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세상을 바라보며 행복했던 순간

2022. 11. 1. 12:221. 별과 하늘의 이야기/하늘앓이 - 별지기의 이야기들

언제나 아름다운 조경철 천문대의 일몰풍경

지난 주말 조경철 천문대에 다녀왔습니다. 

 

주말의 조경철 천문대는 관람객이 많아 관측 조건이 좋지 않습니다.

별빛보다는 자동차 전조등이 넘쳐나는 장소가 되죠.

하지만 홍천 일기예보가 좋지 않아 조경철 천문대로 향했습니다. 

큰 기대 없이 그냥 앉아나 있다 오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나마 자동차가 덜 올것으로 생각한 

북쪽 주차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만, 

북쪽, 남쪽 할 것 없이 예상대로 자동차들이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관람시간이 끝나자 사람들도 많이 줄어들고

조경철 천문대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상외로 시상도 좋고 투명도도 좋았습니다. 

 

구름이 오락가락 하는 하늘에서 빛을 되받아치며 위용을 뽐내는 목성의 모습

 

천정까지 떠오른 페가수스자리 대사각형에서 '작은돌고래(Delphinus Minor)'라는 자리별을 찾다가

가을의 상징과도 같은 안드로메다 은하와 M32, M110을 돌아보다가

메시에 마라톤 때마다 나를 애먹인 M1을 찾아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오리온자리로 향했습니다. 

 

오리온대성운은  정말 볼 때마다 황홀합니다! 

 

촘촘하게 누벼놓은 검은 우주 한 가운데 

실밥이 터져 솜이 우르르 쏟아져나온 모습입니다. 

 

오리온대성운과 그 주변을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에 딥스카이 원더스를 펼쳤습니다. 

 

그런데 오리온대성운이 '초록색'이라는 글이 있더군요. 

다시 오리온대성운을 봤습니다. 

그순간.

정말 초록색이 보이더군요!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오리온대성운에서 에메랄드 빛이 나고 있었어!"

 

딥스카이 원더스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었습니다. 

"우리 눈은 강력하고 깊은 붉은색을 만들어내는 수소 복사에는 둔감하지만

 이중이온화산소에서 방출되는 초록색 복사는 잘 인식해냅니다."

별지기 생활을 하다보면 

이 최면술과도 같은 마법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전혀 눈에 보이지 않던 색깔이 

글을 읽거나 다른 분들의 말씀을 듣고 나서야 눈에 들어오는가 하면 

한 번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보석들도 있죠.

 

트라페지움 F도 그 전형적인 예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산청 별아띠천문대에서 18인치 돕으로 트라페지움 E별을 본적이 있습니다.

제 11인치 SCT로는 도저히 볼 수가 없던 별이었죠. 

 

그건 정말 감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마치 두 마리의 어미 향유고래(트라페지움 A, B)사이에 

새끼 향유고래가 보호를 받으며 유유히 하늘을 헤엄쳐가고 있는 모습이었죠. 

 

한 번 눈에 들어온 트라페지움 E는 그 다음부터 

11인치 SCT의 130배율에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첫눈이가 명색이 초점거리가 깡패라는 복합굴절망원경인데 

오늘 트라페지움 F도 보고 말아야겠다!

 

트라페지움 별배치도

 

다시 오리온대성운을 바라봤습니다.

트라페지움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포커서를 조심조심 조작했습니다. 

 

하지만

분명 칼상을 맞췄는데도 트라페지움 F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배율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13밀리 아이피스를 채결했습니다.

무려 215배!

경위대에서는 시상 측정 용도 외에는 사용하지 않던 아이피스입니다. 

 

다시 초점을 맞추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약간의 조정에도 별빛은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쉴 새 없이 도망가는 별들을 끌어다 화각안에 넣기를 반복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초점을 맞췄음에도

트라페지움 F는 끝내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평소보다 우수한 시상과 투명도를 보여주는 하늘에

초점거리 2800,  11인치 구경에

포커서는 페더터치에

아이피스는 에토스에

이 하이엔드급 구성에도 트라페지움 F를 볼 수가 없다니...

 

결국 문제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하늘이 허락해주기 전까지는 볼 수 없다는 말을 믿습니다. 

오늘은 허락받지 못한 날이라 생각하고 맘을 접었습니다.

이렇게 접어놓은 마음은 다시 짐을 꾸려 길을 나서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겁니다. 

 

트라페지움에서 벗어나

NGC 1977로 향했습니다. 

오리온 대성운을 향해 비스듬한 깔때기 모양을 하고 있는 NGC 1977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별 무리였습니다. 

 

오리온 대성운을 

커피와 우유가 막 뒤섞이기 시작한 라떼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NGC 1977은 우유를 이제 막 부어낸 병의 주둥이처럼 보입니다. 

그 주위로 별빛들이 우윳방울마냥 통통 튀고 있었습니다. 

 

그 위에 있는 NGC 1981은 

그냥 W자 모양의 별 무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찬란한 별들이 늘어서 있는 별 무리였습니다. 

9개의 밝은 별들이 틀을 잠고 

5개의 작은 별들이 사이사이에 오종종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오리온대성운 남쪽에 있는 오리온자리 요타별로 향했습니다. 

 

또한번 최면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파인더로는 하나의 밝은 별처럼 보이는 오리온자리 요타별은

122배율에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바짝 붙은 2개의 별과 약간 떨어진 하나의 별로 분해됐습니다. 

놀라운 건

백색과 파란색, 주황색이라는 이 삼중별의 색깔이 선명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그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급하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남서쪽으로

스트루베 747과 745라는 이중별을 보는 것으로 오늘의 관측을 마쳤습니다. 

 

별이 가득한 하늘 사이로 별똥별이 떨어졌습니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고 

의자에 몸을 맡기고 누워

온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조경철 천문대에서 바라본 세상 풍경

 

사실 오늘은 

구석에 쳐박혀 있던 스카이트래커를 5년 만에 꺼내 가져왔습니다. 

 

노안이 더 심해지면 

나도 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연습을 시작해 볼겸 챙겨왔습니다. 

 

5년만에 작동하는 장비가 

문제가 없을지 걱정했지만

스카이트래커는 여전히 잘 작동했고

추적성능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이 멋진 장비를 제대로 사용해 준 적이 없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년 만에 전원을 공급받았음에도 훌륭한 추적 성능을 보여주는 스카이트래커 촬영사진

 

또한번

역시 문제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람의 정신을 챙겨들고

장비를 걷었습니다. 

철수하기 전 설정컷 한 장!

집에 돌아오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고, 

세상이 온통 난리였습니다. 

 

그 하늘 아래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죄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사그라든 젊은 영혼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