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율표의 재구성

2015. 11. 22. 20:264. 끄저기/끄저기

 

 

 

1. 주기율표의 해체
  
   수,헬,리,베,풍,탄,질,산,플,네.......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암기 교육의 산물 중 하나이다.
  
   이 책에서 읽은 내용 중 첫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그렇게 심각하고 어려운 이론적인 내용이 아니라

   학교에서 시험 시간에 화학 선생님이 주기율표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시험 감독을 했다는 내용이다.
   (저자가 미국 사람이니 아마 미국의 어느 학교였을 것이다. 물론 모든 미국 선생님들이 다 그랬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주기율표만큼이나 문제를 뽑아낼 거리가 무궁무진한 소재가 얼마나 될까?

 

   지구 한켠에서 이 주기율표는 암기에 암기에 암기를 거듭하며 외워야 했던 숭배의 대상이었음에 반해
   또 다른 한켠에서는 해부하고 분석해야 했던 해부용 개구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이 사십에 딱히 나를 강압하거나 강제했던 것도 아니고,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무의식 저편에 남아 있는 우상 하나가 파괴되는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랬던 것이다.

 

   주기율표는 지켜지거나 신성시되어야 하는 성벽이 아니라
   그저 편의를 위해서 구축된 하나의 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걸 가로로 늘어놓든, 세로로 늘어놓든, 동그랗게 배열하든, 쭉쭉 찢어놓든. 

   그저 본인이 이해하기 편하고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 하기 편하다면 

   원하는대로 배치하거나 다양한 배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바로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 별로 주기율표를 재배치했듯이 말이다.
  

 

2. 주기율표에 담겨 있는 것은 원소가 아니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원소는 별이라는 대장간에서 벼려졌다.
  
   우리 태양과 같은 보통 별은 백색 난쟁이별로 식어가는 와중에

   주기율표에서 탄소 이하의 원자번호를 가진 원소들을 만들어내고
   태양보다 훨씬 무거운 별들은 초신성 폭발로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철 이하에 해당하는 원소들을 뿌려대다가 

   파국의 순간, 삼라만상을 구성하는 모든 원소를 만들어낸다.
  
   아무런 의식이나 방향성이라곤 개입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자연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지만
   그보다 못지 않게 신기한 건, 그 현상을 규명해 내는 인간의 노력이다. 

 

   따라서 어떤 과학적 현상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따라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바로 그 과학적 현상을 규명해내고 검증해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무미건조해 보이는 주기율표에서 하나의 네모는 원자번호, 원소기호, 원소이름, 원자량 이라는 네 가지의 정보들로 채워져 있다.
  
   각 항목을 구성하고 있는 실재 정보들과,

   정보들이 채워진 각 네모칸이 서로 도열해 서는 순서는 분명 주기율표가 담고 있는 직접적인 정보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정보를 채우고, 그 순서를 나열해낸 사람들의 노력이다.
  
   그 사람들은 언제, 어디선가에서 살았던 사람들이고,

   어떤 생각과 어떤 사건을 겪으며 또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갈등하고, 협력했던 사람들이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 집중하여 주기율표를 구성하는 원소들이 만들어내는 삼라만상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뽑아냈다. 
   그러고보면 주기율표에 담겨 있는 것은 결단코 원소뿐인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마치 주기율표를 가득 채우고 있는 번호와 알파벳을 비롯한 표기들이
   마치 세상을 다양하게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군상만큼이나 아름답고 다채롭게 보이는 멋진 경험을 할 수 있다. 
   
   

3. 주기율표의 재구성.

   이 책에서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이야기가 주기율표라는 테트리스 블럭과 같은 네모들이 겹쳐지는데 아교로 사용되었다.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는 비활성 기체들,

   누구든 만나는 족족 달라붙기를 주저하지 않는 6족 원소들의 이야기 등은 

   마치 MBTI 심리검사가 사람의 유형을 나누듯

   원소들 역시 다양한 범주화가 가능한 성격이 있는 듯한 재미있는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또한 전쟁의 역사와 함께하는 원소들이 담고 있는 피비린내의 역사,

   그리고 냉전 시대, 체제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채워나간 주기율표상의 원소들은 

   마치 주기율표가 수많은 기층 민중의 피와 땀을 딛고 우뚝 서있는 만리장성과 같이 보이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기적의 의약품을 가능케 했던 원소들이 피의 원소들과 함께 섞여있는 모습은  

   너무나 가치 중립적이어서 너무나 냉혹하기만 한 자연의 본성이 주기율표에도 고스란히 서려있음을 보여준다.
  
   세계각국에서 돈으로 쓰인 원소들과 위조의 역사,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해 내는 광기의 근저에 서려 있는 특정 원소의 결핍과 같은 이야기는
   주기율표에 새겨져 있는 것이 단순히 원소를 규명하고 정의해낸 개개 과학자의 일화일 뿐만 아니라 

   인류 집단의 인간사도 함께 아로새겨져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책의 말미에는 최초로 그려진 주기율표의 형태 및 다양하게 그려질 수 있는 주기율표의 형태들이 등장하거니와
   저자 샘 킨은 이 책을 통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주기율표를

   - 무려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 한권의 책으로 창조해냈다.
  
   결국 이 책 덕택에 다양한 형태의 주기율표를 접하고,

   너무나 고맙게도 또 하나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 단언하건대 아마도 '사라진 스푼'이라는 제목의 샘 킨이 그려낸 주기율표야 말로 

   내가 접한 가장 아름다운 주기율표라는 찬사를 드려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장대한 이야기로 최고로 아름다운 주기율표를 그려낸 저자 샘 킨에게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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