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942 추억 - 돌아온 탕아

2022. 8. 29. 23:021. 별과 하늘의 이야기/하늘앓이 - 별지기의 이야기들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뚠뚠한 제 망원경 '첫눈이'를 비롯해서 
관측 장비를 두루두루 챙겨 차에 싣고 관측을 떠난게 말입니다. 

그 사이 연식이 더 구려진 사람과 차와 장비가 
바뀐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 길을 따라 942로 향했습니다. 

아, 물론 942 시골길 남쪽 방향에 안 보이던 철책들이 늘어서 있더군요. 
아마도 아프리카 돼지열병을 막기 위한 방어선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사진 1> 장비 설치 
             관리를 게을리하여 미안하기 그지 없는 나의 장비들. 
             그 사이 노안 때문에 손돋보기가 하나 늘었습니다. 
      
오랜만에 좋은 날씨라 그런지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파인더 브라켓을 찾지 못해 구걸하느라, 처음부터 많은 분들 귀찮게 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방법을 고민해 주셔서 더더욱 감사하고요. 

제 기억에 옛날의 942도 그랬네요. 

많은 분들이 함께 이곳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여전히 어디선가 별을 보고 계시겠지요?

주저리주저리 챙긴 가방에서 짱박아 놨던 파인더 브라켓을 용케 찾아 가슴을 쓸어내린 후 안심한 것도 잠깐.
잠시 후 열선밴드 콘트롤 보드가 타기 시작했습니다. 헉....이건 도대체 왜...ㅜㅜ;;;
어떻게든 후드로 버텨보기로 했습니다. 
암적응을 깨지 않기 위해 늘상 책상 앞에 놔두던 빨간 숫자 탁상 시계도 고장나서 작동되지 않더군요. 

그렇게 문제 투성이 관측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방패자리를 볼 생각입니다. 
워낙 2022년 미리내 알현이 처음이라 궁수자리나선팔이 휘어져 들어오는 그 지점을 봐야되겠다 싶었죠.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21시 30분을 넘어서자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알현드린 M11의 자글자글한 별들은 보자마자 숨이 막혀왔습니다.  
그 한 가운데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콕 박혀 있는 밝은 별 하나, 
그리고 그 주위를 사방팔방으로 V자리를 그리며 날아가는 오리들은 너무나 아름다왔습니다. 

방패자리 알파별을 향해 달려가는 어린 별들처럼 늘어서 있는 NGC 6664도 만나봤습니다. 

이때 뒷편 잔디에 장판을 깔고 앉아 있던 남녀 학생들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또 옛날 생각이 났네요. 비록 942는 아니지만. 

2017년 여름 경북 영양에 페르세우스 별비 출사 나갔을 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영양의 검은 밤하늘 아래 홀로 앉아 오들오들 떨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충남대 천문학과 학생들이 별비를 보겠다고 왔었습니다. 
비록 하늘은 끝내 열리지 않았지만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퐁퐁 피어나는 파란 우주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추억이 떠올라 행복했습니다. 

딥스카이 원더스에 따르면 NGC 6664 안에 세페이드 변광성 방패자리 EV별과 
미리내 나선팔의 추적지표가 되는 별목록인 이세르스테드 68-603이 있다고 합니다. 
준비가 서툴러 무슨 별인지 찾지는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꼭 찝어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다음 바라본 NGC 6712는 NGC의 구상성단들이 대개 그렇듯 마치 접안렌즈에 뿌려진 커다란 물방울자국처럼 보였습니다. 
관측한계선에 걸린 구상성단이라 별이 분해되지 않는다는데도 불구하고 배율을 130배까지 올려봤습니다. 
훨씬 커진 물방울이 시야에서 도망가기를 반복했습니다. 
저는 그 별덩어리를 붙잡아오고, 붙잡아오고를 반복했고요. 
은근 재밌더군요. 한참을 그러다가 놔주었습니다. 

이왕 배율을 올린 거, 
그동안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한다하는 천체들을 봤습니다. 
남쪽 하늘을 장대하게 장식하는 목성과 가을의 전령 안드로메다 및 M32, M110, 
그리고 불의 고리 M57 가락지 성운께도 인사를 드렸습니다. 

망원경이 높은 고도의 천체들을 훑다보니 어김없이 렌즈에 이슬이 들어찼습니다. 
어리석음에 막혀 있던 제 눈처럼 말입니다. 

