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손자리(the Bison-man)는 별자리 1세대라 할 수 있는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고대 별자리입니다.
비손의 형상에서 기원전 4천년 대 후반의 복식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손자리는 고대 그리스의 켄타우루스자리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수수께끼의 형상은 최소 5천 년 동안 하늘을 장식해 온 셈입니다.
비손은 명확히 구분되는 두 개 형태로 등장합니다.
우선 인간의 머리를 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하고, 사람의 상반신에 맹수의 하반신, 여기에 황소뿔을 가진 생명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그림 1, 2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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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수메르 시대의 비손 모습, 이 형상의 시초는 기원전 2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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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수메르 이후 왕조인 아카드시대의 원통형 인장에 새겨진 '사자와 황소 투쟁도' |
비손의 모습은 옆구리와 어깨까지 모두 털로 뒤덮힌 모습으로 묘사되어 황소보다는 들소에 가깝게 그려졌지만 오늘날 문학작품에서는 비손을 '황소용사(Bull-man)'으로 번역하곤 합니다.
흥미로운 형상을 가진 비손은 오늘날까지 많이 남아 있는 원통형 인장에 사자로부터 공격받는 소떼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그림 2 참고)
'사자와 황소의 투쟁'이라 불리곤 하는 이 장면은 기원전 3천년 대를 통틀어 원통형 인장에 새겨지는 가장 인기있는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장식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두 개 모티프를 통해 비손이 갖는 기본 특성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특성이자, 가장 중요한 특성은 비손이 사자를 죽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비손은 사자떼와 격투가 벌어졌을 때, 무기를 들어 사자를 공격하고, 죽은 사자의 몸뚱이를 승리의 전리품으로 높이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두 번째 특성이 비손이 소떼를 지키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비손은 인간의 친구이며 형제처럼 인간을 포용해 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비손은 전적으로 선행을 베푸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뿔을 달고 있는 머리는 비손이 신성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비손자리는 대개 '물-구-알림(Mul-Gu-Alim)'으로 표기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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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기는 아카드어로 '쿠사리쿠(kusarikku)'라 읽습니다. 이는 대개 '들소'로 해석됩니다. 이 단어는 신화적 존재와 실존하는 '들소' 모두에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
'구(Gu)' 표기는 황소 머리를 그린 것입니다. 이 표기는 이름 앞에 쓰여 소의 일반적인 종류를 나타냅니다. 이 표기는 '구드(Gud)'로 읽힐 수도 있는데 오늘날 작품들에서 비손의 이름은 '구드-알림(Gud-Alim)'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알림(Alim)' 표기는 '들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쐐기문자는 등장초기부터 추상적 성격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는 쐐기문자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고대의 예를 기반으로 판단하건대, 이 표기는 오른쪽에 '마(Ma)'표기를 수반하여 동물의 머리를 총칭하는 표기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접사처럼 붙는 '마' 표기는 이 표기를 '알림(Alim)'으로 읽어야 됨을 알려주는 발음안내 표기입니다. |
'사자와 황소의 투쟁'에 깔려 있는 기본 주제는 별자리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비손자리는 '험악한 개' 또는 '포악한 사자'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우르-이딤(Ur-Idim)'이라는 별자리와 짝을 맺고 있습니다. (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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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 태양을 함께 들고 있는 비손자리와 험악한 개자리(the Mad Dog) 그림 |
두 별자리가 태양과 함께 떠오른 때가 추분점 전후였다는 사실은 이 계절이 '사자와 황소의 투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선 겨울의 하늘은 작물과 목초지에 비를 뿌려 풍요롭게 하는 황소로 상징됩니다.
반면 여름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땅은 작렬하는 태양의 열기에 바짝 마르는 때죠.
즉 겨울이 지나 여름이 오는 것은 황소를 물리친 사자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 가을이 오고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죠.
이제 황소는 사자에게 복수를 합니다.
이렇게 자연의 순환은 계속되죠.
이렇게 우주적 정의를 내재화한 비손의 본성을 봤을 때, 기원전 3천년 기 중반에 비손이 태양의 수행원으로, 특히 태양신의 문지기로 묘사된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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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태양신의 신전에서 문설주를 쥐고 선 모습으로 양식화된 한 쌍의 비손 |
문지기로서 비손의 역할은 질서를 세우고 평화와 정의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진 속성은 태양신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에서 전갈인간이 태양이 뜨고 지는 산을 지키는 것처럼, 비손은 태양의 문 앞에 서서 하늘과 지하세계의 통로를 드나드는 이들을 규제합니다.
그런데 이 역할은 추분과 특별한 연관관계를 가집니다.
