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바위가 해 준 말.

2022. 7. 31. 17:021. 별과 하늘의 이야기/하늘앓이 - 별지기의 이야기들

오랫만에 장비들을 점검하고 촬영장비를 꾸렸다.

 

드디어 때가 됐다.

오늘을 위해 지난 2개월 동안 매일 2만 보를 걸었고, 7킬로를 뺐다. 

 

이제 나는 별지기로 돌아갈 것이다.

별지기로 돌아가기 위한 첫 장소를 설악산 성인대로 삼았다.

 

오늘 밤새 울산바위에 미리내가 쉬어갈 것이다.

일기예보가 참 좋다. 

성인대로 향하는 오솔길

성인대를 마지막으로 찾은 때는 2018년 8월이었다. 

무려 4년의 세월이 흘렀다. 

달라진 게 참 많다. 

하지만 성인대로 오르는 길과 그 분위기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성인대 정상에 올랐다. 

많이 힘들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 동안 열심히 운동한 보람이 있었다.

 

땀으로 뒤범벅된 티셔츠를 벗고, 준비해온 방한복을 갖춰입었다. 

성인대 정상은 구름 속이었다.

그러다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공기 자체가 물덩어리였다. 

서둘러 우비를 꺼내입고 그 아래 베낭을 넣어 장비를 보호했다. 

 

오랜만에 다시찾은 성인대 낙타봉, 내가 더 늙은 거 외에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저녁 8시까지는 날씨가 안 좋을 거라고 예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구름이 모두 물러날 예정이었다. 

묵묵히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하늘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청명함을 알리는 일기예보 앱과 달리 성인대의 구름은 물러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배낭을 베고 누워 버렸다. 

구름 벽은 내가 누워 있는 곳이 어디인지조차 모르게 만들었다. 

공포가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라디오 볼륨을 올렸다. 

개구리들에게 미안했다. 

 

그러다가 설핏...

별이 보였다. 

내가 사랑하는 한여름의 물기를 먹은 별!

하늘이 열리리라는 희망이 들었다.

 

카메라와 삼각대, 열선밴드와 배터리, 렌즈 두 개. 칼과 전기테이프, 노끝을 챙겨들고 

물기를 잔뜩 머금어 미끈거리는 바위를 엉금엉금 기어 목표 지점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장비들을 설치했다. 

하지만 하늘은 다시 닫혔고,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검은 구덩이 안에서 30분을 버티다가 다시 기어 나와야 했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넋을 잃고 앉았다. 

별지기 복귀 기념으로 멋진 미리내 사진을 찍고 싶었다. 

온 하늘을 밝히는 찬란한 별빛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 그런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때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이미 이곳에서 그 누구도 찍지 못한 멋진 사진을 찍었는데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짐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니?

 너는 왜 그렇게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니?

 너는 왜 그렇게 잔뜩 화가 나 있니?"

 

"그들이 날 쫓아냈어요.

 온갖 거짓말로 나를 짓밟으면서,

 나에겐 말 한마디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요!"

 

"그럼 별 못 보니?"

 

"..."

 

"너는 뭐든 어렵게 하려고 해. 

 

 그냥 차를 몰고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에 가서 별을 봐.

 피곤함과 공포에 맞서며 밤새 별을 보겠다고 으르렁대지 말고

 가볍게 별을 보라고.

 

 가까운 주위 사람들도 챙기도록 해. 

 네 아내도 있고, 아내의 친구들도 있잖아.

 모두 별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니 먼저 제안해서 함께 별을 보러 가.

 가면서, 오면서 즐거운 얘기도 많이 하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어."

 

"제 와이프는 별보러 가기 싫다고 했어요."

 

"처음부터 너무 빡세게 해서 그래.

 그냥 아파트 공원에 망원경 꺼내두고 달부터 보여주는 걸로 시작해봐."

 

"..."

"너는 이미 많은 걸 이뤘어.

 그러니 다시는 무거운 장비들을 들고

 씩씩거리며 날 찾아오지 마.

 이렇게 오면 널 만나주지 않을거야."

 

"..."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담벼락처럼 빼곡하던 구름이 서서히 옅어지면서 속초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방한복을 벗어 차곡차곡 접었다. 

장비들을 모두 해체했다. 

배낭을 꾸렸다.

그 사이 날이 완전히 밝아졌다.  

 

성인대에서 내려오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강화도에서 한 두시간 밤하늘을 보는 것으로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어느 순간 전쟁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그러지 말아야겠다. 

마실 나가듯 나가 별을 보고 자정 전에 들어와야겠다. 

아파트 공원에서 달을 보는 연습도 해야겠다. 

 

하지만 꼭 대답하고 싶은게 한 마디 더 있었다. 

"제 문제가 뭐였는지 알겠어요.

 하라는 대로 할게요.

 하지만 여기는 또 올거에요.

 그땐 꼭 만나주세요." 

 

떠나기 전, 사진을 찍었다. 아주 가볍게 모든 걸 털어내고 다시 올 것이다.

 

2022년 7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