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끄저기/4.3의 사람들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3. 증언과 족보 비교

다락방별지기 2025. 4. 1. 16:16

중평리에 나가 문중 어르신과 함께 할 저녁식사 거리로 안동찜닭을 포장해왔다.

찜닭이 참 맛있었다. 

포장을 기다리는 동안 아주머니는 계속 걸려 오는 주문 전화에 대응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포장을 하고 나올 때 아주머니께서 서울에서 온 거냐고 물어보셨다.

그렇다고 하니 당신도 서울에서 오셨다며 반가와 하셨다. 

내가 서울에서 온 건 말투를 듣고 아셨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안동은 그동안 말로만 듣던 경북 사투리가 살아 있었다. 

 

찜닭 덕분에 푸짐해진 저녁식사를 문중 어르신과 함께 하고 족보를 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사진 1 문상길 중위를 재발견하게 해준 남평문씨대동보 제6권.
족보만큼 이 세상에 쓸모없는게 있으랴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건 가문이 아닌 본인이 가지고 있는 공감능력의 크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렇게 족보를 유지하고 계시는 분들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 족보의 진정한 기능은 단순한 가문의 기록이 아닌 역사와 이야기의 기록이라는 생각도 하게 됐다.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문상길 중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진 2 족보에 새겨져 있는 문상길 중위의 기록
왼쪽은 문상길의 백부(종손)와 종가집 큰 형님의 기록이 있고, 오른쪽은 그 다음 장으로서 문상길 중위가 등장하는 부분이다. 

 

1 문상길 중위의 조부까지는 남평문씨 순질공파의 종가댁이었다. 
2 문상길 중위의 부친 성함은 문 원자 제자 어르신이며 종손인 문 제자 현자 어르신의 둘째 아들이시다. 
3 문상길 중위는 장남으로 1926년 9월 8일 생이며 을유년(1945) 2월 25일 국군장교로서 사변순직하신 것으로 나온다. 
4 문상길 중위의 백부이신 문 원자 호자 어르신은 종손이며 이 분의 기록에 만주 이주 기록이 있다. 
때는 갑술년(1934) 4월이며, 만주 목단강성 해림으로 이주하셨다. 
5 문 원자 호자 어르신의 아드님이신 문 상자 익자 어르신 항목에도 만주 이주 기록이 있다. 
가족 모두가 만주에 갔으며 이로부터 10년 후 종부이신 철성이씨께서 아들 도주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6 문상길 중위에게는 아내분이 계셨다. 전주 유씨라는 이 분은 문상길 중위보다는 1년 후인 1927년 생이시며 1985년 8월 15일 돌아가셨다. 
7 문상길 중위에게는 양자가 있다. 양자는 종가집 막내 아들인 문 영자 주자 분이다. 

 

이상이 족보에 기록된 내용이다. 

 

족보의 내용으로는 문상길 중위가 만주로 이주하였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종가댁이 이주를 했다는 1934년은 문상길 중위의 나이가 고작 아홉 살이고, 부친의 묘가 만주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문상길 중위 역시 그때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는 족보의 내용일 뿐이고, 문중 어르신의 증언과 차이가 있는 부분이 많았다. 

차이가 나는 부분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증    언 일치여부 족    보
1 문상길의 부친은 종손 불일치 문상길의 부친은 둘째아들
2 문상길은 4남 중 막내아들인데 숙부 댁에 양자로 갔다.  불일치 문상길은 장남
3 문상길은 해방 후(1945년) 귀향했다. 불일치 만주 이주 후 10년 후(1944년) 문상길의 형수와 조카가 고향을 찾아왔다.
4 박진경 암살 사건으로 총살 불일치 1945년 2월 25일 국군장교사변순직

 

4번 항목은 역사적 사실이므로 증언이 확실히 맞다고 단정할 수 있다.  

족보상 사망 기록은 족보가 정리될 때, 불미스러운 사건을 숨기기 위한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다. 

