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끄저기/4.3의 사람들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5. 악마화

다락방별지기 2025. 4. 6. 01:10

1.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

 

2024년 12월 3일. 

모슬포에서 문상길의 흔적을 찾아 헤매다 돌아온 나는 피곤에 지쳐 일찍 잠들었다. 

그 밤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해제되었다는 것을 나는 아침에 눈을 뜨고서야 알 수 있었고 급히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그로부터 122일이 지난 2025년 4월 4일. 

내란수괴가 탄핵되면서 사건은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헌법 재판소에서 선고문이 낭독될 때, 내 귀에 꽂힌 문구가 있었다. 

 

한편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으므로 

 

이 문구를 들으며 문상길 중위가 생각났다. 

 

문상길 중위가 이 시대의 청년이었다면, 

국회로 병력을 이끌고 간 부대의 중대장이었더라면,

국회 한쪽 구석에 부대원들을 모아놓고 움직이지 않으며, 그렇게 소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국회 증언대에 나와 '이것은 위법이어서 실행하면 안됩니다.'라며 상관을 말렸던 장교들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괴로움에 몸부림치지 않았을 것이고, 상관을 암살하는 극단적인 선택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대를 온 몸으로 짊어지고 그 한계 앞에서 절망해야 했을 문상길을 생각하며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돌았다. 

 

2. 악마화

 

이제 운명의 땅, 제주에서 문상길의 행적을 추적해 볼 차례다. 

 


사진 1 : 국방경비사관학교 3기 졸업 20주년 기념 앨범에 등장하는 문상길 소위
사진 출처 : KBS 제주 4.3특집 다큐멘터리 <암살>

 

소위로 임관한 문상길이 제주 9연대에 부임한 때는 1947년 4월 20일 이후에서 6월 20일 사이로 추정된다. 

(추정 근거는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2. 뒤엉킨 기록과 기억' 참고)

이와 비슷한 때인 6월 1일, 9연대 초대 연대장 장창국이 퇴임하였고 2대 연대장 이치업이 부임하였다. 
이듬해인 1948년 2월, 3대 연대장에 김익렬이 취임하였다. 

김익렬 연대장은 이미 전년도인 1947년 9월, 부연대장으로 부임했었었다.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되고 4대 연대장으로 박진경이 취임한 때는 4.3이 발생하고 한 달 후인 1948년 5월 6일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때 문상길을 부하로 둔 상관이었다. 

각 연대장의 재임 시기와 문상길 중위의 부임 일정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946년 11월 16일 제주 9연대 창설
1대 연대장 장창국 부임
   
문상길 사관학교 3기 수료 및 소위 임관 1947년 4월 19일
문상길 제주 부임(추정) 1947년 4월 20일 ~ 6월 20일
1947년 6월 1일 2대 연대장 이치업 부임
1947년 9월 김익렬 소령 부연대장으로 부임    
1948년 2월 3대 연대장 김익렬 취임    
1948년 4월 3일 4.3 발발 이때 문상길은 중위로서 중대장 보임 중이었음.  
1948년 4월 28일 김익렬, 무장대 총사령관 김달삼과 회담    
1948년 5월 6일 4대 연대장 박진경 취임    
1948년 6월 18일 박진경 연대장 암살    

 

표를 보면 알 수 있듯 문상길은 9연대 재임 중 최소 세 명의 상관을 모셨다. 

문상길 부임 시기가 1947년 6월 1일 이전이라면 장창국 연대장에게 부임 신고를 했을 것이므로 네 명의 상관을 모신 셈이다. 

 

이 네 명의 연대장은 모두 문상길을 기억할 것이다. 

혹시 그들이 남긴 기록에 문상길이 있지 않을까?

 

우선, 4대 연대장으로 부임후 암살당한 박진경 연대장은 남긴 기록이 없다. 

하지만 1대, 2대, 3대 연대장은 어떤 형식으로든 기록을 남긴 이들이다. 


1대 연대장 장창국의 경우 창군기 장교들과 그들의 행적을 기록한 <육사졸업생(1984, 중앙일보사)>이라는 책을 남겼다.  
2대 연대장 이치업의 경우 <번개장군(2001, 원민)>이라는 자서전을 남겼다. 
3대 연대장 김익렬은 그 유명한 <김익렬 장군 실록 유고>를 남겼다.

