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14. 21:55ㆍ1. 별과 하늘의 이야기/하늘 에세이
1. 10,000BC
10,000BC라는 제목으로 2008년 개봉한 영화가 있습니다.
흥행과 네티즌 평점 모두에서 참패를 기록한 영화인데요.
저는 나름 이 영화 높이 평가합니다.
우선 오락 영화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간단한 스토리 라인과 볼거리가 일품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인류 최초 문명에 대한 작가와 감독의 상상력이 상당히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참고 : 10,000BC 예고영상 링크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VideoView.do?movieId=44916&videoId=13755)
주인공 드레이는 수렵채집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당시의 일반적인 원시 인류 중 한명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다리 네개 달린 괴물 부족의 침략을 받고
사랑하는 여인 에볼렛을 비롯한 부족민들이 이 괴물 부족에게 끌려가죠.
이제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찾기 위해 이 괴물 부족을 쫓아갑니다.
그리고 거대한 지구라트를 건설하고 있는 고도의 문명과 마주하게 되죠.
이야기는 이 촌스런 원시인이 이 고도의 문명을 무너뜨리고
사랑하는 여인을 되찾는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으로 귀결되는데요.
중간에 제 눈길을 잡아끄는 흥미로운 장면은 바로 이겁니다.
사진 1> 영화 10,000 BC 중 - 사제가 오리온 자리를 측량하는 장면
영화 공식 스틸컷에는 사진이 없다보니 TV 화면을 촬영했습니다.
아무래도 화질이 좀 구리구리하네요.
지구라트를 건설하는 문명을 지배하는 이른바 '신'이라는 존재와
그 '신'을 보좌하는 사제들이 몸에 '사냥꾼'의 징표를 거느린 노예를 두려워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 '사냥꾼'의 징표는 바로 '오리온 자리'입니다.
하필 이 오리온 자리의 흔적이 노예로 끌려온 에볼렛의 손등에 새겨져 있는데
그건 또 공교롭게도 끌려오던 중 손등에 매를 맞아 생긴 흉터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여인을 구출하기 위해 주인공 드레이가 쫓아 왔고,
주인공에 의해 지구라트가 무너지고 마니
결국 지구라트를 건설하는 선진 문명의 신과 사제들이 두려워하던 예언이 실현된 셈입니다.
그저 흥미꺼리로 본다면 별 것 아닌 이야기입니다만
저의 쓸데없는 호기심이 발동한 곳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왜 그들은 오리온 자리의 흔적을 지닌 노예를 두려워한 걸까요?
감독과 작가는 왜 이런 장치를 영화에서 사건 전개의 중요한 요소로 사용한 걸까요?
2. 자연과 인류의 대결.
선사 시대 어느 날에 누군가가 땅을 일부러 갈아엎기 시작한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인위적으로 노력을 들여 땅을 갈아 엎고 씨를 뿌려,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느 순간에 열매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합리적인 예측을 시작한 바로 그 때가
자연에 대한 인류의 도전이 시작된 지점이죠.
그 옛날 자연은 분명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테지만,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면서, 계급 사회가 생겨나면서,
그 계급 사회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다른 사람이나 세력을 굴복시킬 수 있었듯이
자연도 굴복시킬 수 있는 대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배자의 생각은
신화로 그 정당성과 권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겠죠.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를 보면
제우스가 그 아버지 크로노스를 밀어내고 권력을 획득하는 극적이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제우스를 비롯한 한 축이 인격신을 상징하고
크로노스를 비롯한 기간테스들이 이루는 한 축이 자연신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분명 인류가 자연을 대상으로 개척과 도전의 여정에 있음을,
심지어는 승리까지 거둘 수 있음을 정당화 해주는 이야기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신과 인격신 간의 전투,
즉,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승리라는 모티브는
이미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는 수메르 신화에 그 원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18세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너무나도 유명한 바빌로니아라는 강력한 국가가 건설됩니다.
신흥 강국 바빌로니아는 그들의 앞에 생겨난 국가들이 그랬듯이
하나의 신화를 통해 그들의 정당성과 권위를 선전합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바빌로니아'라는 국가만큼이나 유명한 신화 '에누마 엘리쉬'입니다.
'에누마 엘리쉬'는 바빌로니아의 수호신인 '마르둑'이
고대 수메르의 모든 신들 중에서 최고 신으로 좌정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태초에 아버지 신인 앞수(지하수신)와 어머니 신인 티야마트(바다신)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라흐무와 라하무가 태어납니다.
