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진주 - 경남 진주 여행(7월 10일~12일)

2023. 7. 14. 12:284. 끄저기/끄저기

1. 내겐 익숙했던 진주

진주성은 수많은 호국영령께서 잠드신 곳임에도 논개 사당인 의기사가 뿜어내는 엄숙함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곳이다

 

난 진주라는 도시가 많이 익숙하다.

산청 채울집 생활을 할 때 와인에 한참 맛을 들였었다. 

그런데 시골 하나로마트에는 와인 종류가 많지 않아
순전히 와인 한 병 살 생각으로 진주에 나가 이마트에 들렸었고

이왕 나선 길에 진주성도 한 바퀴 돌아보곤 했다. 

 

그때 제법 비싼 와인을 사 마신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회사를 갓 그만둔 처지였고 딱히 벌이가 없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돈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비싼 와인을 덜컥 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낯선 시골 생활을 하는 나에 대한 선물이었던 것 같다. 

생판 처음 하는 시골 생활에
애써 한 잔 따라 마시는 와인이 맛이 없으면 맘이 더 상할 것 같아 돈을 썼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와인 맛은 괜찮았고 돈이 아깝지 않았던 것 같다. 

 

2022년 9월 15일. 
사천에 어떤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오랜만에 진주에 들렀다. 

 

그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사천에 있는 진주냉면 맛집을 하나 소개 받았다. 
그 다음날 귀경하기 전에 그 집에 들러 인생 처음으로 진주냉면이라는 걸 맛 봤다. 

 

참~~~~ 별루였다. 

 

그 맛을 말로 표현하자면

화려한 명함으로 어떻게든 실력없음을 가려보려는 느낌이었다. 
고명이 화려하기만 할 뿐 맛의 밸런스는 없고

면발은 그저 싸구려 고기집 후식 냉면 같은 그런 냉면이었다. 

 

이쨌든 이건 나의 경험일 뿐이다. 

 

안쥔마님께서는 아직 그 유명한 진주성 의암도 보지 못했고

냉면을 좋아하면서 진주냉면도 맛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진주여행은

안쥔마님께 진주성의 촉석루와 의암을 보여주고

진주냉면도 맛보여 드리자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떠났다. 

 

그런데 진주 여행에서 뜻밖에도 어렸을 때의 나를 만났다. 

 

2. 형평운동 기념탑

 

진주에 도착하자마자 안쥔마님께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낸

참진주면옥이라는 진주냉면 식당을 찾았다.

 

진주냉면을 처음 만나는 안쥔마님은 기대가 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진주냉면에 실망을 한 경험이 있어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냉면은 뭐니뭐니해도 물냉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번에 만난 진주냉면은 참! 훌륭했다. 

 

진주냉면은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과 달리 육전고명 때문에 화려한 외모를 자랑한다. 

그 화려한 고명들이 어우러지지 못하고 각자 놀아나는 어지러운 맛이 예전에 느낀 진주냉면 맛이었는데 

이곳 냉면은 냉면 본연의 은금함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냉면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닝닝한 육수가 품고 있는 은근함 아니겠는가!

 

반면 기대가 컸던 안쥔마님은 실망이 컸다고 하니 맛이라는게 참 음식 자체가 만드는 결과만은 아닌 것 같다.

 

식사를 마친 후 진주성을 향해 이동했다. 

두꺼운 여름 구름과 눈부신 햇살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여름 날씨였다. 

 

남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진주성을 향하는 길에 멋지게 조성되어 있는 대나무 숲길이 보였다.

한번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어

때마침 나타난 경남문화예술회관에 주차하고 대나무 숲길로 향했다. 

 

대나무 숲 울창한 남가람 별빛길! 참 멋진 산책길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기념탑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그러려니하고 지나가는데 탑의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형평운동 기념탑!"

 



형평사!!!

한창 태백산맥 류의 전집을 읽어재끼던 시절에 읽었던 책 중 하나가 바로 ‘백정’이라는 책이었다.
그 책을 통해 ‘형평사’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한 계층이던 ‘백정’의 평등운동이었는데, 
그 형평사 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알게된 사실이었다. 

 

‘형평’이라는 단어가

나를 한창 푸르렀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데려갔다.

