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21. 04:25ㆍ4. 끄저기/끄저기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찢어진 청바지에 맨발 스포츠 샌달을 신고 다니던
황금과 같은 대학생활이 끝나고 회사를 다니기 시작할때
가장 적응하기가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복장이었다.
당시 회사 복장 규정이 '비즈니스캐주얼'이었다.
이게 좀 말이 어정쩡하게 느껴졌다.
캐주얼이라 하면 뭔가 대학생 때처럼 입고 다니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앞에 붙은 '비즈니스...'는 먼 개뼉다구 수식어란 말인가?
이런 생각에 혼란해 하는데 선배들이 딱 결정을 내려주었다.
넥타이만 없는 양복!
결국 그런 식으로 옷을 입고 다닌 시간이 회사에 재직한 시간과 맞먹게 되었다.
일요일 저녁이면 한 주 동안 입을 와이셔츠를 다리면서
내가 도대체 왜 이런 불편한 옷을 다리는데 시간을 써야 하나....
하는 불만을 항상 갖곤 했다.
그런데 1년 전에 회사가 복장 자율화를 선언했다.
너무 튀지만 않는 선에서 청바지를 입든, 티셔츠를 입든 운동화를 신든 맘대로 하라고 바뀐것이다.
와 해방이다!!!
이제 와이셔츠는 싹다 내다버리고
더 이상 다릴 필요가 없는 티셔츠 청바지를 사서 입고 다니면 된다!
실제 규정이 바뀌고 회사 사람들의 패션이 확! 바뀌었다.
나의 비극은 여기부터 시작되었다.
첫째. 내 옷 중에는 청바지와 티셔츠가 하나도 없었다.
즉, 다 새로 사야 하는데, 이게 또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다.
둘째. 진짜 비극 중의 비극.
이젠 청바지 티셔츠를 입어봐야 안 어울린다는 것이다.
찬란하던 그 옷걸이는 지난 18년동안 낡고 볼품없는 옷걸이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정말 보기 싫은게 청바지를 입은 쭈글쭈글 똥배의 중년아저씨라는 사실이 머릿속에 확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 혐오스런 아저씨가 되어버렸다는 걸 처절하게 깨닫고 말았다.
결론은....
나는 지금도 여전히 와이셔츠를 다린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비싼 돈들여 티셔츠로 바꿔봤자 도찐개찐이라는 점...
또 하나는 조만간 회사생활 접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 때까지는 이 낡은 와이셔츠들을 입고 있는게 얘네들..
그러니까 지금까지 볼품없는 이 단백질덩어리를 감싸안고 회사를 함께 다녀준 옷들에 대한 예의인거 같고.
정말 중요한 거 하나는 어느새 이러한 옷차림에 몸이 익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약간 시간이 더 지나고 어쨌든 나도 변화를 시도해보게 됐다.
회사 주위에 아웃렛이 많다.
청바지에 도전해 보겠다는 생각에 용감하게 어떤 가게에 들어갔다.
그 가게에 보기에 썩 마음에 드는 청바지가 있었다.
그런데 주인 아주머니는 별 접객을 하지 않았다.
우중충한 아저씨 하나가 와서 옷을 보는데 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나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청바지 하나를 집어들고 피팅룸에 들어가서 갈아입고 나왔다.
근데 왠걸?
의외로 청바지 테가 깔끔해 보였다.
그제서야 주인 아주머니도 "어머? 청바지 잘 어울리시네?" 하면서
이거 입어보라는 둥 저거 입어보라는 둥 접객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 사이 산에 촬영장비 메고 다닐 생각에
촬영장비만큼 몸무게를 줄인게 도움이 되었나보다.
그날 청바지를 두 벌이나 샀고 무려 9만원을 썼다.
지금까지 2만원 ~ 3만원 넘어가는 바지는 절대 산 적이 없었던 나였다.
그 덕에 드디어 청바지를 입고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상의는 여전히 와이셔츠를 놓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와이셔츠도 벗어버릴 수 있게 될까?
아마 그 때가 되면 나 역시 와이셔츠를 입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고
또 그건 그거대로 재미있었던 시절이었다고 기억하게 될 것 같다.
2018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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