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 1 : 제9연대 병사들의 기념 촬영 (KBS제주 다큐멘터리 암살 1948에서 인용) 신생국가의 간성이라는 사명감으로 입대한 9연대 병사들은 자기 고장 주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만다. |
1948년 5월 20일 밤,
모슬포 주둔 9연대에서 하사관 11명이 포함된 41명의 병력이 집단 탈영한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탈영병들은 개인병기와 장비, 실탄 5,600발을 소지한 채 연대에서 하나 뿐이었던 트럭을 가지고 탈영했다.
탈영한 이들은 밤 11시 30분 경, 대정면 보성리 소재 대정지서를 습격해 경찰관 4명과 급사 1명을 사살했다.
이후 서귀포 경찰서로 이동하여 자신들을 토벌 작전 중인 부대라고 속여 트럭 1대를 지원받았다.
그들은 이 차를 이용하여 남원면 신례리 방면으로 입산, 무장대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틀 후인 5월 22일, 탈영병 중 20명이 대정에서 체포되었고, 소총 19정과 실탄 3,500발이 회수되었다.
1948년 5월 20일 밤에 발생한 9연대 집단 탈영 사건은 4.3사건 와중에 문상길 중위의 이름이 전면에 등장하는 두 번째 사건이다.
사건이 발생한 날, 문상길 중위는 당직사령이었다.
즉, 그날 밤 부대를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고 따라서 탈영 사건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5월 20일 밤, 문상길 중위가 맞닥뜨려야 했던 집단 탈영 사건의 전모를 하나하나 추적해보자.
9연대 분위기 변화
무장봉기가 발생한 1948년 4월 3일, 9연대의 연대장은 김익렬 중령이었다.
김익렬 중령은 4.3무장봉기를 치안상황으로 판단했다.
당시 국방경비대 사령부인 통위부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익렬 장군 실록 유고>에 기록된 당시 통위부의 지침은 다음과 같다.
제주도 폭동사건은 치안상황이며
경찰의 책임상황이므로
상부 명령 없이는 절대로 행동하지 말 것이며,
경비대는 장차 국군의 모체가 될 것인 만큼
국민 신망과 존경을 받도록 하여야 하며,
9연대의 행동은 장차 경비대의 운명을 좌우할 문제이니
연대장이 경솔한 판단이나
개인적인 영웅심이나 공명심으로
경거망동을 하지 않도록 엄중히 금하며,
명령 없이 행동하면 엄벌에 처할 것이므로
부대단결과 훈련이나 잘하라.
하지만 4.3초반의 이러한 분위기는 경비대가 어떤 형태로든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변해갔다.
가장 큰 문제는 경찰의 무능이었다.
4.3무장봉기 이틀 후인 4월 5일, 경찰은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전남응원경찰 100명과 국립경찰전문학교 간부후보생 100명을 충원받는 등 나름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의 잘못된 인식이었다.
4.3발생 일 년 전인 3.1절 발포사건 당시 제주도를 방문한 조병옥 경무부장이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며 조선의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 버릴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한 이래 경찰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낙인 찍었다.
이러한 잘못된 판단은 사태를 진정시키기는 커녕 악화로만 몰고갔다.
4.3무장 봉기 당일을 빼고 4월 17일까지 경찰과 무장대 각 2명씩, 4명이 사망하였고, 17명 이상의 민간인이 경찰과 무장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 기간 중 경찰과 무장대의 대규모 교전이 한 차례 있었고 무장대 다수가 사살되거나 생포되는 전과도 있었으나(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음) 대부분의 경우 무장대의 게릴라전에 밀린 경찰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면서 무장대의 무장을 도와주는 꼴이 되었다.
미군정 경찰고문관 레스터 코퍼닝은 '제주도 지역주민들이 경찰을 경원시하고, 무장대의 집중적인 공격표적이 되고 있으며 경찰은 대부분이 신경질적이고 신경과민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을 담은 <제주도의 치안상태>라는 보고문을 작성할 정도였다.
(보고일 : 1948년 4월 19일)
도민 전체를 빨갱이로 몰아 적으로 돌린데 대한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1948년 4월 17일,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는 김익렬 연대장에게 경찰과 협력하여 진압작전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명령의 연장선상으로 4월 20일에는 부산에 있는 5연대 1개 대대(대대장 오일균)가 제주에 내도했다.