그 자리에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어찌보면 진보사상 중에서도 최전선에 있는 진보사상이 '평등사상'이다. 
그 사상은 오늘날 ‘차별금지법’ 법제화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보수적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진주라는 도시에 형평운동 기념탑이 있다니 정말 놀라웠다.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통영에서도 한때 윤이상 기념관과 통영국제음악제를 '빨갱이와 빨갱이의 음악제'라며 없애려 한 소동이 있었다. 
이곳 진주에서도 누군가가 이 기념탑을 빨갱이 탑이라고 지목하는 순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어쨌든 형평운동 기념탑이 무사히 잘 있는거보니

보수적인 진주 사람들이 '다행히' 이 기념탑에는 관심이 없나보다.

그런데 그 다음날 진주성 구경을 하다가

국립진주박물관에서 형평운동 특별전시를 하고 있는 걸 알게 됐다. 

 

공정과 애정의 연대 형평운동 특별전(7월 16일까지) : 백정 사진들로 장식된 입구가 인상적이었다.

 

그 덕에 나도 잘 몰랐던 형평운동의 내력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형평사'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알게된 소설 '백정'도 다시 볼 수 있었다. 

이곳에 머무는 시간 하나하나가 너무나 행복했다.

전시를 보고 나서며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게 됐다.

 

진주시민들이 보수적일지는 몰라도 개념이 없어서 빨간당을 찍는게 아니다. 
그저 그들도 나라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빨간당을 찍은거다. 
그 마음은 내가 파란당을 찍는거랑 다를바 없을거다. 
문제는 그런 국민의 성원을 받아 권력을 잡았음에도 정치를 제대로 하지 않는 빨간당의 권력자들에게 있는 거다. 

어떤 한 지역을 정치적 결과로 판단해 버린다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일까?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도 결국 빨간당에 더 많은 투표를 한 나라에 살고 있으니
그걸 근거로 내가 외부인에게서 꼴통으로 매도당한다면 기분이 좋을까?

세상은 앞으로 가기도 하고 뒤로 가기도 하지만 

내가 겪은 생애를 뒤돌아 봤을 때 결론적으로는 앞으로 나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역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친일파가 그린 논개 영정은 철거되었고
완전 당당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논개 영정이 사당에 모셔지지 않았는가?
또한 진주대첩의 현장이었던 진주성 동쪽 부분도 착실히 다시 복구되고 있지 않은가?

 

논개 영정, 친일파가 그린 여리여리한 논개 영정이 철거되고 새로 설치된 당당한 논개 영정이다.

 

3. 각자 도생의 시대

 

그날 저녁 삼천포에 있는 용궁수산시장에 갔다.

손님도, 문 연 가게도 없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는 용궁수산시장 풍경,

사실 진주에 내려올 때는 수산시장에 안 갈 생각이었다. 

 

지난 정권에서는 분명 문제였던 일본 오염수 방출 문제가

현 정권에서는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듯 침묵하는 경남의 어민 및 수산업 단체가 괘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바꿨다. 

 

과연 그 분들 중 누가 오염수 방류를 밀어주라고 빨간당을 찍었겠는가?
나쁜놈들은 정권을 쥔 놈들이지 이분들이 아니다. 

 

때마침 막 문을 닫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시길래 부탁을 해서 회를 하나 떴다. 
오염수 방류가 시작되면 소비를 아예 안 하기는 어렵겠지만
수산물 소비는 최대한 줄일 것이다. 

회를 먹는 것도 마지막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인지 말은 안 했지만 참 안 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이 어려운 각자도생의 시기를 잘 버텨내시기를 바랄 뿐이다. 

 

4. 뜻밖의 진주


여행을 떠나기 전 비가 많이 온다는 예보에

안쥔마님께서 여행 일정을 미뤄야 하는거 아니냐고 물었다.

 

하지만 난 걱정이 없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수도권 얘기를 마치 대한민국 전체 얘기인것처럼 떠드는 경향이 있다.

 

일기예보를 보니 비가 많이 온다는 것은 수도권 얘기일 뿐 

진주는 상관없었다.

 

하늘의 일이라는게 예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다행히도 여행하는 동안에는 날씨가 아주 좋았다. 

 

그저 안쥔마님께 진주성과 진주냉면 맛을 보여드리려고 떠난 여행인데

뜻밖에 어렸을 적 나를 만난 멋진 여행이 되었다.

 

진주에는 또 내려가볼 생각이다.

형평운동의 시작점이 된 진주교회와 형평운동에 평생을 바친 분들의 행적을 답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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