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끄저기/4.3의 사람들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10. 마치는 이야기

다락방별지기 2025. 4. 19. 17:01

1. 연재글을 쓴 이유

2024년 9월 23일. 
고양시 용두동에서 열린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진혼제 참여를 시작으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며 7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이 블로그에 쓴 '문상길 중위를 찾아서' 연재물은 두 가지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다. 

첫째, 일단 지금까지 모은 자료를 한 차례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둘째, 인터넷에서 '문상길 중위'를 검색했을 때 최소한 이 정도 내용까지는 책상에 앉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에서이다.       

문상길 중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찾아내야 할 정보가 더 많다. 
중국 해림에 있다는 문상길 중위의 조카와 그 후손들을 찾아보는 것도 그 노력의 하나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4.3도민연대를 비롯해 문상길 중위에 대해 알아내고자 하는 분들이 곳곳에 있으니 언젠가는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2. 김익렬 장군 실록 유고.

문상길 중위의 흔적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랬듯이 <김익렬 장군 실록 유고>를 우선 보고 싶어할 것이다. 
내 경우 이 글이 <4.3은 말한다> 2권의 부록으로 실려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 찾는데 애를 먹었었다. 
그래서 필요한 분들이 언제든 볼 수 있도록 이 문서를 PDF로 만들어 여기 첨부해 둔다.

 

이 문서는 제주4.3사건을 미시적으로 볼 수 있는 훌륭한 문서이다. 

 

오늘날 제주4.3사건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통해 전반적인 내용을 볼 수 있지만, '제주'라는 특정 공간을 개인의 눈높이에서 향토색 짙게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김익렬 장군 실록 유고>는 이런 측면에서 4.3을 바라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 김익렬 연대장이 1948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국제신문에 기고한 글도 첨부한다. 

극우에서 발간한 책 <제주4.3사건과 박진경 대령>에서는 이 두 개 문서의 내용 차이를 이유로 김익렬 연대장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두 개 문서의 내용 차이는 시대상황과 서사목적을 고려했을 때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모쪼록 이 두 개 문서가 4.3을 알고자 하는 분에게, 또는 나처럼 문상길 중위의 흔적을 쫓는 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김익렬 장군 실록 유고.pdf
0.44MB

 

김익렬 중령 『국제신문』기고문.pdf
0.17MB



김익렬 연대장에 대해 한 마디 더 덧붙일 게 있다. 

나는 김익렬 연대장이 훌륭한 리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을 넘어선 과도한 영웅화가 덧붙여져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4.28 평화회담은 김익렬 연대장의 의지가 아니라 미군정의 명령을 실행한 것이다.
물론 명령이라 해도 남들은 꺼린 무장대와의 접촉을 성실하게 이행한 점, 자신의 가족을 볼모로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무장대에게 믿음을 주려 했던 점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과 판단은 구분되어야 한다. 

또 김익렬 연대장이 9연대에서 해임된 후 여수 14연대에서 근무했던 이력을 들어 김익렬 연대장이 제주에서의 일을 14연대 군인들에게 전파한 덕분에 14연대가 출동명령을 어기고 여순사건을 일으킨 원동력이 된 것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제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이미 당시 여러 신문지상을 통해 잘 전파되고 있었다.

내용도 일방적으로 미군정 편을 드는 것이 아닌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쓰여진 경우가 많았다.  

참고로 신문검열이나 보도통제가 본격화 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수립(1948년 8월 15일) 이후이다. 

 

또한 군대가 치안상황에 개입해서도 안 되고 민족상잔에 개입해서도 안 된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군대 내에 김익렬 연대장 뿐 아니라 상당히 존재했다. 

대한민국 육군이 제 나라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서슴없이 들이대는 군대로 변했던 이유는 숙군 과정에서 이들 중 상당수가 빨갱이로 몰려 처형당하셨기 때문이다. 