무기와 탄약이 부족하고 무엇보다 훈련도 부족한 9연대에 일종의 응원부대가 충원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방경비대가 바로 무력진압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 이튿날인 4월 18일, 딘 군정장관은 맨스필드 중령을 통해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할 것을 지시했다.
김익렬 연대장은 4월 20일, 제주시내에서 지방유지들을 만나 협조를 부탁하는 것을 시작으로 무장대와의 평화교섭 작업에 착수했다.
1948년 4월 28일,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사령관 김달삼이 한 자리에 앉은 역사적인 평화회담은 이러한 맥락에서 진행된 것이다.
하지만 평화는 잠시 뿐이었다.
배후가 경찰로 의심되는 방해공작이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평화회담이 미군정이 추진한 '선선무 후토벌'의 한 과정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1948년 5월 6일, 9연대장이 박진경으로 교체되면서 토벌이 본격화되었다.
5.10선거를 밀어붙이고 한반도에서 빨리 손을 떼고자 했던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박진경 연대장은 우선 5.10선거에서 각 투표소의 치안을 유지하는데 9연대 병력을 활용했다.
하지만 남한에서 유이하게 제주에서만 2개 선거구가 투표율이 미달하는 초라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후 박진경 연대장은 토벌작전을 본격화했다.
5월 12일에는 제주읍 오등마을을 습격하여 마을 주민 193명을 체포했다.
5월 14일에는 경찰과 함께 한림지서를 공격한 무장대를 추격하는데 참여했다.
5월 16일에는 오등리와 오라리를 습격하여 1명을 사살하고 166명을 체포하였는데 이때 처음으로 이등병 한 명이 전사하는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5월 19일에는 송당리와 교래리를 토벌하면서 21명의 여자가 포함된, 약 200여 명을 포로로 체포했다.
또한 박진경 연대장은 2차에 걸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계획하였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도를 동에서 서로 훑으며 소탕하는 작전으로서 1차 작전은 5월 28일에서 6월 4일, 2차 작전은 6월 14일에서 17일까지로 계획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전과 계획이 제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눌 일이 있을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입대한 병사들의 동요를 가져왔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더더군다나 9연대 병사 대부분은 같은 제주도민으로서의 친밀감과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9연대 병사들의 집단 탈영 사건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사건의 한복판
5월 20일 집단 탈영의 개요는 앞서 살펴 본 바와 같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에서 문상길 중위가 서 있던 지점이다.
과연 문상길 중위가 집단 탈영을 주도한 것일까?
문상길 중위가 이 사건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쪽은 극좌 측 자료이다.
극우측에서 집단 탈영사건의 진범이 문상길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아이러니하게도 극좌 측 자료를 근거로 한다.
그럼 극좌 측이 이 집단 탈영 사건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5월 20일 문소위 지시에 의하여 9연대 병졸 최상사이하 43명이 각각 99식총 1정을 가지고 탄환 14,000발을 트럭에 실어 탈출, 도중 대정지서를 습격, 개 4명, 급사 1명을 즉사시키고 지서장에게 부상시킨 후 서귀포 경유 상산하려고 했으나 그 연락이 안되어 결국 22명은 피검, 탄환 다수 분실 혹은 압수 당하고 겨우 4, 5일 후에야 나머지 21명이 아 부대와 연락되었음(이 때에는 각각 99식총 1정과 99식 탄환 100발식 만이 남아 있었음). 이 때 연락이 안된 원인은 문소위가 우리에게 보낸 연락 방법과 탈출병들이 연락한 연락 방법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든 것에 기인한다. |
기록 1 : 무장대 노획문서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발췌 |
문동무는 유격대를 직접 원조하기 위하여 5월 20일 오후 12시를 기하여 자기가 신뢰할 수 있는 부하 1개 소대를 탈주시켰다. 이 탈주병들은 문동무의 지시를 충실히 실천하였으며 탈주하기 전에 대정 경찰지서를 급습하여 반동경관 6명을 처단하고 지소건물을 소각한 후 대량의 무기를 휴대하고 한라산에 올라가 유격대와 합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중 일부 병사들이 탈주도중에 놈들에게 피검되어 놈들의 소위 '준 전시군법'에 의하여 6명이 총살형 언도를 받게 되자 문동무의 불꽃같이 솟아오르는 의분은 이 이상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 살인마 박진경을 처단하여 치우기로 굳게 결심하였던 것이다. |
