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24. 16:20ㆍ4. 끄저기/끄저기
* 약 30% 수준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대학로에 나가 연극을 보았다.
결국 2012년도 첫 번째 연극을 6월에 들어서야 보게 된 것이다.
늘상 일에 밀려 마음의 여유가 없다보니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주말도 오랜만에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만에 돌아온 주말에 청소도 해야하고, 잠도 자야 하고, 책도 봐야 하고, 블로그도 해야 하고...
결국 뭔가 쫓기는 듯한 주말을 계속 보내다보니 시간을 내서 그 멀디먼 대학로까지 가기가 쉽게 느껴지지 않았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바쁠수록 좀더 마음을 여유롭게 가져갈 필요가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제라도 다시 연극을 보러가기로 마음을 먹었고, 조기예매표를 통해 7월 공연 관람 스케줄도 잡아놨다.
어쨌든 작년에 그랬듯이 두 달에 한 번은 연극을 꼭 보려갈 생각이고 이 연극 '판타스틱 체인지'는 올해의 첫 연극이 되었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허수룩한 층층 계단이 빼곡이 늘어선 소극장.
항상 소극장의 정경은 다정스럽기만 하다.
회사에서는 하루종일을 앉아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엉덩이가
비록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아 아파오지만,
어쨌든 소극장 전용 엉덩이살을 키우는것도 내 노력하기 나름이다.
1. 모든 아쉬움을 매조지하는 결론의 힘.
여느 소극장 연극처럼 경쾌한 시작.
연극은 현재 자신의 남편에 만족하지 못하는 여주인공이
원하는대로 남편을 바꿔나간다는 얘기로 구성되어 있다.
연극의 내용은 사전에 전혀 알지못했고, 표를 구입하며 받은 유인물을
보고서야 대충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지만
연극이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내용이 무슨 내용일지, 결론이 어떻게 날지가
예측되었다.
쉽게 예측되어 버리는 결론으로 인해 '결국 오늘도 배우의 개인기나 보고 가야 하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냥 가볍게 보고 나가자는 편한 생각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결론 부분에서는 신선한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론에 대한 뻔한 구도를 예상했는데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상치 않게 흘러갔을 뿐만 아니라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결론이
다소 동기부여에는 약하다고 느낀 시작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날려버림과 함께
지금까지 극을 이끌어온 배우 하나하나의 소소한 에피소드와 재기발랄한 연기에 후광을 실어주기도 하였다.
역시 이런 연극에서 결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새삼 알게 만들어준 연극이다.
2. 스토리 라인에 위로 튀어 오르는 캐릭터와 함께가는 캐릭터.
처제와 남편이라는 두 명의 캐릭터가 인상에 남는 연극이었다.
'처제'는 이야기 구성 전체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캐릭터이고
배우의 역량이 윤활유의 성능을 극적으로 상승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마 이 연극을 접하는 사람은 처제의 너무나 사랑스러운 연기에서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저런 처제 하나 있으면 정말 용돈 펑펑 줬을 텐데~' 라고 생각했을 정도였고,
연극이 끝나고 난 다음 머리에 남는 장면은 모두 이 처제가 만든 장면이었다.
한편으로 연극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도 뼈대가 되었던 기둥으로서의 캐릭은 남편 '철수'의 캐릭터였다.
배우께서 너무 훌륭하게 연기를 소화하셔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딱, 그 남편의 기운을 처음부터 끝까지 물씬물씬 풍겼다.
결국 이런 캐릭터는 연극이 끝나고 일반적으로 기억에 남지 못한다.
왜냐하면 캐릭터 자체가 완전히 스토리와 한 몸을 이루고 있어 스토리 라인만이 기억에 남는 연극 이후에
이 캐릭을 따로 분리하여 얘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안쥔께서 이 캐릭이 얼마나 훌륭한 연기를 했는지를 환기시켜주지 않았다면
역시 이렇게 관람평에 적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이 연극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은 캐릭터(배우)는 철수라는 캐릭터와 그 연기를 수행해주신 배우이다.
3. 발칙한 상상
연극은 그것이 어떤 연극이든지간에 항상 끝나고 나면 마음속에 풍부한 감수성이 생긴것 같아서 좋다.
결국 이 맛에 연극을 보고 연극에 중독이 되어 가는것 같다.
이 연극을 보면서 이런 상상을 해봤다.
스토리는 여러 남편을 겪으면서 결국 함께 생활했을 때 드러나는 단점에 주목하고 있지만 반대로 그 개개 남편의 장점에 중점을 두면 어떨까?
그래서 결론으로 그 남편들의 장점을 모아 만든 슈퍼맨을 만나면서 끝나는 거지~, 아니면 원래 남편이 그런 남편으로 변해버리든가~
그냥 내맘대로 코미디를 만든다면 이런 발칙한 구성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결말로 인해 결국 그 단점이 상쇄되긴 했지만
동기부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작 부분에서 공감 요소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 이 연극의 최대 단점이었던 거 같다.
잘 나가는 남편들에 비교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주인공보다는 주인공 스스로도 충실히 역할을 수행하는 보통 와이프의 모습이지만
마냥 평탄하고 자상하기만 한 남편에게 질려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으로 시작했다면 공감 요소가 더더욱 충분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도입부의 그 억지스런 상황 설정은 마지막 남편에게서 고스란히 되돌려받는 장면 연출을 위한 장치였음은 나중에 알 수 있었지만
사실 이 부분은 도입부와 수미쌍관이 아니더라도 개인이 철저하게 무너지는 장면 설정으로는 그 자체만으로도 괜찮았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도입부의 억지스러운 감정이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다.
배우들의 수준급 연기, 알기 쉬운 스토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운을 남기는 훌륭한 결말이 전체의 극을 잘 살려준 괜찮은 연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