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가 피기까지

2022. 7. 27. 14:134. 끄저기/끄저기

초봄에 든든집 베란다 앞에 심은 해바라기가 드디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 해바라기가 피기까지 몇 가지 일이 있었다. 

 

서울에 두 개밖에 남지 않은 대단지 구축 시영아파트 중 하나에 우리 든든집이 있다. 

돈에 눈이 멀어 용적률을 마구잡이로 높여 놓은 요즘의 아파트와 달리 

오래 전에 지어진 이 아파트는 높이도 적당하고 아파트간 거리도 넓을 뿐더러 

아파트 주위로 널찍널찍한 화단과 공원이 갖춰져 있다. 

 

그 덕에 우리 든든집은 하루 종일 수풀 냄새가 가득하고

이른 아침에는 새 소리가, 한 낮에는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최근에는 앞쪽 화단 수풀에 너구리 가족이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한 낮의 태양빛이 제법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하던 지난 4월 초.

이름 모를 풀들이 가득하던 베란다 앞 공터에

작은 틈의 흙을 갈아 엎고 해바라기 씨와 코스모스 씨를 뿌렸다. 

 

 

화단을 가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베란다에서 바라봤을 때, 

여름에는 해바라기가,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보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스스로 주위 환경을 이기고 자라나 한 두 송이 꽃이 피어나기만 해도

충분히 아름다울 거라 생각했다.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를 위해 해 준 일이라곤 파종 이후 물을 듬뿍 준 것 외에는 없다. 

내내 따가운 햇살이 계속되었고, 이따금 비바람이 몰아쳤다. 

 

여름이 다가오자 개망초 꽃이 무시로 피어올랐다. 

그 개망초 사이로 용케 싹을 튀운 서 너 그루의 해바라기와 코스모스 줄기가 눈에 띠었다. 

 

신비로왔다. 

 

용케 싹을 틔우고 줄기를 올린 코스모스 모습

 

그러던 어느날 

안쥔마님께서 해바라기 주위에 잡풀을 뽑겠다고 나갔다가 가드너의 눈에 띠고 말았다. 

 

가드너란, 

아파트 앞쪽 공터에 화단을 가꾸시는 어르신에게 우리 부부가 붙인 별명이다. 

언뜻 보면 소일거리인 것 같지만

나는 그 어르신이 소명의식을 갖고 화단을 가꾼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어르신의 소명의식이 지나쳐서 

그저 해바라기 한 두 개 키우겠다는 우리에게 과잉친절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가드너께서는 우리 부부가 베란다 앞에 화단을 가꾸고 싶어 하는데 할 줄 모르는 거라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어느날 갑자기 오셔서 해바라기와 코스모스 주위의 개망초를 모조리 뽑아내고 

벽돌을 둘러 번듯한 화단을 만들어놓으셨고 봉숭아를 가져다 심어 놓으셨다. 

 

가드너께서 만들어 놓으신 화단 모습, 처음에는 벽돌로 경계까지 만들어 놓으셨지만 벽돌은 내가 치워버렸다.

사람의 손길이 개입되어 버린 결코 바라지 않았던 인위적인 모습의 화단이 낯설기만 했고, 

갑자기 나타난 봉숭아 꽃들은 마치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와 안방을 차지하고 앉은 듯 불편하게 보였다. 

 

나는 우선 가드너께서 둘러놓은 벽들을 다시 걷어냈다. 

그리고 이 화단을 만들겠다고 뽑혀져 나가 말라 죽어버린 개망초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버렸다. 

 

그리고 가드너에게 찾아가 친절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하지만 

나는 인위적인 걸 싫어해서 벽돌을 걷어냈으니 양해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사실은 봉숭아 꽃도 원래 자리로 가져가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봉숭아 꽃은 그냥 놔두라고 먼저 말씀하시는 어르신에게 차마 그 말씀까지는 드리기 어려워 그만 두었다. 

 

사실 가드너께서 화단을 만들겠다고 베란다 바로 앞 땅을 갈아 엎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애초에 그 때, 어르신께 가서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어야 했다.

해야 할 말을 해야 할 때 하지 못한 것 때문에 

나는 괜히 며칠 동안 화단을 보며 불편해해야 했고, 

어르신도 내가 벽돌을 걷어버린 것이 썩 유쾌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무수한 개망초들이 잡초로 간주되어 죽어야 했다. 

 

이 세상에 잡초가 어디있겠는가?

 

목적을 갖고 대상을 바라볼 때, 목적이 아닌 것은 잡초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땅에서 자라는 것들마저 목적을 가지고 바라보고 싶지 않고

세상을 화초와 잡초로 나누어 바라보고 싶지도 않다. 

그런 퀭한 눈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진절머리나게 겪었기 때문이다. 

 

여름의 무릎 아래에 눈꽃이 뒤덮힌 듯 피어 있는 개망초들.

 

개망초들이 뽑혀나가 쌓여 있던 자리, 이 빈터는 볼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장마가 지나고 여름의 열기가 뜨겁다. 

휑하던 화단의 빈 자리자리마다 이름 모를 풀들이 다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모쪼록 모두 잘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년에는 빈자리를 모두 채우고 올 초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개망초 꽃이 다시 흐드러지게 피었으면 좋겠다.

물론 그때 또다른 모습의 꽃들이 살짝살짝 보인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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