김익렬 연대장의 경우 박진경 암살 사건으로 미군 방첩대에 소환된 것에 대해 '무고가 전화위복이 되어 나는 4개월 후에 발생한 여수 14연대의 여순반란 사건의 책임을 모면하게 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행'이라는 뉘앙스가 상당히 묻어있는 문구이다. 

따라서 김익렬 연대장의 행동을 높이 평가할지언정 그 이상의 시대적 평가를 덧씌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3. 연좌제에 억눌린 문씨 일가

문상길 중위 사건으로 안동 남평문씨 일가가 연좌제에 걸려 핍박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현장조사 결과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안동 남평문씨 일가가 연좌제 때문에 고통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문상길 중위 때문이 아니라 이후 빨치산 투쟁에 가담한 같은 항렬의 문상홍이라는 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문상길 중위가 구체적으로 어떤 법조항의 적용을 받아 사형을 언도받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948년 8월 15일자 한성일보에는 조선경비법 35조가 적용되었다고 하는데, 법령을 확인한 결과 1948년 7월 5일 제정된 국방경비법 35조는 '근무 중 명정(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술에 취함)에 대한 처벌 규정'으로서 보도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당시 문상길 중위 사형 선고 철회를 요청하는 각계각층의 탄원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반역죄였다면 탄원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항명죄 적용을 받지 않았을까 추정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한 분위기 때문인지, 지금도 안동 남평문씨 일가는 문상길 중위를 대체로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연좌제 자체를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문상길 중위 때문에 안동 남평문씨 일가가 연좌제에 걸린 것이 아님을 사실 규명 차원에서 밝혀둔다. 

 

4. 마지막 족보 업데이트 

남평문씨 대동보에는 문상길 중위의 큰형수이신 철성 이씨께서 1944년 임종하신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는 족보를 온라인 파일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실수이다. 
족보 원문에는 '갑신년'으로 나오는데 이는 2004년으로 보아야 한다. 
1944년 이후에 태어나신 자제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남평문씨 대종회에서 인터뷰한 바로는 이 족보가 마지막으로 업데이트 된 게 1989년에서 1994년 어간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돌아가신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면 그 이후 누군가, 또는 어떤 소식에 의해 족보에 내용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혹시 국내에 문상길 중위의 조카나 그 아래 항렬에 해당하는 분이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기도 했지만 이에 대한 내용은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었다. 

5. 확인 사살

<김익렬 장군 실록 유고>에 따르면 문상길 중위 총살이 집행된 후 미군장교 하우스만이 이마에 권총을 쏘아 확인사살을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우스만은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평가 받는 극우 장교이다. 
김익렬 장군은 이를 해괴한 일이라고 평가했지만, 극우측에서는 이 내용을 트집잡아 거짓말쟁이라는 근거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내용이 사실이라고 본다. 

문상길과 손선호는 대한민국 육군 1호 사형수였다. 
미군이 사형 집행 과정을 일일이 지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사형집행 당일 두 명의 미군장교가 입회한 보도가 있으며(대공일보 1948년 9월 25일자), 이후 여순사건으로 체포된 군인을 처형할 때 집행장교가 일일이 머리에 권총을 쏘아 확인사살을 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6. 문상길 중위의 사형 집행 전 최후 진술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의 사형 집행 소식은 1948년 9월 25일 이후, 여러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가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는 두 종류의 보도가 있다. 

 

우선 손선호 하사의 경우 모든 신문이 같은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손선호 하사는 군가를 불렀는데, 그 가사가 보도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 군가가 <용진가>임을 알 수 있다. 

군가를 마친 손선호 하사는 

오 하나님이시여 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국방군이 되게 하여 주십시소.

라는 유언을 남겼다. 

 

일부 신문은 여기에 더해 총이 격발되기 전 

오 3천만 민족이여.

라는 외침을 남겼다고 전한다. 

 

이에 반해 문상길 중위의 유언은 두 가지 종류가 전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스물 세살을 최후로 문상길은 갑니다. 
여러분은 조선의 군대입니다. 
마지막 바라건대 XXX의 XX아래 

XXX의 XX아래 

XX를 하는 조선군대가 되지 말기를 
문상길은 바라며 갑니다. 

