉기 수뇌부가 신뢰관계까지는 이르지 못한, 친밀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셋째, 4.3무장봉기가 일어나면, 고승옥이 모종의 행동을 취하리라는 것을 사전에 알게 된 사람은 문상길 중위였다.  

4.3투쟁 직전에 고하사관이 문상길 중위에게 무장투쟁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4.3무장봉기가 일어나던 날, 고승옥 하사관은 영창에 입감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포인 문덕오까지 영창에 가두었다. 

누가 이들을 영창에 입감시켰을까?

바로 답이 나온다. 바로 문상길 중위였던 것이다. 

 

넷째. 문상길 중위는 '중앙의 지시가 없음'을 이유로 들며, 자기야말로 '중앙의 정통조직'이라고 말한다.

이 역시, 문상길 중위와 김달삼의 관계가 친분 이상의 관계가 아님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정말 문상길 중위가 남로당 중앙조직 소속이라면, 남로당 제주도당의 군책에까지 오른 사람에게 이를 숨길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문상길 중위가 정말 남로당 중앙조직 소속이 맞는지도 의문이다. 

 

1948년 2월 7일, 남로당은 이른바 '단선 저지를 위한 구국투쟁'에 돌입하여 총파업은 물론 경찰관서 습격, 기관차 파괴, 전신주 절단, 교량 폭파 등 전국에서 극렬한 투쟁을 일으켰다. 

이로인해 남로당은 물론, 약간이라도 연관관계가 있는 좌익 세력은 대규모 검거와 투옥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남로당은 이를 계기로 '입산 무장 투쟁'을 본격 모색하기 시작했다. 

 

1948년 4월 3일은 남로당으로서는 극력 저지해야 할 5.10선거를 불과 한 달 남겨둔 시점이었다.

그래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의 4.3봉기 두 개 이유 중 하나가 5.10선거 저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남로당 중앙조직 소속의 문상길 중위가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까?

당연히 봉기를 도와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문상길 중위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것도 '중앙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즉, 문상길 중위가 뜬금없이 '중앙의 정통조직' 운운한 것은 단순한 핑계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구절절 이유를 대는 파견원에게 여러 말 할 것 없이 단칼에 거절하면서, 군인에게는 익숙한 '위계질서'라는 체계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상길 중위는 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한 것일까?

문상길 중위가 민족주의자라면 바로 답이 나온다. 

민족주의자에게는 어떤 이유로든, 같은 민족에게 총칼을 들이대는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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