이들은 진흙, 침적토를 상징하는데 이는 물로부터 땅이 솟아났음을 의미하죠.
라흐므와 라하무는 안샤르(수평선)와 키샤르(지평선)를 낳습니다.
안샤르와 키샤르는 아누(하늘)를 낳고, 아누는 엔키(지하수 신)를 낳죠.
아누는 수메르 신 중 최고의 신으로 숭상받는 신이며, 아누부터가 인격신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신들이 늘어나자 세상이 시끄러워집니다.
그 시끄러움에 편히 쉴 수 없었던 앞수가 티야마트를 찾아가
자신들이 낳은 신들을 모두 없애버리자고 말합니다.
티야마트는 자신의 자식들을 모두 없애버리자는 남편 앞수의 말을 듣고 분노합니다.
앞수가 자신들을 없앨 궁리를 하고 있다는 정보는 자식 신들에게 새 나가고,
결국 앞수는 자신의 현손인 엔키에 의해 처단됩니다.
걱정이 없어져버린 신들은 더더욱 아무런 꺼리낌없이 세상을 뒤흔들게 되고,
이 때 엔키가 마르둑을 낳습니다.
세상이 더더욱 시끄러워지자,
처음에는 자신의 자식들을 모두 없애버리는데 반대했던 티아마트가 군대를 일으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자식 신들 중 하나인 '킨구'를 대장으로 세우고,
열하나의 괴물들을 만들어줍니다.
에누마 엘리쉬가 기록하고 있는 이 부분의 토판내용을 그대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조철수 교수님의 번역문을 참고함)
모든 것을 만든 어머니 후부르(티야마트)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무기를 만들고 기괴한 뱀들을 낳았다.
날카로운 이빨, 불쌍히 여기지 않는 엄니를 더했다.
그녀는 그것들의 몸에 피 대신 독을 채웠다.
사나운 용들에게 무서운 광채를 씌웠다.
신들처럼 후광이 빛나게 하였다.
"그들을 본 자는 힘없이 꺾일 것이며
그들이 몸으로 덤벼들면 그들의 가슴을 돌리지 못한다."
그녀는 뱀들과 용들과 라하무(털 많은 용사),
괴기한 사자와 험악한 개와 전갈 용사,
힘센 귀신들과 물고기 용사와 황소 용사를 세웠다.
하지만 티야마트의 군대는 마르둑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마르둑은 티야마트를 죽이고 그 몸을 갈라 세상을 창조해내고
티야마트가 일으킨 대장 킨구를 죽여 그 피를 흙에 섞어 인간을 창조해 내죠.
바빌로니아 제국의 창조신화 에누마 엘리쉬는 제국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전형적인 선전용 창조서사시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에는 고대 수메르 신화의 전통이 그대로 담겨 있기도 하지만
마르둑이라는 자신들의 수호신을 최고의 신으로 옹립하기 위한 무리수도 서슴지 않고 있죠.
한편 에누마 엘리쉬의 이야기에는
고대 그리스신화에서 볼 수 있는 태초의 어머니 신 가이아와 가이아가 낳은 자식들,
그 자식들이 아비를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로 올라서는 이야기의 원형이 담겨 있으며
세상에 대한 주도권이 자연신에서 인간신으로 전환되는 부분에 대한 원형도 담겨 있죠.
(사실 에누마 엘리쉬가 주목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마르둑이 티야마트를 갈라 세상을 창조하는 부분에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의 창세기 원형을 담고 있는 부분이 상당히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 이야기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이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
3. 자연이 동원한 군대.
별지기로서 에누마 엘리쉬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바로 태초의 어머니신 티야마트가 킨구에게 만들어주었다는 그 괴물군대입니다.
이 괴물 군대의 면면을 볼까요?
앞에서 그 부분을 인용했습니다만, 다시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녀는 뱀들과 용들과 라하무(털 많은 용사),
괴기한 사자와 험악한 개와 전갈 용사,
힘센 귀신들과 물고기 용사와 황소 용사를 세웠다.
별보기를 좋아하시고, 별자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여기서 뭔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티야마트가 동원한 괴물 군대는 바로 별자리입니다!!!
뱀, 용, 사자, 개, 전갈, 물고기, 황소는 바로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별자리죠.