 

1번과 2번 항목, 즉, 문상길이 종가집 막내아들이라는 항목도 내 생각으로는 족보보다 증언이 더 믿을만하다고 생각한다. 

 

증언의 일관성 때문이다. 

 

증언을 하신 어르신은 30대이시던 1980년대에 문중의 이런저런 일을 챙기는 유사셨다고 한다. 

그때는 아직 한중수교가 되기 전인데 해림에 계신 조카가 공무 상의 일로 한국에 찾아오셨고 이때 어르신 댁에 머무셨다고 한다. 

이때 찾아온 분은 종손 댁 4형제 중 셋째 분의 아들이셨다고 한다. 

 

이 부분은 이날 어르신으로부터 들은 내용 중 여러 번 반복이 되었고, 어르신 역시 대화를 계속하면 할 수록 기억이 확실하다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한중 수교가 된 이후 해림에 계시던 종부께서 안동을 방문하셨다고 한다. 

어르신께서는 1980년대 후반으로 기억하시지만, 한중수교가 1992년에 되었으니 그 이후일 것이다. 

이때 오셔서 종가댁에 귀속되어 있는 땅을 처분하여 그 돈을 드렸다는 증언이 있었다. 

1992년 즈음이면 시기 상으로 멀지 않고 무엇보다도 돈이 개입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만큼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즈음 종부댁 일가가 안동에 방문했다는 부분은 족보 내용이 업데이트 된 시기와도 일치한다.

 

안동에 다녀온 이후 나는 서울 광진구에 있는 남평문씨종친회에 방문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때 즈음에 한차례 족보 내용이 보강되었다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종가댁 4형제 중 왜 둘째와 셋째 기록이 없는지에 대한 단서도 들을 수 있었다.  

 

족보란 원래 자신을 기준으로 윗대에 대해 작성하는 것이 원칙인데 구한말과 일제시대 때 들어 자신을 기준으로 아랫대 정보도 기록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자식 정보를 기록할 때, 그 정보가 일제에 정보를 주는 수가 있어, 정보를 숨겨야 하는 경우, 특히 독립운동에 가담한 경우 일부러 자식 정보를 쓰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는 것이다. 


사진 3
족보 기록에 대한 이런저런 궁금증으로 남평문씨대종회에 찾아갔다. 
문상길이라는 특정 인물 문중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들을 수 없었으나 족보 정리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이 의견으로 문상길의 두 분 큰 아버지가 모두 독립운동가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전체적인 내용을 관통하는 일관성은 있다. 

 

안상학 시인께서는 문상길 중위의 큰형수이자 종부이신 철성 이씨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내시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신 석주 이상룡 선생님의 일가이신 점을 들어 두 가문이 혼맥으로 얽혀 있을 뿐 아니라, 독립 운동에 투신한 가문임을 강조하셨다. 

그렇다면 4형제 중 누구든 독립운동에 투신했을 것이라는 개연성이 높아진다. 

뿐만아니라, 그런 문중의 영향을 받았다면 어린 문상길이 군인으로 투신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3번 항목, 해방 후 귀향시기의 차이는 고작 1년 밖에 되지 않지만 미묘한 차이를 가진 항목이다. 

문상길이 일본군으로 복무한 적이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해 보는 척도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우측에서 발간한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2024)>이라는 책에는 문상길이 일본군 부사관 출신이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기록은 근거가 없다. 

책에는 그 출처가 <청년생활>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청년생활>에는 문상길이 일본군 부사관 출신이라는 내용은 일체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기록의 차이는 그 개연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극우측 책은 어떻게든 문상길을 깎아내려야 하는 책이다. 

문상길이 일본군에 복무한 경험이 있다면, 적당하게 친일파 냄새를 묻힐 수 있으니 이는 적극 공개해야 하는 내용이 된다. 

극좌측 책은 어떻게든 문상길을 띄워올려야 하는 책이다. 

그렇다면 문상길이 일본군에 복무한 경험을 구태여 기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문상길 중위가 해방 전 일본군으로 복무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본다. 