(참고로 <김익렬 장군 실록 유고> 는 단행본이 아니라 <4.3은 말한다 2권(1995, 전예원)>에 부록으로 실려 있음.) 

 

4.3이 발생했을 때 문상길의 계급은 중위로서 1대대 3중대 중대장이었다. 

이는 문상길 휘하 소대장이었던 채명신 소위의 자서전 <사선을 넘고 넘어(1994, 매일경제신문사)>에서 확인된다. 


그렇다면 장창국, 이치업, 김익렬 중 누군가는 문상길을 진급시키고 중대장에 임명했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의 진급은 고정된 체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급권자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가능한 때였다. 

그렇다면 세 명 중 누군가는 문상길에 대한 일화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내가 찾고 싶었던 부분은 박진경 연대장 암살과 그 이후 재판 등, 이미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소소한 사건이나 일화였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사실 내가 가장 기대를 한 것은  <김익렬 장군 실록 유고>였다. 
김익렬 연대장은 4.3이 발발한 이후인 1948년 4월 28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평화회담을 한 인물이다.

이 평화회담을 주선하는데 문상길 중위가 막후에서 노력했다는 증언과 기록이 있어  <김익렬 장군 실록 유고> 에 문상길에 대한 기록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중요한 기록은 있었다. 

그 유명한 문상길 중위의 법정 최후 진술이 바로 <김익렬 장군 실록 유고>에 등장한다.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소소한 사건이나 일화는 없었다.

 

의외로 문상길과 관련된 일화가 나온 곳은 이치업 연대장의 자서전이었다. 

일단 각 연대장의 기록 중 포괄적인 평가 또는 4.3 발생 이전의 내용으로 추측되는 부분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내                  용 출처
1 1947년 5월, 내가 경비대 사령부 작전교육처장으로 전출되자 이치업 소령이 제2대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당초부터 확고한 반공, 우익사상을 가진 장교로서 매사에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후에 3기생 출신의 문상길 중위가 중대장으로 9연대에 부임했다. 충남 태생인 그는 대전의 제2연대에 사병으로 들어갔다가, 연대장의 추천을 받아 사관학교에 입교한 자인데 입대 전부터 좌익사상에 물들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육사에서는 좌익계의 오일균, 조병건 등이 도사리고 앉아 생도들을 포섭, 세뇌시키고 있었으니, 문상길의 좌익 사상이 더욱 강화됐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장창국
<육사졸업생> p114
2 문상길은 제주도에 부임한 이후 김달삼, 이덕구 등과 접선하여 9연대 장병들을 포섭, 연대 전체를 전복시키기 위한 공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공작의 방해 인물이 바로 반공 우익의 이치업 연대장이었다. 그래서 문상길은 포섭된 세포를 시켜 어느날 연대장 점심 식사에 독약을 넣었다. 이 때문에 이치업 소령은 1개월간의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당시는 이를 단순한 식중독으로 알고 넘어갔다. 이것이 좌익계의 독살극이라는 것은 후에 문상길이 체포되어 자백함으로써 밝혀졌다.  장창국
<육사졸업생> p114
3 뒤에 알게 된 사실은 내가 또 다시 암살 기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과 그 주동자는 연대 본부중대장인 문상길 중위였는다는 것이다. 그가 점심시간에 내가 먹게 될 국에 독약을 탄 것이었다. 그는 골수 공산분자였으며 나는 열렬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나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았다. (중략) 
나를 살해하려 하였던 문상길 중위는 제주 4.3 폭동의 주모자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졌다. 결국 그는 1948618일 박진경 대령을 살해하였다. 박 대령이 진급 축하 파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서 취침하자 문상길 중위가 숙소로 난입하여 M1소총으로 그를 살해하였다는 것이었다.
만일 내가 제주도에서 계속 근무를 하였더라면 아마도 내가 그 대신 목숨을 잃었을 것이었다. 그 이후에 문상길 중위는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처형 당시 문상길은 사형수에게 주어지는 최후 진술의 순간에 그가 오직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치업을 독살하지 못했다는 것과 만일 자신이 나를 죽이는데 성공하였더라면 북한에서 국가의 영웅이 되었을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유감이라고 실토하였다고 한다.
이치업
<번개장군>
p107 ~ 108
4 이세호는 이런 사건이 있기 얼마 전 나에게 문상길이 제주도로 전입되는 고급 장교들을 다수 포섭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었다.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문상길은 어떤 특정 장교에게 여자나 술, 돈으로 접근하여 약점을 잡은 후에 이를 악용하여 그들을 공산주의 활동에 동조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에는 이들을 곤경에 처하도록 공작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또한 문상길이 우리들에게 그렇게 사악하였던 것과 같이 나의 휘하에 있던 부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더욱 더 중요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이치업
<번개장군>
p108  
5 문상길 중위는 경북 출신이었고 나머지 2명은 경남 출신이었다. 특이한 것은 문 중위 등 3명이 모두 기독교 신자로 문 중위는 특히 신앙심이 강하였다고 한다. 당시 나이 23세였다. 김익렬 장군 실록 유고