- 서울신문, 평화일보, 대공일보, 수산경제신문 - 

 

23세를 최후로 

아무 일도 못하고 가는 것은 유감이다. 
조선 사람으로서 민족의 비애를 깨닫고 

XX의 X를 받아 

민족을 XX하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 조선일보, 국제신문, 자유신문 - 

 

단어가 빠져 있는 것은 검열 때문이다. 

문상길 중위가 실제 한 유언이 두 개 중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인터넷에 문상길 중위의 유언으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검색되는 경우가 있다.  

 

스물 세살을 최후로 문상길은 갑니다. 
여러분은 조선의 군대입니다. 
마지막 바라건대 

매국노의 단정아래 미 군대의 지휘아래 

인민을 학살하는 조선군대가 되지 말기를 

문상길은 바라며 갑니다. 

마치 검열을 피한 문구인 것처럼 보이는 이 글의 원천을 확인한 결과 그 출처가 북조선 기관잡지 <청년생활> 1950년 1월호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청년생활>은 손선호 하사의 출신 성분도 조작한 기사이다. 

문상길 중위의 유언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조작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상길 중위가 진짜 남긴 말이 무엇인지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검열로 몇몇 문구가 삭제되었을지언정 원래 문구를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문상길 중위의 유언을 인용할 때 이 점을 인식하고 인용해 줬으면 하는 바람에 글을 남긴다. 

7. 그들의 찬란한 미소

안동에서 안상학 시인을 만나뵀을 때 안상학 시인께서 사형 전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깜짝 놀라 사진을 보여달라고 요청드렸지만 안상학 시인께서는 사진을 보여주시기를 한사코 거부하셨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음날 서울에 올라오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상길 중위 사진은 거의 없다. 
안상학 시인께서 가지고 계시는 사진이라면 나라고 못 찾을리 없다. 

이런 생각에 인터넷에 있는 당시의 사형집행 사진이라는 사진을 모조리 뒤져 보았다. 
그러다가 한 사진을 발견했다. 




 

나는 바로 안상학 시인께 사진을 보내 이 사진이 맞는지 여쭤보았다. 
안상학 시인께서는 선선히 '맞다'고 대답하셨다. 

하지만 이 사진은 문상길 중위의 사진이 아니었다. 
사진의 원 출처는 1999년 10월 17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회, 여수14연대 반란 편에 등장하는 동영상의 스틸컷으로서 사진의 주인공 중 한 분(왼쪽)은 김종석 중령이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안상학 시인께 이 사진은 문상길 중위가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그 이후 이 사진은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때마다 사진을 다시 열어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사형집행 직전임에도 웃고 있는 이들의 얼굴이 말이다. 


 

거리낄 것 없는 청년들의 찬란한 웃음!  

가슴이 미어지고 머리가 멍해왔다. 

그제서야 안상학 시인의 기와까치구멍집 시의 한 대목이 이 사진을 통해 나올 수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소년처럼 해맑은 사내의 마지막 웃음

두 손 철사로 묶인 채 나무 기둥에 결박당한 몸
가슴에는 휘장 대신 표적, 흑백사진 붉은 피는
두 눈 가린 채 목이 꺾인 사내의 최후 진술;
내 비록 미군정 인간의 법정에서는

사형을 받고 사라지나
공평한 하늘나라 법정에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다 

그렇구나.
중요한 건 이 사진의 주인공이 문상길인지 여부가 아니었구나!


중요한 건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역시 이들처럼 찬란하고 당당하게 최후를 맞았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사진을 찾아 구태여 안상학 시인께 사실 여부를 확인한 내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하늘을 바라본다. 
오늘은 4월 19일이다. 

이 나라가 이렇게 성장할 때까지,
친위 쿠테타를 이겨낼 정도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잘났다는 지도자들 때문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피를 흘리고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들을 모두 신원하지 못했다. 

내 비루한 글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를 신원하는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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