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끄저기/4.3의 사람들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1. 어린 시절 뛰놀았을 마을길

다락방별지기 2025. 3. 25. 16:33


사진 1 문상길 중위 생가 터.
안동시 임동면 마령리 대곡천 건너 수몰지구에 위치한다. 
다행히 갈수기여서 한때 남평문씨 집성촌이었던 생가 터에 갈 수 있었다. 
비석은 민속자료 제69호 기와까치구멍집 터임을 알리는 비석이다. 

 

그가 떠나고 7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를 경험으로 기억했을 사람들도 거의 다 세상을 뜨셨다.

그나마 건너들은 이야기조차도 희미하게 기억하는 극소수의 어르신이 남았다. 

 

그 중의 한 분을 뵈러 안동을 향했다. 

 

궁금한 게 있었다. 

청년 문상길이 나고 자라 운명의 땅 제주도를 향하기 전, 그가 겪었던 어떤 사건이 궁금했다. 

 

1926년(병인년) 9월 8일.

문상길이 태어난 날이다. 

족보에 새겨진 날이니 아마 음력일 것이다. 

양력으로 변환하면 1926년 10월 14일 목요일이다. 

 

문상길이 태어나고 해방이 될 때인 1945년까지의 흔적은 두 개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사진 2, 3
1945년 이전 문상길 중위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두 책.
왼쪽 책은 <안동형무소 터 순례 및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라는 책이고 오른쪽 책은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이라는 책이다. 두 책 모두 국회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 
<안동형무소...>는 2022년 12월에 발행된 답사기로서 책을 발행한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는 2022년부터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문상길 중위 총살 집행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아홉 분 군인의 진혼제를 진행하고 있는 단체이다. 
<제주 4.3 사건과...>는 문상길 중위의 진혼제 봉행을 비난하며 박진경 대령 암살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목적으로 2024년 7월에 발행된 책이다. 
책의 발행 목적에서 알 수 있듯, 하나의 사건을 완전 반대로 평가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책들이다. 

 

하지만 좀 더 확인한 결과 두 책 모두 하나의 소스를 원천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바로 1950년 1월 북한에서 발행한 <청년생활>이라는 월간잡지였다. 


사진 4
1950년 1월 10일, 북조선 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회가 발행한 기관잡지 <청년생활> 1월호.
현재까지 조사해 본 바로는 1945년 이전 문상길 중위의 약력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이 책이 유일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온라인 파일로 열람이 가능하다. 

 

자료를 찾아보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다. 

바로 극우측 주장과 극좌측 주장에 동일한 패턴이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진 2, 3, 4의 책을 극좌 / 중도 / 극우 라는 프래임으로 나열해 본다면 아래와 같이 나열해 볼 수 있다.

 

극좌측 책 중도 책 극우측 책


 

극좌측 책과 극우측 책의 공통점은 바로 '사실'보다는 '방향'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극좌측 책의 경우 문상길은 탁월한 사상과 행동력을 가진 영웅이어야 한다는 방향성이 있다.  

1950년 1월이면 김일성은 이미 남침을 결정하고 착착 전쟁준비에 몰두할 때였다. 

당연 전쟁을 수행해야 할 젊은 청년들이 총알받이가 되는데 주저함이 없도록 모범사례를 조작하여 주입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극우측 책의 경우 2003년 발행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쓴 책이다.

당연 이 사건으로 인해 고통받아야 했던 사람의 아픔보다는 빨갱이 처단의 역사가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쓴 책이며, 따라서 4.3은 남로당 빨갱이들이 일으킨 폭동이어야 하고, 박진경은 구국의 영웅이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진 책이다.  

당연히 박진경을 처단한 문상길은 간악한 남로당 끄나풀로 평가하고 있다. 

 

극좌나 극우에 언제 사람이 설 자리가 있었던가?

그 둘은 가만 보면 너무나 똑같다. 

사람은 온데간데 없고, 당위와 주장과 악다구니가 난무한다.

문상길의 흔적을 쫓아가며 시종일관 만나야 했던 장면이다. 

 

당연히 극우나 극좌 책을 볼때는 어디까지가 사실일지 어디까지가 소설일지를 잘 구분해서 봐야 한다. 

왼쪽 책의 경우 1950년에 만들어진 책이다보니 사실에서 '소설'을 구분하기가 쉽다. 

당시는 선동과 조작이 쉽게 먹히던 시절 아니었겠는가?

