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맛.

2022. 3. 30. 21:254. 끄저기/끄저기

마타리와 예가체프는 완전히 다른 맛이다.

 

코로나 기간동안 저승문턱까지 갔다오긴 했지만, 

생판 처음보는 바이러스와 싸우는 몸을 위해, 어느정도 컨디션을 회복하고나서부터는 최대한 잘 차려먹고 있다. 

 

며칠 전에는 안주인마님께서 냉동실에 보관해둔 가자미를 꺼내놓으셨길래,

만 개의 레시피에서 적당한 레시피를 찾아 가자미 조림을 했다. 

 

자가격리에서 해제된 오늘은 비싼 한우고기를 부위별로 사와 구워 먹었고

저녁에는 굴미역국을 끓여 마른 반찬들과 함께 먹었다. 

식탁 위에는 딸기와 포도, 망고를 비롯한 과일이 그득그득하다. 

 

문제는 코로나에 맹폭당한 후 후각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덕에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 

 

후각이 사라지고보니 음식의 간을 맞추는 건 불가능하다. 

어떨 때는 묵직한 맛이 느껴지고, 어떨 때는 가벼운 맛이 느껴진다. 

각각의 느낌이 어떤 맛일지 전혀 모르겠어서, 

그냥 맘 편하게 레시피에 충실하기로 했다. 

 

한편 아프기 전에 만들어 놓은 오징어무침과 멸치볶음은 예전과 똑같은 맛이 났다. 

그건 즉, 맛을 입으로 느끼는 것도 아니고, 코로 느끼는 것도 아니고

내 기억으로 느낀다는 뜻이다. 

맛이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될 수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때마침 집에 예멘모카마타리가 있다. 

냄새를 못 맡는 지금 예멘모카마타리를 마시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커피를 모카포트로 진하게 우려내어 마셔봤다. 

 

글쎄...

 

다른 건 모르겠는데 커피야말로 향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후각이 돌아올때까지 마타리는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오늘은 예가체프를 내렸다. 

 

그런데!

 

어! 이거 맛이 다르다. 

향이 없어서 그저 똑같은 맛일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기억의 맛이 아니라 분명히 혀에서 느껴지는 맛인데도 다른 맛이 느껴진다!

 

그러고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맛이 이 커피들의 진정한 맛 아닐까?

 

오늘 먹은 굴 미역국이, 

어제 먹은 가자미조림이 

마치 컬러라곤 쪽 빠져버린, 흑백TV와 같은 그 맛이

그 음식들 본연의 맛 아닐까?

 

답은 모르겠지만, 

그냥 그 맛이 그 음식 본연의 맛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코가 제 기능을 회복하여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되면

또다시 만나지 못할 맛이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같이 담백하고 사랑스러운 맛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