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2022. 2. 13. 21:264. 끄저기/끄저기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별자리의 기원에 대한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이었다. 
별자리가 탄생한 곳으로 평가받는 수메르 문명부터 페르시아 문명에 이르기까지 
고대 중동 지역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한 고대국가들의 문명사는 나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이다. 

하지만 별자리와 관련된 직간접적 단서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특히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주요 동기 중 하나인 바빌로니아 부분은 전체 분량에 비해 너무나 짧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그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 책의 주요 테마는 고대제국 페르시아와 주변국가들 간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비록 별자리에 대한 간접적 자료들을 많이 찾아내진 못했지만 실망은 전혀 없었다. 
원형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과 값진 생각거리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 고매한 고대사회 

   이 책을 통해 얻었던 생각거리 중 하나는 고대 문명이 갖는 고매함에 대한 것이다. 
   특히 서양문명과 중동문명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오염되기 전에 이미 

   수준높은 도덕과 윤리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다. 
   전쟁이나 분쟁은 명분없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강자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약자를 괴롭힐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제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사회도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였기 때문에 범죄와 권력남용과 애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고대사회는 충분한 자정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마치 이 세상을 구원하고 개화시킨 것으로 과장되고 있는 

   그런 '고등'종교가 있기 전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고대 문명들에서 도덕과 윤리를 지탱시킨 기둥은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정의'와 '명예'였다. 
   정의는 지상의 그 어떤 강자보다도 더 강력한 존재인 '신들'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었고 
   명예는 인간들 스스로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었다. 
   사람은 절대적인 존재인 신들 앞에 겸손해야 했고 신들의 복수에 두려워해야 했다. 
   이웃들에게, 적에게, 그리고 역사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평가받느냐 하는 문제는 

   목숨을 걸어야 할만큼 소중한 가치였다. 
   즉, '정의'와 '명예'라는 두 개 축만으로도 고대 사회는 충분히 도덕적이었고, 충분히 윤리적이었던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과연 지금 우리가 말하는 고등종교들 때문에 현대 사회가 고대 사회보다 더 나아진 점이 있기는 한지
   도대체 그 가치와 유용성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다. 

2. 민주정 vs 전제정.

   메디아 인들에게 다시 권력을 되찾은 페르시아 인들이 
   어떤 정체로 향후 페르시아 인들을 이끌어 나갈 것인지 논의하는 부분은 특히 흥미로웠다. (3권 80장~83장)

   현대 사회가 서양문명에 편향된 시각으로 역사와 현상을 바라보고 
   나 역시 그런 교육에 푹 빠져 학창 시절을 지내오다보니 
   고대사회마저 오늘날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오류를 종종 저지르곤 한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국가연합과의  전쟁을 '전제정 vs 민주정'의 충돌로 단순 도식화하는 것 역시 

   이러한 오류 중 하나이다. 
   사실 페르시아는 자신들의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는 것이 합리적인지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 절대왕정을 선택했다. 
   그리고 소소한 사건들의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아테네나 스파르타가 

   페르시아보다 더 야만스럽게 느껴지는 일들도 많다. 

   페르시아 전쟁이 암묵적으로 '서양 vs 동양'의 구조를 환기시키는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도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와 아나톨리아에 존재하는 다양한 도시국가들이 이합집산하여 치른 전쟁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가장 강력한 위치 에너지를 행사한 국가는 페르시아였으며, 
   이에 대항하는 세력으로서 가장 강력한 국가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였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더 많은 요소들이 있다. 
   전쟁의 와중에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저마다의 이익을 기준으로 입장을 선택했고, 
   권력자들은 오늘날의 권력자들이 그렇듯 끊임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는 것이다. 

   실체에 있어서 이처럼 다양한 층위를 가진 사건을 오로지 하나의 도식으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한 짓인가?
   고대 페르시아 전쟁을 '민주정 vs 전제정'의 충돌로 단순 도식화하는 것은 
   자칫 당시 국가간의 관계를 오늘날의 기준인 '민주주의 vs 권위주의'로 치환하는 오류를 야기하고
   이는 암묵적으로 '선 vs 악'이라는 구도로까지 확장된다. 
   이 구도까지 확장되어 버리면 미국은 '선', 중동(이란)은 '악'이라는 편견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책을 접하며 예전에 내가 이러한 편견에 쉽게 압도당했다는 것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3. 한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일.

   오늘날에도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그 옛날 여행은 어땠을까?
   인간의 수명이 평균 서른도 안되던 시절. 
   60년을 살면 천수를 누리는 것으로 인정되던 시절. 
   헤로도토스는 동쪽으로는 바빌로니아까지, 서쪽으로는 리비아까지, 남쪽으로는 이집트 아스완까지, 

   북쪽으로는 도나우 강 너머까지, 그야말로 필생에 걸친 여행과 방랑을 통해 수많은 이야기들을 채집하고 기록했다.  
   그 와중에 헤로도토스가 겪어야 했을 물리적, 심리적 부침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걸어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헤로도토스가 남긴 이 책이야말로 최상에 속한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을것 같다.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의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이러한 특성을 장식하는 
   하나하나 보석과 같은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 책을 집에서 편히 책상에 앉아, 평상에 앉아, 소파에 앉아 접할 수 있다니, 
   정말 나는 얼마나 복이 많은 독자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살다보니 책에도 여러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들어온 책도 있고, 마지 못해 받아야 하는 책도 있다. 
그런가 하면 돈을 들여 구입하되, 이내 버려지는 책이 있고 서가 한 구석에 어쨌든 자리 하나를 차지하는 책도 있다. 
한번 읽고 나면 그만이라는 것이 이미 예상되어 빌려 읽고 마는 책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계속 찾게 되는 위대한 책들이 있다. 

이 책은 단연코 그 위대한 책들 중 하나이고, 
나의 서가 중심에서 언제든 선인들의 지혜가 보고플 때면 알현드리는 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