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8. 23:36ㆍ1. 별과 하늘의 이야기/하늘앓이 - 별지기의 이야기들
전세계 천문학자들이 모이는 국제천문연맹(International Astronomical Union) 총회가 부산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8월 11일까지)
원래는 2020년 8월에 열릴 예정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2년 연기되었습니다.
저는 천문학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하늘을 배우고 알아가는 것을 낙으로 삼는 아마추어 천문인으로서
IAU 창립 후 100년 만에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이 큰 행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뭔가 나같은 일반인이 머리 좀 디밀어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찾아보니 공개강연 프로그램이 똭! 있었습니다.
블랙홀 사진으로 대중적인 관심을 끈 프로젝트의 책임자 셰퍼드 S. 돌먼 교수님의 강의와
우주가속팽창으로 201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신 브라이언 슈미트 교수님의 강의가
금요일(5일) 저녁과 토요일(6일) 저녁에 벡스코에서 예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저 없이 신청했습니다!
또한 정보를 찾다보니 국립부산과학관에서 IAU 총회를 기념하는 대중천문학 강연도 무려 네 차례나 마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주저 없이 신청했습니다.
이렇게 8월 5일부터 7일까지 2박 3일간 부산 여행 일정이 수립되었습니다.
여름 휴가다 생각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1. 한여름의 지식 파티
벡스코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원 봉사를 하는 어린 학생들의 안내를 받아 참가 신청을 확인받고
동시통역기를 받는 것으로 한 여름의 지식 파티가 시작되었습니다.
첫번째 강의는 작년 4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상 최초 블랙홀 촬영을 이끈 돌먼 교수님의 강의였습니다.
사실 블랙홀은 촬영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당시 기사들의 제목은 정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블랙홀 주변에 대해 매우 정확하고 밀도 높은 데이터를 획득했다고 하는게 맞을 겁니다.
데이터 밀도는 떨어지지만 비슷한 사진이 이미 이전에도 여러 번 발표된 터라
저는 별 감흥없이 뉴스를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강연을 들으니 하나의 사진이 완성되기까지 거쳐야 했던 중간과정의 데이터들과 의미, 그리고 여기에 쏟아부은 천문학자들의 열정이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음날 저녁에는 브라이언 슈미트 박사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브라이언 슈미트 박사님은 우주의 가속팽창을 발견하여 201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분입니다.
우주의 가속팽창이 규명된 과정은 2014년 이강환 박사님이 쓴 '우주의 끝을 찾아서'라는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그 책을 읽었을 때 감동이 정말 컸었습니다.
새삼 그때의 감동을 되새겨볼 수 있었고, 과연 끊임없이 팽창하는 우주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되었습니다.
한편 강의도 강의지만 강의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열정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콩나물시루같은 교실에서 잦은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야 했던 우리 세대에게 천문학은 사치스러운 학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버텨내어 이제 경제적으로 남들에게 꿇릴것 없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갈 때도 있고 설 때도 있지만
이제 우리 아이 세대는 예전에 우리가 선망의 눈으로 바라봤던 선진국의 문명을 따라잡을 것입니다.
여기 이렇게 줄을 서서 당당하게 질문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한편 부산과학관에서는 토요일 오전/오후, 일요일 오전/오후 해서 총 네 개의 대중 천문학 강연이 열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강연이 좋았습니다.
원시행성계가 생성될 때, 안쪽에는 암석질 행성이, 바깥쪽에는 가스상 행성이 형성되는 이유,
혜성이나 소행성을 통한 물과 유기분자의 기원 등에 대해 단편적인 지식들이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단편적인 지식들이 이정은 교수님의 강연 덕분에 하나의 일관된 시나리오로 묶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상의 강의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블랙홀 촬영팀 돌먼 교수님 강연
https://youtu.be/dBmf0A4RCKQ
2. 황호성 교수님의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 강연.
https://youtu.be/EAXHufDpqPA
3 이정은 교수님의 생명의 근원 - 우주먼지와 얼음 강연
https://youtu.be/q1h-vK04Xhw
4. 브라이언 슈미트 박사님의 the State of the Universe 강연.
https://youtu.be/oQgvNfN5l0Q
5. 전명원 교수님의 최초의 별과 은하 강연
https://youtu.be/s6DbsiQfVEs
6. 제임스웹 우주망원경 프로젝트 참가자이신 손상모 박사님 강연.
https://youtu.be/CcCGKo5xYVo
2. 어디서 별도 못 본 촌놈이 왔나?
IAU 대중강연 두 개는 벡스코에서, 그리고 IAU 기념 천문강연 네 개는 국립부산과학관에서 진행됐습니다.
개통된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번쩍한 동해선을 타고 오시리아 역에서 내려
뜨거운 부산의 열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부산과학관을 향했습니다.
8월 6일 토요일에는 사실 고민이 좀 있었습니다.
부산과학관에서 오전 10시 반에 강연이 하나 있고, 오후 1시 반에 강연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벡스코에서의 강연은 저녁 7시에 예정되어 있었죠.