 

오른쪽 책의 경우 '사실'에서 '소설'을 구분하기가 약간 까다롭다.

나름 주석도 충실하다. 

하지만 약간만 신경 써서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가 얼마나 빈약한지 금방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뤄볼 생각이다. 

 

어쨌든 가장 먼저 발행된 북한의 잡지 <청년생활>에 아주 중요한 문구가 하나 나온다. 

바로 이 문구이다. 

 

애국청년 문상길동무는 경북 안동에 본적지를 둔...

 

청년생활 31페이지 마지막에 등장하는 바로 이 문구에서 시작하여 문상길의 생가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과정이 내가 '중도 책'이라고 평가한  <안동형무소 터 순례 및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에 등장한다. 

 

그 여정을 밟아나간 주인공이 바로 안상학 시인이시다. 

 



사진 5. 대곡리 굴참나무와 안상학 선생님
안동 답사 중 잠깐 시간이 남는 틈에 안 선생님께서 천연기념물 288호, 대곡리 굴참나무를 소개해 주셨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한 번은 안상학 선생님께서 4.3문학상 심사차 제주도를 가셨다고 한다.

4.3 70주년 즈음으로 기억하신단다. 

 

뒤풀이 자리에서 4.3연구소 이규배 이사장님이 문상길 중위가 안동 사람이라고 하는데 안동 사람인 안상학 시인께서 문상길에 대해 알아봐 줄 수 있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안 선생님께서는 그때 문상길 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으셨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낯설게 들리지 않았다고 하시는데 그 이유는 안동의 동창들 중에 문 상자 항렬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씨와 돌림자 만으로 대충의 항렬이 계산되는 곳. 

안동은 그럴 정도로 씨족사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곳이었다. 

 

안동으로 돌아온 후 안 선생님께서는 문씨들을 수소문하셨고, 마침내는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동네 집안 어르신을 만날 수 있었고, 족보를 뒤져보다가 문상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셨다는 것이다. 

 


사진 6
남평문씨대동보 6권, 순질공파 35세 항목에 등장하는 문상길.
병인년(1926년) 9월 8일생, 을유년(1945년) 2월 25일 국군장교사변순직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이 약간 비틀어져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숨길 게 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아내 되시는 분이 있었다. 배(配)라는 한자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족보가 정리되는 시점에는 이미 작고하셨음을 알 수 있다. 
정묘년 생이시라면 문상길 중위보다 1년 뒤인 1927년에 태어나셨던 것이고 을축년 돌아가셨다면 1985년에 돌아가신 것이다. 
아내분의 무덤은 만주에 있다. 문상길 중위 장인의 이름은 유진하이다. 
이상이 문상길 중위 항목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역사에서 잊혀진 인물이었던 청년 문상길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안동에서 문씨 댁 어르신을 만나뵙기 전에 안 선생님의 배려로 바닥이 드러난 임하댐 수몰지구 남평문씨 집성촌 흔적을 찾아갈 수 있었다. 


사진 7
935번 지방국도 한 켠에 차를 세워두고 안 선생님을 따라 바닥이 드러난 대곡천으로 향했다.

 


사진 8 수몰된 문씨 집성촌으로 들어가는 대곡천 다리. 
안 선생님께서 3년 전에 이곳을 찾으셨을 때는 문제 없었다는 다리가 들고나는 물을 견디지 못해 결국 끊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마른 하천 바닥을 찾아 건너야 했다. 

 


사진 9  마을로 들어서는 길
임하댐 공사로 수몰지구로 지정된 마을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온 건 1988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 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 대곡천 다리를 건너 왕래했을 것이다. 
수많은 아이들이 대곡천을 향해 내달리며 뛰어놀았을 것이다. 
그 중엔 어린시절의 문상길도 있었겠지. 
시대의 질곡을 짊어질 수 밖에 없었던 그 시절 수많은 영혼들....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다. 

 


사진 10
해발 350미터의 나즈막한 산 아래 안온하게 자리잡은 집터.
인터넷 항공사진에서도 윤곽이 훤히 들어날 만큼 선명하게 남은 집터이다. 
깨진 기와 파편을 비롯해서 아직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널려 있다. 

 

안 선생님께서 3년 전 오셨을 때 종가댁 터에 비석을 세워두셨다면서 비석을 찾아보자고 하셨다. 

 

물 힘이 생각보다 센데...

대곡천 무너진 다리에 어디선가 쓸려왔을 나무둥치도 걸려 있을 정도인데 비석이 남아 있을까?