전반적인 흐름의 일관성 때문이다. 

 

해방 이후 전국 각지에는 사설 군사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는데 문상길이 그 중 하나인 국군준비대에 입대했다는 기록이 <청년생활>에 등장한다. 

내가 <청년생활>에 등장하는 내용을 대체로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문상길 중위가 국군준비대에 입대했다는 기록을 신빙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는, 이 내용이 대구 6연대 입대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국군준비대는 해방이후 조직된 사설 군사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큰 군사단체였고, 마찬가지로 건국의 부푼 꿈을 안고 전국 각지에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국군준비대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움직였던 군사단체였는지를 증언하는 내용이 극우측 입장을 대변하는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한국전쟁사 제1권>에도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남지구 국군준비대장은 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의 군사고문을 하였던 오덕준이었으며 

그는 대원 700명으로 하여금 부산지구 일본수비대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등 

경찰력이 무력하였던 당시에 있어서 이들 국군준비대의 활동은 볼만했다. 

<한국전쟁사 제1권 252p>

 

1946년 1월 15일, 미 군정은 '국방경비대'라는 정식 군사단체를 출범시키며 우선 서울에 제1연대를 창설하고 1월 20일에는 모든 사설 군사단체의 해산을 명령했다.

 

대구에 제6연대가 창설된 것은 1946년 2월 18일이었다. 

이 대구 6연대에 대구지역 국군준비대가 그대로 이식되었다는 것은 <한국전쟁사>와 <창군>같은 당시 대한민국 육군의 역사를 다룬 여러 책에서 확인된다. 

 

즉, 문상길 중위가 '국군준비대'라는 사설 군사단체에 몸담고 있었다면 대구 6연대 군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국군준비대는  '해방과 함께 일군 각 부대에서 돌아온 장병들이 모여서 귀환장병대라는 명칭하에 교동국민학교에서 발족(1945년 8월 17일)'했다는 기록이 <한국전쟁사>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문상길 중위 역시 일본군 각 부대에서 돌아온 귀환장병으로서 국군준비대에 입대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럴 경우 문상길 중위가 돌아온 년도는 1944년이 아니라 1945년, 즉, 일제 패망 후 돌아온 것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가정은 여러 혼란스러운 증언을 매조지하는데도 유익하게 활용될 수 있다. 

 

첫째, 앞서 문상길 중위의 둘째형과 셋째형이 족보에 등장하지 않는 가능성으로 두 분이 독립운동에 가담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들었다. 이는 반대로 문상길 중위가 족보에 남아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즉, 문상길 중위가 일제에 의해 징병되었다면 족보에서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문상길 중위의 나이로 보아, 그리고 만주 해림이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 통치하에 있었던 기록으로 보아 문상길 중위가 일본군에 징집되었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둘째, 1944년도 귀향 가능성은 전적으로 족보 상 기록 때문인데 문상길이 이때 함께 귀향했다면 귀향 내용이 종부인 철성 이씨 항목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상하다.

 

셋째, 문상길 중위가 일제에 징집되었다고 가정하면 문상길 중위가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즉, 일본군에 징집되어 가족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 일본 패망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38선이 막히면서 만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가정할 수도 있고, 군인에 투신한 몸으로 곧 통일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만주)귀향을 늦추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내용이 보다 확실하려면 문상길이 진짜 일본군에 복무했는지, 복무했다면 어느 지역에서 복무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숙제가 있다. 