 

3번과 4번 항목은 모두 이치업 연대장의 자서전 <번개장군>에 등장한다. 

3번 항목은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4번 항목은 문상길이 장교를 포섭하려 했다는 증언을 담고 있다. 

 

그런데 두 내용은 모두 신빙성이 높지 않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3번 항목의 경우 문상길이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것인데, 같은 책에서 이치업은 미군 의무대에 후송되었고 미군 의무대가 급성 장티푸스라는 진단을 내렸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장티푸스란 장티푸스균 감염으로 발생하는 세균성 질환으로 보균자의 대소변에 오염된 음식물 또는 물을 매개로 전파되는 질병이다. 

그렇다면 문상길이 보균자의 대소변을 음식에 넣었거나 아니면 (이게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장티푸스 균을 인위 배양하여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이게 도무지 가능한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의사를 하는 지인에게도 의견을 물어보았는데 '독극물로 장티푸스가 진단'되는 경우는 사실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이치업은 이 사건을 문상길이 처형당시 최후진술로 실토했다고 기록했다. 

문상길의 처형 집행은 당시 여러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된 바 있다. 

그런데 그 어디서도 문상길이 이러한 최후 진술을 했다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4번 항목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4번 항목이 사실이라면 이치업은 이미 연대장 재임 중 문상길이 공산주의자이며 다른 장교들을 포섭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바로 이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더더군다나 이치업은 본인 스스로를 열렬한 반공주의자라고 소개까지 하지 않았는가?

 

결국 이치업의 기록한 이 두 가지 일화는 이치업이 당시의 경험을 순행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박진경 연대장 암살범이므로 공산주의자'라는 프레임을 먼저 규정한 상태에서 퇴행적으로 기록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기록은 당연히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보다는 가치와 방향이 우선하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상길이 이치업 연대장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은 장창국 연대장의 기록(2번 항목)에도 등장한다. 

두 명의 기록에 동일한 사건이 언급되어 사실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장창국의  <육사졸업생>은 본인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취합된 자료를 모은 것이다. 

즉, 2번 항목의 출처 자체가 이치업 연대장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실례로 <육사졸업생>에는 김익렬 연대장의 4.28 평화회담에 대한 내용도 나오는데 그 내용은 모두 김익렬 연대장으로부터 제공받은 자료로 씌어진 것이다. 

 

물론 2번 항목의 출처가 이치업 연대장이라는 확증은 없다. 

하지만 설령 출처가 이치업 연대장이 아닌 다른 곳이라 해도 앞서 3번 항목 분석에서 다뤘듯이 '독극물로 급성 장티푸스를 유발'한다는 것은 의학적 근거가 없는 진술이므로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각 연대장이 남긴 기록을 보면서 내게 떠오른 단어는 바로 '악마화'였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문상길은 상관 살해를 이유로 처형되었고, 4.3은 북한의 사주에 의해 일어난 폭동이라고 규정되던 시대에 출판된 책들이니 더더욱 악마화해야 하는 이유가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왜 이치업 연대장이 유독 악랄한 기록을 남겼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다. 

