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지도사의 노트 열번째 이야기 : 별이 되는 법

2016. 3. 10. 22:591. 별과 하늘의 이야기/하늘 에세이

1. 물 슐기 (Mul Shulgi) - '슐기 신의 별'


    그 옛날 지구의 최초 문명이라는 수메르 문명의 이야기에  별이 된 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방앗간을 지나가는 참새는 있을지 몰라도 별을 지나가는 별지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자료를 찾아봤는데요.
  
    주인공은 기원전 2094년부터 2047년까지 수메르 문명을 구성하는 여러 도시 국가 중 

    우르의 전성기를 이끈 우르 3왕조의 2대왕 슐기 왕이었습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20세가 채 되지 않았을 그 고대 시대에 통치만 무려 48년을 지속한 인물이죠. 

   
    기록에 의하면 재위 48년 11번째 달 2일 '슐기 신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 바빌로니아 시대 문서에 슐기 왕은 수메르어로 '물 슐기'라고 표기 되어 있다고 하네요.

    '물'은 별을 뜻하는 수메르 어로 슐기 왕이 별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아쉽게도 슐기 왕이 하늘로 올라간 그 때가 몇 월인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날과 같은 달력이 아닐테니 당연한 거겠죠?


    어쨌든 몇 월인지에 대한 단서가 있었다면 그 시기 우르 지역의 하늘에서 

    행성을 제외한 가장 밝은 별이 슐기 왕으로 간주된 별이었을 거라고 생각해도 무방했을 겁니다.

  


2. 슐기왕의 특징.


     슐기왕의 별이 어떤 별일지에 대한 첫번째 궁금증은 해소하지 못했지만
     두번째 궁금한 점이 생기더군요.
     그는 무슨 일을 했길래 '하늘로 올라가고, 별이 된' 걸까요?
   
     슐기 왕의 앞이나 뒤에도 수메르 지역의 왕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슐기 왕이 특별히 별이 됐다면 그만한 무슨 이유가 있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그의 삶을 찾아봤습니다.
     워낙 통치 기간이 길어서인지 자료가 많더군요. 


     몇 가지 특징을 간추려 봤습니다.
   
     첫째. 엄청나게 많은 연호
            '서기'가 예수의 탄생이후 몇 년째인지를 세는 체계인 것처럼  과거 왕정 시대에는 '왕의 등극 이후 몇 년째'가 해를 세는 기준이었습니다. 


             수메르 문명은 워낙 컨텐츠가 풍부한 문명이다보니 그 해에 왕이 행한 일 또는 왕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으로 연호를 삼았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이런 식입니다.


            재위 1년 : '슐기 왕 해' 
            재위 2년 : '우르의 왕 슐기가 엔릴 신을 위해 라피스라줄리 옥좌를 만들어 바친 해' 

            재위 21년 : '엔릴 신의 엔시갈 신관 니누르타 신이 엔릴 신과 닌릴 여신의 신전에서 신탁을 받고,
                              우르의 왕 슐기 신이 엔릴 신과 닌릴 여신의 신전의 토지와 회계를 정리한 해' 


             왼쪽 '재위 몇년' 은 이해를 위해 쓴 현대적 개념이고요, 수메르에서는 오른쪽의 방법으로 그 해가 몇 해인지를 셌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만약 누가 슐기 왕 치세 21년에 태어났다면 이런 대화가 가능하게 되는 겁니다.
            
             학교 선생님 : 너 생년월일이 언제냐?
             학생 : 엔릴 신의 엔시갈 신관 니누르타 신이 엔릴 신과 닌릴 여신의 신전에서 신탁을 받고,
                      우르의 왕 슐기 신이 엔릴 신과 닌릴 여신의 신전의 토지와 회계를 정리한 해의 두 번째 달 아홉 번째 날에 태어났습니다. 헥헥...
             
             한 반에 학생이 몇 명이었을까요? ^^;;;        


             그런데 당시 수메르의 서기들이 이런 사태를 예방하고 싶어서였는지

             다행히 슐기왕 재위 21년에는 '데르를 정복한 해'라는 짧은 문구의 연호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둘째. 넘치는 찬양
            치세기간이 길어서인지, 슐기왕 시대의 기록물들이 많은데
            기록물이 많기도 해서이겠지만 슐기왕을 찬양하는 글들이 유독 많다고 합니다.
          
            그 수많은 찬양의 글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띠는게 지은이가 슐기왕인 찬양의 글이더군요.
            한마디로 '자화자찬'의 글인데요. 
           
            몇몇 부분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나, 왕은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전사다.
             나 슐기는 태어날 때부터 강한 남자다.