기록 2 : 청년생활 1950년 1월호 <청년생활>은 1950년 1월 10일, 북조선 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회가 발행한 기관잡지임 |
특히 애국적이고 인민적인 문상길 중대는 인민의 원수들을 쳐부수려 유격대와 긴밀한 련계를 취해가면서 4월 27일 문상길 중대장의 지휘 하에 근 100여 명의 애국 병사들은 군기고(대촌병사)를 헤쳐 수 많은 무기와 군수품을 트럭에 싣고 대정, 보성, 안덕, 중문, 서호, 신효, 법환 등지의 개떼 토벌군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계속 서귀토벌군에 일격을 가한 다음 적들의 아성인 제주 성내를 포위 공격하고 단번에 온 <<섬>>을 해방시키려 작정하였으나 예기치 않는 사변으로 인하여 서귀에서 그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그들은 완전 무장한 채 유격 근거지로 넘어 <<유격대>>와 함께 인민의 <<전사>>로써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유격전을 도처에서 부단히 감행하여 <<검은 무리>>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
기록 3 :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발췌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는 조총련 소속 김봉현과 김민주가 1963년 발행한 책이다. 김봉현은 오현중 역사교사 출신으로 1947년 제주 민전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가 4.3발발 직전에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김민주는 1948년 조천중학원 학생으로서 입산해 무장대에 가담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내용 중 4월 27일은 5월 20일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
극좌 측에서 기록한 탈영 사건은 이후 이 사건을 다루는 거의 모든 자료의 원형이 되었다.
내용에서 알 수 있다시피, 문상길 중위가 이 사건의 주범임을 부인할 수 없는 기록들이다.
그런데 극우 측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정부측 자료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제1권 - 해방과 건군>에는 이와는 다른 내용이 담겨 눈길을 끈다.
제1중대장 정모 대위는 중대 내의 세포인 일본군 출신과 동조대원 40여 명을 반도측으로 탈출시켰는데 이를 체포하기 위하여 2개 중대가 출동하였다. 이 공간에 다시 탈출자들은 돌아와서 탄약고를 파괴하고 탄약과 잔류병력들을 협박하여 전부 데리고 한라산으로 입산하였다. 이들은 대정면지서에 이르러 토벌차 출동하였다고 기만하여 지서원과 우익단체요원들을 집합시킨 다음 반동불순분자들이라 하면서 전부 사살하고 도주하였다. 추격부대는 이들을 포위하여 약 20명은 사살하고 나머지는 귀순하여왔다. |
기록 4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제1권 - 해방과 건군, 440p |
정부측 자료에는 문상길 중위가 아닌 엉뚱한 인물이 나온다.
바로 제1중대장 정모 대위라는 사람이다.
이에 대해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증언채록을 기반으로 1995년 발행한 <4.3은 말한다> 3권에는 '당시 9연대 출신 병사들을 많이 만나봤지만 '정모 대위'의 신원을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4.3은 말한다> 3권은 정부측 기록을 '가공의 글'이라고 평가한다.
'정모 대위'라는 인물의 정체가 확인되지 않을 뿐 아니라, '다시 탈출자들은 돌아와서 탄약고를 파괴하고 탄약과 잔류병력들을 협박하여 전부 데리고 한라산으로 입산'했다라든가, '지서원과 우익단체요원들을 집합시킨 다음 반동불순분자들이라 하면서 전부 사살'했다는 내용이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이야 어쨌든 간에, 정부 기록이 문상길 중위를 편들어주기 위해 엉뚱한 '정모 대위'를 기록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고 해서 극좌측 기록도 마냥 사실이라고 볼 수도 없다.
날짜와 숫자 등 기본적인 수치 기록이 맞지 않을 뿐더러, 지나친 과장 등, 당시 극좌 특유의 과장과 과잉이 난무하기 때문인데, 무엇보다 큰 문제는 사건 당시의 기록이라기 보다는 박진경 연대장 암살 사건 이후 영웅화라는 틀로 찍어낸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중립적 기록을 담고 있는 <4.3은 말한다> 3권에는 탈영을 이끈 지휘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당시 9연대에 복무했던 사람들의 다양한 증언이 담겨있다.