중간중간 남는 시간을 어디서 어떻게 보낼 것인지 조금 고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전혀 쓸데 없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부산과학관 곳곳에서 반가운 분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살짝 구경만 해 볼 생각에 올라간 천문대에는 이인숙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플라네타리움에는 박은성 선생님과 김란경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천문대에 방문하면 으레 하는 예식으로 주망원경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보조 관측실로 향했죠.
부산과학관 천문대의 망원경들은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보조관측실을 구경하고 있는데 해설사 선생님이 한 분 오셔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2급 5기 천문지도사시더군요.
대선배님이셨습니다.
김윤정 선생님(대선배님 이름)께서 천정을 열어 주시겠다고 하시더군요.
"아...예...뭐... 천정을 열어주시는 건 감사한데 지금 뭐 볼 수 있는게 있나요? 달도 아직 안 떴는데..."
"별이라도 보세요."
"별이요?... 아...예... 태양이요?"(사실 난 태양에 별 관심없음)
"아니 태양말고 별이요."
"네? 별이요? 무슨 별이요?"
"지금 보자... 카펠라 볼 수 있어요."
"네? 카펠라요?"
"네."
"마차부자리 알파별 카펠라 말씀이신가요?"
"네."
"카펠라를 지금 볼 수 있어요?"
"네 볼 수 있어요."
"지금 이 대낮에요?"
"네!"
여전히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는 저를 뒤로 하고
김윤정 선생님께서 망원경을 이렇게 저렇게 조작하셨습니다.
하지만 카펠라와 시리우스가 있는 쪽에는 구름이 들어와 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대신 김윤정 선생님께서 맞춰주신 대상은 목동자리 알파별 아크투르스였습니다.
저는 사실 접안렌즈를 들여다보기 전까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대낮에 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접안렌즈에 눈을 대자 그 너머에 선명한 주황색 빛을 두른 아크투르스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와! 와! 와! 와! 와!"
제 입에서는 끊임없는 감탄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계셨던 권일섭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어디서 별도 못 본 촌놈이 왔나 하겠네."
정말 그랬습니다.
저는 어디서 별도 못 본 촌놈이었습니다.
사람을 깨우려면
별 하나만 있으면 돼.
하지만
별지기라면
수천억 개 별을 준비해야 해.
예전에 제가 썼던 글입니다.
사람들은 태양이 떠야 일어나지만
태양이 지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밤하늘의 무수한 별빛에 깨어나는 별지기를 표현한 겁니다.
하지만 이 글은 거짓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낮에도 그 별들을 여전히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낮에 본 아크투르스의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날에도 강연이 끝난 후 천문대를 향했습니다.
차경희 선생님과 박희정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카펠라하고 시리우스를 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차경희 선생님께서 슥삭슥삭 10초 만에 카펠라를 겨냥하시고는 보라고 하시더군요.
그 접안경 너머에 놀라운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명한 노란색을 뿜어내는 별이 파란색 하늘을 배경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카펠라가 청백색 별인줄 알았습니다.
초가을 깨끗한 새벽 하늘에서 금성과 맞먹는 별빛을 뿜어내며 떠오르는
찬란한 별 카펠라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습니다.
카펠라는 노란색 별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한 낮에 바라본 별이 자신의 진정한 색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시리우스도 봤습니다.
한 밤에 만나는 시리우스가 그렇듯이 시리우스는 한 낮에도 선명한 은백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한 낮에 만난 별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감동은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부산에 온 건 IAU 강연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한 낮의 별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저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아마추어 천문인인것 같습니다.
내가 직접 보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바로 그 아마추어 천문인 말입니다.
3. 별처럼 소중한 분들.
2박 3일간의 짧은 기간에 여섯 개의 강연을 듣는 일정이다보니
누구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제 두 번째 망원경을 만들고 계시는 문창호 선생님 공방에 들를 시간을 내기도 여의치 않았죠.
하지만 의외로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강의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만난 전승렬 선생님은
2박 3일 6개 강의에 모두 함께 해 주셨습니다.
소중한 여름 휴가를 내고 오신 권일섭 선생님은 모든 강의를 맨 앞쪽에서 듣는 열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강의를 마친 박사님들과 사진을 찍고 서명을 받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부럽습니다!
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돌아갔을 때,
동료들은 휴가동안 누군가가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는 강연을 듣고
노벨상 수상자와 사진도 찍고 왔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들이 무려 이런 분들입니다!
아드님과 함께 오신 이인숙 선생님, 남편분과 함께 오신 이은선 선생님도 뵀습니다.
모두 코로나로 2년 이상 뵙지 못했던 분들입니다.
너무나 반가왔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국립부산과학관에서는
천문대를 든든하게 지키고 계시는 차경희 선생님, 김윤정 선생님, 이인숙 선생님, 박희정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한 낮의 별을 처음 만난 날!
함께 계셨던 선생님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플라네타리움에서는 박은성 선생님, 김란경 선생님, 권미정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2급 연수 동기인 박은성 선생님을 만났을 때는 어찌나 반가왔는지
두 손을 잡고 총총 뛰기까지 했습니다.
할 줄 아는게 없다보니 글을 게워내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게 사치가 되어 버렸고
혼자인게 익숙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혼자이지 않았습니다.
2022년 8월의 부산은 제겐 너무나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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