             ...중략...
             나의 영웅심과 같이, 나의 힘과 같이,
             나는 지혜를 이루었다.
             나는 (지혜의) 진실한 약속을 경쟁한다.
             나는 정의를 사랑한다.
             나는 악을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사악한 말을 증오한다.
             나, 슐기는 최고의 강한 왕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찬양한 찬가가 꽤 되는데
             학자들은 이를 '슐기 왕의 찬가 A', '슐기 왕의 찬가 B'....이런 식으로 수집해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까지 발견된 게 '슐기 왕의 찬가 Z'까지 있다네요. 

             하나 더 발견되면 이젠 AA부터 다시 시작하는 걸까요?
           
             어쨌든 그 많은 자화자찬 중에는 이런 문구도 있다네요.
           
             "나는 어려서부터 학교에 다녔고,
              수메르 어와 아카드 어 점토판으로 서기술을 배웠다.
              소년 중 누구 한 사람도 나처럼 점토판에 능숙하게 글씨를 쓰지 못했다."

            
              한마디로 가장 똑똑한 학생이었다는 건데요.
              정말 '엔릴 신의 엔시갈 신관 니누르타 신이 엔릴 신과 닌릴 여신의 신전에서 신탁을 받고,
              우르의 왕 슐기 신이 엔릴 신과 닌릴 여신의 신전의 토지와 회계를 정리한 해'만큼 때려주고 싶네요.


    셋째. 얼굴 없는 왕.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오랜 치세 기간 동안, 더더군다나 나중에는 '신'으로까지 추앙되고
             '별'까지 되었다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슐기왕의 얼굴이 남아 있는 석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나마 아래 사진이 가장 온전한 상태의 석상이었다고 합니다. 



                                             사진 출처 : http://www.historiaantigua.es/files/tag-shulgi.html
          
           여기서 '석상이었다고 합니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 석상이 이라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공격 당시 바그다드가 점령되었을때 박물관이 약탈당하면서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네요...

         


3. 찬양의 속성. 


     이처럼 두번째 궁금했던 점, 슐기왕은 어떤 사람이었길래  '하늘로 올라가고, 별이 된' 것일지를 찾는 와중에
     이 궁금증을 무색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료를 찾는 와중에 참조한 책이나 인터넷 자료에서
     하나같이 슐기를 위대하고 현명한 군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슐기가 위대하고 현명한 군주라는 근거는

     현재까지 발굴된 슐기 왕의 자화자찬을 포함해서 엄청나게 많은 슐기 왕 찬양 점토판들이었습니다. 

    
     글쎄요?
     과연 이걸 근거로 슐기왕이 위대하고 현명한 군주라고 평가하는게 맞는 걸까요?
    
     핵전쟁으로 문명이 완전히 절멸된 미래의 어느 시점에 누군가가 한반도를 발굴한다고 생각해보죠.

     그들이 서기 2000년에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가졌던 신문을 평양에서 하나, 서울에서 하나 발견했다면

     그들은 2000년에 한반도를 지배했던 지도자들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요?
   
     아마 김정일은 슐기 만큼이나 위대한 군주로 간주되고
     김대중은 악질중의 악질 군주로 간주되지 않을까요?
   
     물론 오늘날의 시점으로 무려 4천년 전, 전제왕정만이 유일한 통치체제였던 당시를 재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의 속성과 사람이 모여 만드는 사회의 속성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신앙의 대상은 비합리적일수록 강렬한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고
     찬양의 대상은 무지막지할수록 강력한 찬양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죠.
   
     그처럼 위대하고 현명한 군주 슐기가 다스렸다는 우르 3 왕조는
     슐기 사후 43년, 슐기의 통치 기간만큼의 시간이 채 가기도 전에 멸망하고 맙니다.
   
     앞서 언급한 제위 21년의 연호부터 슐기 왕은 이미 '신'이라는 호칭이 따라붙어 있습니다.


     스스로 신이 된 왕, 그래서 별까지 되었다는 왕.

     그는 정말 별이 되긴 한걸까요?
   


4. 별이 되는 법.      


     별지기로서 저의 관측 목표는 제가 아는 모든 하늘에 이야기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제가 하늘에 붙이고 싶은 이야기는 '영웅'이나 '왕', '신'이나 '우두머리'따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옛날 지금 제가 바라보는 저 별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거나  눈물을 지었을 보통 사람들과 교감하고 그 이야기를 찾고 싶죠. 


     그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야말로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와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아마 모든 분들이 그런 경험을 하셨을 겁니다. 
     하늘의 별을 보다보면 여기저기서 이른바 '스타'라고 이야기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옆에 함께 있었던, 아니면 지금 함께 하고 있는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으시는지요?
   
     정작 '별'이나 '스타'라고 얘기되는 사람은 진짜 별을 봤을 때는 전혀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별이 되었다는 왕'에 대한 인류 최초의 이야기는
     제 생각에는 '별이 되는 법'보다는 오히려 '별이 될 수 없는 법'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정말 별이 되는 진정한 방법은
     지금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당신은 정말 내게 별처럼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나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 분들이 언젠간 저 별을 보면서 저를 기억해 주실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