 

다만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일본군 복무가 친일파의 근거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번에 자료를 찾으면서 일본군 복무 여부로 친일파인지 여부를 해석하는데 여러 편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
복무 유형
내용 및 대표적 인물 친일파
가능성 
일본군 육사
출신
지원입대
일본군 육군 사관학교에서 임관한 경우.
대부분 사관학교 입학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경우. 
이형근, 채병덕, 유재흥, 장창국(제주 9연대 1대 연대장), 오일균 등
가능성 높음
일본군 지원병
출신
지원입대
1938년 일본의 '육군특별지원병령'에 따라 보통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17세 이상 조선인 남자에 대해 군 지원을 받음. 
이 기간에 일본군에 자원 입대한 경우.
4.3 유혈진압의 당사자인 송요찬, 함병선 등
가능성 높음
일본군 학도병
출신
강제입대
군 징병 가능자이지만 지원하지 않는 조선인 남자를 대상으로 1944년 4월 1일부터 강제 징병 검사가 실시되었으며 9월 1일부터 강제 입대 시작됨. 
일본 점령지 전역에서 존재하며 학력에 따라 장교, 하사관, 사병 등 다양하게 분포함. 
사상 스펙트럼이 다양하여 국방경비대 창설 초기 좌익 군인들은 대부분 일본군 학도병 출신이었음. 
제주 9연대 2대 연대장 이치업, 3대 연대장 김익렬, 4대 연대장 박진경 등이 해당
가능성 낮음
만주군
출신
지원입대
일본군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군간부 출신. 
일본군 육군 사관학교에 비해 입학조건이 까다롭지 않아 우회경로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음.
문용채(4.3당시 제주 감찰국장), 백선엽, 박정희 등
가능성 높음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친일파 가능성에 여러 편차가 존재했다. 

문상길이 일본군에 징집되었다면 세 번째 사례, 즉 학도병 출신에 해당한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문상길 중위가 제주에 부임하기 전까지 행적을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연월 문상길
나이
주요 행적 출처
1926년
9월 8일
  문상길 중위 남평문씨 순질공파 종갓집에서 4남 중 막내로 출생 증언
1934년
4월
9 일가가 모두 만주 해림으로 이주  남평문씨 족보
1943년
4월 18일
18 친모 안동권씨 사망 남평문씨 족보
1944년
3월 6일
19 친부 사망 남평문씨 족보
1944년
9월 즈음
19 문상길 일본군 강제 징병 추정
1944년
10월 5일
19 문상길의 큰형수 일가 경북 안동으로 귀향 남평문씨 족보
1945년
8월 15일
20 일본 패망 역사 기록
1945년
8월 15일
이후
20 문상길 안동으로 귀향 추정
1945년
8월 30일
20 국군준비대 창설 역사 기록
1945년
9월 이후
20 문상길 국군 준비대 입대 청년생활
연월은 추정
1946년
1월 20일
21 미군정 사설 군사단체 해산 명령에 따라 국군준비대 해산 역사 기록
1946년
2월 18일
21 대구6연대 창설 역사 기록
1946년
2월 18일
즈음
21 문상길 대구6연대 입대 청년생활
연월은 추정
1946년
12월 14일
이후
21 대구6연대장 문상길을 우수 하사관으로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입학 추천 추정
1947년
1월 13일
22 문상길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3기 입교 역사 기록
1947년
4월 19일
22 문상길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3기 수료, 소위 임관 역사 기록
1947년
4월 19일
이후
22 초임 소위 문상길이 어떤 사고를 저질러 영창 입감.
문중의 고위직이 개입, 남들은 꺼려하는 제주에 부임하는 조건으로 빼내 줌.
추정
1947년
5월 즈음
22 문상길 제주 부임 추정

 

일단 이렇게 표를 정리해 보았다. 

표를 정리하면서 느낀 점은 '허술하기 이를데 없다'는 것이다. 

피해갈 수 없는 지점이 있고, 간과하면 안 될 부분이 있다. 

결국 이 표를 완성하려면 중국 해림에 계시다는 문상길 중위 친척들을 뵙고 증언을 들어야 한다. 

과연 가능할지, 언제 가능할지 막막한 부분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나아가려면 발판이 있어야 한다. 

허술하기 이를데 없는 표이지만 이것이 발판이 되어 모쪼록 내 뇌리에 깊은 자국을 만들어낸 청년 문상길의 발자취를 추적해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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