각 증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상길은 탈영병을 인솔, 대정지서 습격까지도 지휘한 뒤 부대로 되돌아와 비상을 걸었다 |
증언자 : 3중대 1소대 3분대장으로서 하사였던 강덕윤 씨 |
반면 다른 증언도 있다.
박 연대장 암살사건 직후 문상길 중위의 개입설이 나돈 것은 사실이나, 대정지서 습격까지 지휘했다는 얘기는 금시 초문이다. |
9연대 3기생 입대자 현대홍 씨 |
좀더 구체적인 증언도 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입산자의 지휘자는 광주 4연대 출신의 통신대 선임하사 최모 일등중사였다. 그는 소위 계급장으로 바꿔 달고 대정지서에 들어가 경찰관들 앞에서 장교 행세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
9연대 3기생 입대자 조팔만 씨 |
당시 문상길 중위의 행적을 담은 또다른 증언도 있다.
역시 9연대 3기생으로 입대한 김두표 씨의 증언으로서 비상나팔 소리를 듣고 연병장에 나왔을 때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당시엔 집합하면 키 순서로 집합했기 때문에 횡대로 서든 종대로 서든 늘 자기가 서는 위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다른 대원들도 자기 옆에 서야 할 사람이 없다면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날 주번사령은 문상길이었습니다. 주번사령이 미리 나와서 무슨 명령을 해야 정상인데, 그날은 우리보다 늦게 나왔고 지시도 없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하는 말이 '대정지서가 습격을 받았으니 지원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9연대 병사들은 그때야 비로소 일부 대원들이 탈영, 대정지서를 습격했구나하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3중대장 문상길 중위는 일부 병력을 차출, 직접 인솔해 대정지서로 향하였다. 나머지 대원들은 연병장에 그대로 대기하도록 했다. 당시 9연대에는 병력수송용으로 2~3톤 크기의 일제 도요타 트럭 1대뿐이었다. 탈영병들은 이 트럭을 끌고가 버렸다. 문상길 중대장과 일부 병사들은 부대에서 2km 가량 떨어진 대정지서까지 걸어서 갔다. |
9연대 3기생 입대자 김두표 씨 |
이상이 5월 20일, 9연대 집단 탈영사건에서 문상길 중위의 모습을 담고 있는 기록의 대부분이다.
같은 사건에 대해 하나같이 결이 다른 진술을 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문상길 중위는 부대원들을 탈영시킨 빨갱이 협력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오늘날 대체적으로 남겨진 단 하나의 인식은 '문상길이 부대원들을 탈영시켰다'라는 모호한 진술 뿐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와중에 중요한 질문 하나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쪽 기록을 이용하나 저쪽 기록을 이용하나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41명에서 43명까지로 추정되는 탈영 인원 중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이틀 밖에 안되어 체포되었다는 사실이다.
<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서는 22명은 피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청년생활 1950 1월호>에서는 '일부 병사들이 탈주 도중에 놈들에게 피검되어 놈들의 소위 '준 전시군법'에 의하여 6명이 총살형언도를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부측 자료인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제1권 - 해방과 건군>에는 '추격부대는 이들을 포위하여 약 20명은 사살하고 나머지는 귀순하여왔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기록 1, 2, 4의 두꺼운 글씨 참고)
탈영병 체포에 대해서는 <4.3은 말한다> 3권에도 구체적인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앞서 탈영 지휘관이 광주 4연대 출신의 통신대 선임하사 최모 일등중사라고 증언한 조팔만 씨의 증언이다.
군기대(현병대)는
잔여 9연대 장병들을 연병장에 집결시켜
붙잡아온 탈영병들을 구경시켰다.
그때에는 다른 동요가 있을까봐
9연대 병사들이 모두 무장해제된 상태였다.
- 4.3은 말한다 3권, 131p -
이상의 기록은, 5월 20일 탈영한 병사 중 무려 절반 정도의 인원이 다시 체포되었음을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자 이제 중요한 질문을 해보자.
무려 20여 명에 달하는 탈영병이 체포되었는데 탈영 지휘자가 문상길 중위라면 왜 그들 중 단 한 명도 문상길 중위의 교사가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지 않았을까?