하늘을 찌르던 자신감. 

2019년 11월에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글쓰는 별지기!

하늘을 바라보고, 그걸 글로 쓰면서 살아갈 생각을 했죠. 
당시 저는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천문연구원 천체사진 공모전에서 입상도 했고, 
2019년 7월 칠레의 개기일식을 한국인으로서는 유이하게 아타카마 라실라 천문대에서 알현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제 안쥔마님입니다.)
그해 9월에는 4년 동안 번역해온 딥스카이 원더스 한국어판이 출간 되었습니다. 

자신감을 하늘을 찔렀죠. 
그랬습니다. 그때는. 

그러한 자신감은 자만으로 바뀌었고
저는 어느순간부터 저만의 하늘을 꿈꿔왔습니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회사도 그만뒀겠다. 
밤하늘을 보러 나가고 싶으면 나갔죠. 
일기예보? 
그 따위 꺼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가 열리는 하늘은 나만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은 온전히 내꺼라고 생각했죠. 

책 번역도 하나 더 끝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별자리에 관심이 있다보니
별자리 88개가 형성되기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없는 책이었죠. 

글도 썼습니다. 
2021년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장편소설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죠. 
비록 본격적인 별지기의 글은 아니지만
별지기 생활이 소재 중 하나로 들어 있습니다. 

두 번째 장편 소설을 썼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마음에 드는 글이었습니다. 

나 스스로 이뤄낸 멋진 성과물들을 들고 
세상에 다시 나가겠다는 꿈에 들떠 있었습니다. 


깨지고, 깨지고, 깨져나가기. 

누구에게나 멋진 계획은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에 부딪혀 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새로 번역을 완료한 책은 
모든 출판사에서 퇴짜에 퇴짜를 맞았고
제 메일 박스는 어느새 '공손한' 출판사의 거절 메일이 가득한 메일 박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수상을 받은 그 글은 온데간데 없이 출판 소식은 깜깜 무소식이고
두 번째 장편 소설은 본심은 커녕 예심 통과도 못하는 글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과물이 없으니 세상에 다시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건 자존심의 감옥이었습니다. 
나 스스로 만들어 나 스스로를 가둬버린 감옥이었죠. 

하지만 진짜 문제는 별지기로서의 자세에 있었습니다. 

나만의 하늘을 보겠다는 욕심의 결과
어느순간 아무도 없는 컴컴한 밤하늘 아래 외딴 곳에서 
혼자 비를 맞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예전처럼 하늘이 내어주는 것을 받는 겸손한 별지기가 아니라 
그 하늘과 아득바득 싸우는 화가 잔뜩 난 별지기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늘과 별이 가득했던 제 삶은
어느순간 하늘도 별도 가리워진 구름가득한 캄캄한 삶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별을 볼 겁니다. 즐겁게 말입니다. 

저는 다시 별을 볼 겁니다. 

우선 여러 별지기 님들께 귀동냥을 하여 이런저런 일기예보 앱을 가득 깔겁니다. 
그렇게 제 스마트폰부터 겸손한 별지기 버전으로 만들겁니다. 
그리고 하늘이 허락해 준 그 날에 나가게 되면 내어주시는 대로 뵙고 올 겁니다. 
무엇보다 미리미리 준비하는 겸손함을 잃지 않고
하나든, 여러 개든 하나하나 소중히 살펴보고 올겁니다. 

밤도 새지 않을 겁니다. 
제 나이와 제 몸과 싸우지 않을 겁니다. 
몸이 아픈 신호를 보내면 장비를 거둘 줄 아는 겸손을 배울 겁니다. 

글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존심을 놔 버리니 감옥이 사라졌고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게 됐습니다. 
할 줄 아는 게 글 쓰는 것 밖에 없어 글은 쓰겠지만 
내 능력 밖의 것에 목표를 설정하고 나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겁니다. 

예전에는 내가 다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조금이나마 할 수 있다는 거에 감사드릴 겁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돌아갈 겁니다. 
 
도심의 불야성 한 가운데에서도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그 때 보이던 별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던 그때 그 마음으로 말입니다. 

사진 2> 2022년 8월 27일.
            예전의 그 행복을 오랜만에 다시 느꼈던,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땅에는 수많은 별지기들이 가득했던, 
            이제 막 하늘이 열리기 시작하는 
            그 942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