특히 사자, 전갈, 물고기, 황소는 황도 12궁을 구성하는 별자리이기도 합니다.
즉 태초에 별자리를 장악하고 있었던 주체는
인간이 문명을 형성하기도 바로 전 자연 상태의 무엇입니다.
그것은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 이전의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종교로부터 유래한 것이죠.
그리스 신화의 원형이 된 수메르 신화에 바로 그 진실이 나오는 겁니다.
.
태초의 별자리를 장악한 주체는
수메르의 최고신 아누도 아니고, 수메르 문명이 가장 사랑하는 신 엔키도 아닙니다.
바로 태초의 어머니 신, 티야마트인 것이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별자리를 결정하는 주도권이 자연신에서 인격신으로,
에누마 엘리쉬에 의하면 티야마트에서 마르둑으로
(에누마 엘리쉬의 후반부에는 하늘의 질서를 정하는 마르둑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가이아에서 제우스로 이동된 것이죠.
따라서 태초의 별자리를 이야기하려면 절대 이부분이 무시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별자리의 원형이 고대 수메르 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정설이 된지 오래입니다.
물론 그 옛날의 별자리는 오늘 날의 별자리와는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라하무(털 많은 용사), 힘센 귀신들이 어느 별자리를 상징하는지는 수수께끼이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라하무(털 많은 용사)는 다른 별자리들의 위치를 봤을 때, 오리온일 가능성이 상당히 있어보입니다.
그렇다면 힘센 귀신들은 쌍둥이 자리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참고 : 여기서 라하무는 티야마트가 최초에 낳은 라하무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하필 표기가 영어표기까지 같다보니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서강대학교 조철수 교수님은 티야마트가 동원한 군대 중 하나인 라하무를
"털이 많은 벌거벗은 용사이며, 그의 목상을 신전 출입구에 세워 놓아 수문장 역할을 했다."라는 별도 주석으로 설명함으로써,
티야마트가 낳은 점토와 찰흙을 상징하는 신 라하무와는 분명히 다른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4. 사냥꾼의 상징을 두려워한 이유.
이제 10,000BC 라는 영화로 다시 돌아와 보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지구라트 문명의 지도자인 '신'과 사제들이
사냥꾼의 징표인 오리온 자리의 흔적을 몸에 지닌 노예를 두려워한다는 설정이 왜 존재하는지를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시기상 기원 전 10,000년 이라면 이제 막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시기입니다.
자연이 인류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가혹한 시기가 끝났지만
인류는 여전히 수렵채집으로 삶을 연명하고 있을 때였죠.
그 당시라면 거대한 지구라트를 건설하고, 거대한 매머드를 사육하는 문명이라도
인간의 자연에 대한 도전은 이제 막 시작된 시기일 것입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문명이라면
인류가 다시 모든 인위적인 제도가 만들어낸 업적을 잃어버리고
혹독한 자연상태로 원복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상존하고 있을 때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냥꾼으로 표기된 상징은
바로 끝내 이겨낼 수 없는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두려움의 상징으로 '사냥꾼'이 선정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설정입니다.
사냥꾼은 '농사꾼'에 비해 확실히 야성이 느껴지는 존재이자,
'정착 농경'에 대하여 '수렵 채집'을 상징하는 대척점에 있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사실 영화에서 주인공 드레이도 사냥꾼이죠.
비록 영화에서는 엄한 고도 문명을 붕괴시키고, 찌질하게 다시 초보적인 농경을 시작하긴 합니다만...)
태초의 자연의 어머니 티야마트가 인격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동원한 군대 중
유일하게 인격적인 존재가 바로 라하무(털 많은 용사)입니다.
이 라하무가 오리온 자리를 상징하는 존재라면
영화 10,000BC에서 등장하는 사냥꾼의 징표로서 오리온 자리는
문명을 붕괴시키는 야만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감독과 작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 아닐까요?
막상 이야기를 쓰고 보니 영화 10,000BC가 흥행 성적이 괜찮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러게 아무리 어여쁜 여자라도 임자있는 아가씨한테는 함부로 대쉬하면 안되는 법입니다.
찬란하게 가꿔온 문명이 붕괴되는 수가 있어요. ㅡㅡ;;;
이상 설 연휴 게으름으로 약간 늦은 천문지도사의 노트 여섯번째 이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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