 

폐허가 된 돌무더기에서 비석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돌무더기 한 가운대에서 뭔가 직선을 가진 실루엣이 눈에 띠었다. 

문제의 비석을 찾은 것이다. 

 


사진 11
안상학 선생님과 함께 쓰러져 있던 비석을 세우고 먼지와 진흙을 털어내, 이곳이 남평문씨 종가댁, 문상길 중위의 생가터임을 다시금 알렸다. 

 

안 선생님과 함께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길을 되짚어 나왔다. 

비석을 다시 세운 공덕을 들여서인지 멀리서도 눈에띠는 비석이 맘에 들게 눈에 들어왔다.

 

비석은 기와까치구멍집이라는 민속자료 제69호의 터임을 알리는 비석이었다. 

 

인물을 기억하려는 것이 아닌, 고택이라는 민속자료를 기억하기 위한 비석이다. 

안 선생님께서는 이를 통해 뜻밖에 이곳이 수몰되기 전 남평문씨 종가댁이 그대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다. 

즉, 문상길 중위의 생가가 지금도 남아 있다는 뜻이다. 

 

문상길 중위를 기억하는 집성촌 어르신들, 

문상길 중위가 기록된 족보에 이어

문상길 중위가 태어났을 그 집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안동마령동기와까치구멍집이라는 이름으로 시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그 고택은 안동시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경북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156-1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사진 12 안동시 검암리로 이전, 복원되어 있는 남평문씨 종가댁 기와까치구멍집.
사진은 2024년 9월 30일 답사 때 찍은 것이다. 

 

사실 나는 작년 9월에 이미 기와까치구멍집 답사를 다녀왔었다. 

그때는 문상길이라는 청년에 대해 잘 모르고, 이제 막 그의 흔적을 찾기 시작할 때였다. 

 

하지만 이 집을 찾기까지의 과정을 재구성하는 지금, 이 집을 찾았을 때 안상학 선생님의 감동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감동은 안 선생님이 쓰신 기와까치구멍집이라는 시에 그대로 담겨 있다. 

 

 

기와까치구멍집

 

내가 한 일은 다만

1948년 그 사내가 안동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

 

제주 도민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지휘관을 암살한,

국군이 국민에게 결코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던

대한민국 제1호 사형수 문상길 중위

고향이 어디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향년 스물셋 사내, 고향은 안동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내력을 찾아낸 것

 

임하댐 수몰된 안동 마령리 이식골

남평 문씨 종갓집 막내아들, 그 사내가 살던 곳

그 사내가 떠난 곳,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곳

사내처럼 사라진 마을, 흉흉한 소문 떠도는

쉬쉬대며 살아온 일가붙이들 산기슭에 남은 곳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사진 몇 장 찾은 것

소년처럼 해맑은 사내의 마지막 웃음

두 손 철사로 묶인 채 나무 기둥에 결박당한 몸

가슴에는 휘장 대신 표적, 흑백사진 붉은 피는

두 눈 가린 채 목이 꺾인 사내의 최후 진술;

내 비록 미군정 인간의 법정에서는 사형을 받고 사라지나

공평한 하늘나라 법정에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다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가 살던 집을 찾아낸 것

 

당당하게 살아남은 그 사내의 흔적

300년 문화재 기와 까치구멍집 건재한 사내의 생가

수몰을 피해 남후면 검암리로 옮겨 앉은 남평 문씨 종가

그를 기다린 40년 고향을 뒤로하고

1988년 옮겨 앉은 낯선 땅 32년, 기다리고 기다린

72년 만에야 불귀 주인 소식 전해들은 까치구멍집 

 

무자년 사내가 가고 72년 만에 내가 한 일은 다만 그의 흔적을 찾은 것일 뿐, 고작 대문간에 막걸리 한 잔 올리고 그의 죽음을 전하는 일이었을 뿐, 그사이 하늘나라 법정에서 받아놓았을 그 사내의 판결문을 이 집 우체통에 전해주는 일은 그날 이후 남겨진 모든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음복주를 마셨다. 경자년 경칩 무렵, 복수초가 까치구멍집 화단에 피어 있는 날이었다. 

 

- 출처 : 걷는사람 시인선 27,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안상학 - 

 

 

이제 문씨 댁 어르신 만나뵈러 가야지. 

내가 준비해 온 그 의문점을 풀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안 선생님 막걸리 한 잔 대접해 드릴 겸,

저녁에 만날 어르신 저녁 식사거리를 마련할 겸,

가게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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