과연 문상길 중위가 이 탈영 사건을 지휘했다면 무려 20명에 달하는 탈영병이 체포되었음에도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
사건 바로 다음날 박진경 연대장의 행적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5월 21일, 9연대를 방문한 박진경 연대장은, 4.28평화협상 파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의 방화용의자를 풀어주었다.
오라리 방화사건 용의자인 대청단원 박근택이 9연대 영창에 입감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 연대 책임자인 박진경 연대장이 탈영 사건 전말에 관한 조사는 물론 부대 내 전체 사항을 일괄 재점검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탈영 사건 후 모슬포 9연대는 혹독한 대가를 치뤘다.
우선 9연대 병력 모두가 무장해제되었으며 화장실 출입도 마음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감금되었다.
일종의 전수조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문상길 중위 체포는 없었다.
무려 스무 명이 넘는 포로가 잡혔음에도, 그 사건을 9연대 부대원들이 똑똑히 목격하였음에도 문상길 혼자 신출귀몰하게 체포를 피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는 문상길 중위가 당일 당직 사령으로서 사건 통제의 책임은 있었을지언정 극좌측 주장대로 집단 탈영을 주도하지는 않았음을 말해준다.
문상길 중위가 탈영사건을 주도했다는 극좌측의 주장은 박진경 연대장 암살 이후 문상길을 영웅화하려는 극좌측의 선전선동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좌절과 무기력
탈영사건 현장을 맞닥뜨린 문상길 중위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상상하는 문상길 중위의 감정은 좌절과 무기력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9연대에서 문상길 중위의 보직은 상당기간 '모병관'이었다.
모병관으로서 문상길 중위는 제주도 곳곳에서 청년들을 만나 신생국가의 군인으로서 사명과 자부심을 설파했을 것이다.
문상길 중위가 청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앞서 글에서 다룬 '모병 광고문'이 바로 그것으로서 국방 경비대는 좌도 우도 아니고 오로지 민족의 편에 서는 정의의 집단으로 선전했을 것이다.
이승만과 친일파 수호집단으로 변질된 경찰과의 직접 비교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 당시 9연대 입대자 중에는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한 청년들이 입대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입대한 9연대 군인들의 자부심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4월 13일, 김익렬 연대장의 대도민 성명과 이윤락 정보참모의 경고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도내 각지에서 야기된 전고 미증유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도내 민심은 동요 불안에 빠지고 있으므로 본 연대에서는 정부재산 및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사오니 도민 제위는 안심하고 직장에 매진하시기를 바란다. |
9연대장 김익렬 중령 대도민 성명, 1948년 4월 13일 |
군은 정부의 재산과 인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 확수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음. 모든 관공서와 인민은 절대 신뢰와 협조를 하여 주기 바라며 추호도 군출동을 모략, 악선전, 중상 혹은 적대적으로 불협력하며 군행동에 방해함을 불허한다. 만약 이에 위반하는 자는 여하 인사를 막론하고 군율에 의해 엄중 처단할 것이다. 읍민은 경비에 대하여 의견이 유한 시는 하시라도 대장이나 군기대에 보도대로 연락하여 주기 바란다. |
9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대위 대도민 경고문, 1948년 4월 13일 |
김익렬 연대장의 성명과 이윤락 대위의 경고문은 4월 10일, 제주경찰감찰청장이 9연대에 병력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김용순 대위를 지휘자로 하는 최소한의 인원(10명)을 미군주둔지와 정부시설의 경비병력으로 파견하면서 발표한 것이다.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국방경비대야말로 치안질서 유지의 진정한 수호자를 자임하는 자긍심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긍심은 연대장이 박진경으로 교체됨으로써 산산조각나고 만다.
박진경 연대장이 부임한 이후 국방경비대는 경찰과 다를바 없는, 심지어는 경찰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모병했던 병사들의 얼굴을 바라봐야 했을 문상길 중위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는 문상길 중위가 집단 탈영이 계획되고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막지 못한 것은 자신이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한 한없는 좌절감과 무기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4. 끄저기 > 4.3의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9. 손선호 하사 (1) | 2025.04.18 |
---|---|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8. 암살과 재판 (2) | 2025.04.18 |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6. 거절의 이유 (2) | 2025.04.11 |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5. 악마화 (1) | 2025.04.06 |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4.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0) | 2025.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