심지어 4번 항목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무능했거나, 직무유기를 했다는 것을 자임하는 꼴임에도 말이다. 

이치업 연대장의 기록이 극우측 책에 의해 반복인용되며 문상길을 악마화하는데 계속 일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치업 연대장의 의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자료에서 이치업 연대장의 의도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했다. 

제주 4.3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아 1989년 발행된 책 <이제사 말햄수다 1권>에 다음과 같은 증언이 등장한다. 

 

이덕구 선생 동기가 9연대 연대장이라신디,

덕구 선생에게 9연대에 들어오랜 해났수다.

학생덜 가르쳐야 된다고 안 들어갔덴 헙디다.

이덕구는 제주 4.3 당시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 총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그랬던 그에게 9연대 입대를 권한 연대장이 있었던 것이다.

그 연대장은 누구였을까?

 

이덕구는 1943년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관동군 소위로 복무하였으며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조천중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랬던 이덕구는 1947년 8월, 조천중학원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해 3.1절,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는 총파업으로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난 이후였다. 

 

시기상 이덕구에게 9연대 입대를 권유했을 연대장은 장창국 아니면 이치업이다. 

이 중에서 이덕구와 동선이 겹치는 인물이 이치업이다. 

이치업 역시 관동군에서 복무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빨갱이로 몰리던 가혹한 시절, 후에 무장대 사령관까지 오른 인물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약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치업으로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대편에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악질 빨갱이로 몰아붙여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문상길을 중위로 진급시킨 이도 이치업 연대장이었을 것이다. 

3번 항목에 문상길을 '본부중대장'이라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이치업 재임시 이미 문상길이 중대장이었다는 것이고, 계급은 십중팔구 중위였을 것이다. 

 

물론 선임 연대장이었던 장창국이 진급을 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상길을 진급시킨 이가 장창국이라면 장창국은 갓 임관한 소위를 바로 진급시킨 셈이 된다.

납득하기 어려운 시나리오다. 

 

따라서 문상길을 진급시킨 이는 이치업 연대장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문상길이 제주에 부임한 이후 가장 오랜 시간동안 함께한 연대장도 이치업이니 가능성은 더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치업이 문상길을 진급시켰다면 문상길을 악마로 몰아 자신을 선의의 피해자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은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다. 


3. 어쩌면 그는

 

문상길 중위는 과연 어떤 청년이었을까?

 

김익렬 연대장이 남긴 기록에는 문상길 중위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청년 문상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다른 연대장들의 기록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문상길이 올곧은 사람이었음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산산조각 나버린 기억들.

대부분은 사라져버린 기억과 기록들. 

그것만으로 청년 문상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추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그 산산조각 나버린 기억 중 문상길과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을 사람들이 남긴, 먼지 한톨 같은 증언을 여기 공유하고자 한다. 

 

문상길 중위는 미남형으로 제식훈련도 잘 시켰고 

절도 있는 태도 때문에 부하들도 잘 따랐다.
그는 그 무렵 서귀포 처녀와 열애에 빠졌다. 

그의 연애 소식은 부대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출처 : 4.3은 말한다 3권, 당시 9연대 병사 강덕윤 씨 진술)

 

그래도 그때까지는 문 소위가, 그 때는 "문 소위, 문 소위" 하더구먼.

을 사람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좋았어. 
(출처 : 이제사 말햄수다 1권, 이운방 씨 진술)

 

 

이 두 개 진술이 내가 문상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미소지을 수 있었던 유이한 기록이었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내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생각은 이거였다. 

 

그는 혹시 셀럽 아니었을까?

 

지금도 불현듯 이 생각이 떠오르면 가슴이 아려온다.

역사적 사건과 이런저런 평가가 두껍게 그를 내리누르고 있지만 

때로는 나라를 걱정할 줄도 알고, 때로는 사랑을 꿈꾸기도 한,

청년 문상길은 오늘날에도 길을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비교적 세련됐지만 크게 다를 바 없는 보통의 20대 청년 아니었을까?

 

시대의 한계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모든 청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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