비손이 가지고 있는 태양의 상징은 기원전 3천년 대 후반, '라가시'라는 고대 수메르의 남부 도시국가에서 왕으로 재위한 구데아(Gudea)의 인장에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구데아가 수호신으로 모신 닌기르수(Ningirsu)를 위해 신전을 지은 과정을 기록한 명문에는 밀교적이고 제의적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닌기르수는 닌우르타Ninurta가 지역화된 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의 여러 상징 중 '비손의 머리'가 태양신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문양을 볼 수 있습니다.
구데아는 이 문양을 '운명이 결정되는 곳', 즉,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향해 설치했죠.
같은 문서에는 구데아가 '닌기르수의 아들, 위대한 비손'을 신전 내부의 성역을 지키는 문지기로 세웠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비손이 '진실과 정의'와 갖는 연관관계는 중기 아시리아 법전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흑마술을 행하는 사람을 고발하고자 하는 사람은 '태양의 신 샤마쉬(Šamaš)의 아들 비손'에게 우선 맹세를 해야 했습니다.
비손이 품은 상징은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비손은 여전히 태양원반을 지키거나 태양신의 옥좌를 지지하는 한쌍의 비손으로 등장하며, 비손의 조각상은 여전히 신전의 문을 지키고, 비손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작은 석상은 악한 기운으로부터 신전을 지키기 위해 신전 기초에 파묻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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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날개달린 원반을 호위하고 있는 비손 |
'사자와 황소의 투쟁'을 기본 축으로 하는 이러한 사상은 고대 그리스에까지 이어져 켄타우루스자리와 이리자리로 형상화 되었습니다.
즉, 켄타우루스자리와 이리자리는 '사자와 황소의 투쟁'을 그리스 방식으로 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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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고대 그리스의 켄타우루스자리와 이리자리 |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별자리 형상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형상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죠.
켄타우루스는 인간과 들소가 섞인 비손과 달리 인간과 말을 섞은, 네 개 발을 가진 생명체입니다.
비손이 들고 있던 화려한 지팡이 또는 태양기둥은 담쟁이 덩쿨이 휘감긴 지팡이 또는 포도나무 가지로 바뀌었습니다.
반면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험악한 개자리(the Mad Dog)와 '포악한 맹수', '늑대', '이리'의 형태로 바뀐 이리자리와 그럴듯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자와 황소의 투쟁과 비슷하게 켄타우루스자리는 포악한 맹수인 이리자리를 죽여 높이 쳐들고 신에게 바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한편 비손이 가진 자애로운 성격 역시 그리스 신화에서 여전히 유지됩니다.
즉, 켄타우루스자리가 문명화된 켄타우루스인 '폴루스(Pholus)' 또는 '케이론(Chiron)'으로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폴루스와 케이론은 모두 헤르쿨레스에 의해 '우연히' 살해당하는 존재죠.
이 이야기에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흔적이 숨어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주문에서도 '비손은 부자이고 살아있는 동안 존경을 받지만 어떤 무기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는 기록이 등장하죠.
초기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단편에는 비손이 닌우르타(Ninurta)의 손에 처단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닌우르타가 바다에서 비손을 처단했다고 하죠.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닌우르타가 비손자리를 야생돼지자리(the Wild Boar)로 뒤바꿔 버린다는 것입니다.
야생돼지는 닌우르타의 상징 중 하나죠.
고바빌로니아제국(기원전 19세기~16세기) 시대에는 비손자리와 야생돼지자리가 모두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추정컨대 이 두 개 별자리의 교체는 기원전 3천년 대 중반 즈음에 발생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가 닌우르타 숭배 사상이 정점을 찌를 때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닌우르타 숭배 사상이 메소포타미아에 널리 퍼졌을 때는 기원전 24세기 재위한 우루이님기나(Uruinimgina)왕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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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이전 시대의 여러 영웅을 살해하는 닌우르타 |
별자리 교체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개 별자리가 바빌로니아 문서에 계속 등장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두 개 별자리 중 하나인 야생돼지자리는 이집트 인들에게서 이어져 덴데라 신전의 원형 황도대에 야생돼지자리가 등장합니다.
이에 반해 고대 그리스는 비손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래 고대 수메르의 별자리 형상으로서 비손은 잎으로 덮인 지팡이를 쥐고 사자 또는 사자형상의 괴물을 죽이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원전 3천년 대 후반, 별자리 전통에 변화가 일어나죠.
이때 비손은 '살해'당하고 '야생돼지자리'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비손자리의 끝은 아닙니다.
바빌로니아 별자리를 살펴보건대, 비손이 가지고 있던 기본 특성은 써래를 든 황소머리 인간의 형상을 한 써래자리(the Harrow)로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참고 별자리 : 사자자리(the 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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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석
1. 이 글은 천문작가 Gavin White의 책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와 천문전승을 담은 에세이집 Babylonian Star Lore (ISBN-13 : 978-0955903748)를 번역한 것입니다.
2. 별자리 이름이 현대 별자리 이름과 혼동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는 '이탤릭체'로 표시하였습니다.
3. 본 글은 저자의 허락을 받아 포스팅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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