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시스템에 대한 회의

2014. 12. 1. 22:494. 끄저기/끄저기

 

 

 

예전에 인도 출장 중 있었던 일이다.

 

점심식사 후 인도 직원들에게 한국인들이 늘상 하는 인사는 "Did you have lunch?"였다.
식사 후 오며가며 지나치는 아는 사람들에게 가벼운 인사말로 하는 "식사 하셨어요?"를 그대로 영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다가 한 번은 인도 개발자 한 분이 나에게 "왜 한국 사람들은 우리가 밥 먹었는지 여부를 그렇게 궁금해하냐?"라는 질문을 했다.
문화차이에서 오는 당연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반세기 전만해도 세계 최빈국이었고, 그래서 밥 굶는게 일상적인 일이었다고, 그래서 식사를 했는지 안했는지를 확인하는게 중요한 일이었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기아는 우리 대한민국 사람에게는 그리 먼 얘기가 아니다.

 

최근 여전히 기아를 겪고 있는 같은 민족이 북쪽 땅에 있다는 사실 역시 '기아'가 결코 남의 문제는 아님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기아'라는 문제에 대해 피상적으로, 혹은 남의 일로만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 원인과 해결 방법에 대해 같이 고민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기아의 문제에 대한 생각의 갈피를 정리해 줄 수 있는 책이었다.

 

 

1. 2014년의 상황 

   이 책의 초판은 2000년 봄에 발행되었다. 벌써 14년이나 더 된 오래전에 말이다. 
책이 출판되던 당시 FAO 통계에 의하면 '만성적이고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인구'가 1999년 8억 2천 8백만명에서 2000년 8억 5천만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화려한 뉴밀레니엄의 축포가 전세계를 장식하던 그때, 기아 인구는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이 책의 초판이 발행된 이후 14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을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United Nations, FAO) 사이트에서 찾아보았고, 아마 아래의 2014년 기아 지도가 이에 대한 대답이 될 것으로 보인다. 

 

 

 

출처 : FAO Hunger Map 2014 

http://www.fao.org/economic/ess/ess-fs/en/


이 표에 의하면 약 8억 5백만명이 여전히 만성적이고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니, 14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은 셈이다.
  
다만 이 숫자가 지난 10년간 1억명이 줄어든 수치이며, 1992년 이래 2억 9백만명이 줄어든 수치라는 것에서 아직은 인류가 더디지만 진보를 계속 해나가고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여지는 있다고 할 수 있다.

 

 

2. 왜 굶주리는가?

그렇다면 이 책이 목적으로 하는 그 질문을 던져보자.
물질의 풍요가 넘쳐나고 하루에 수천만 톤의 음식물 쓰레기가 발생한다는 이곳 지구에서 왜 이처럼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가?   
    

아이와 아버지의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는 시종일관 다양한 나라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빈곤과 굶주림의 모습이 다뤄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전쟁터보다도 더 치열하게 기아와 싸우고 있는 유엔 및 비정부 기구의 용감한 학자들과 봉사자들의 모습도 함께 다뤄지고 있다. 
   

그 속에는 살릴 수 있는 아이와 포기해야 하는 아이를 선별해 내야만 하는 비극의 현장이 증언되고 있고, 비행기로 식료품을 일괄 투하하는 행위의 비현실성과 위험성이 구체적으로 적시되고 있으며 식량지원이 반군이나 테러리스트를 오히려 양성하는데 쓰인다는 비난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선언도 있다.

 

무엇보다도 인구밀도의 과잉이 가져오는 폐단을 우려하며 기아가 마치 자연이 스스로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암묵적인 생각 -  즉, 어느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은 결국 하나로 문제로 귀결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스템의 문제이며,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십 년동안 용감하고 헌신적인 학자, 관료, 지도자, 봉사자들에 의해 이런저런 시도가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인 사람들의 영웅적인 행동이 늘 한계에 봉착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스템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도 아니고 어느 특정 나라의 정치적 부패도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기아를 만성적이고 지속적인 사건으로 만드는 이 시스템의 민낯에 대한 단적인 예로 등장하는 것이 칠레에서의 아옌데 정권 붕괴와 부르키나파소에서의 토마스 상카라 살해 사건이다. 
   

1970년 11월 칠레의 정권을 잡은 인민전선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소아과 의사 출신으로서 자국 어린이들의 심각한 영양 부족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대통령이었다.
그는 매일 0.5 리터의 분유를 무상배급하겠다는 공약을 이행했고, 공약의 이행을 위해서는 남미의 분유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던 스위스의 다국적 기업 네슬레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의 개혁으로 인해 남미에서의 영향력 축소를 우려한 미국과, 네슬레를 포함한 다국적 기업들은 아옌데 정권의 모든 정책을 철저하게 방해했고,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 쿠테타에 의해 아옌데가 대통령 궁에서 살해당함으로써 모든 개혁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1983년 쿠테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부르키나파소의 지도자 토마스 상카라의 개혁과 좌절도 유사한 공식을 보이고 있다.

 

그는 자주관리 정책을 통해 탈중앙집권화를 도모하며, 비대한 공직사회를 개혁하고, 부패를 척결해갔다.
그리고 철도건설사업을 통해 종족간의 갈등 발생을 억제하고 인두세의 폐지와 토지의 국유화 및 재할당을 통해 4년만에 자급자족 경제를 성취하고 한층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문제는 별로 눈에 띄지도 않던 이 나라의 개혁 성공이 주변 부패한 정권이 장악한 국가들에게는 별로 반가운 현상이 아니었고, 더더욱, 이 부패한 국가들을 꼭두각시로 거느리고 있었던 프랑스에게 불편함을 안겨주었다는데 있었다. 

 

결국 상카라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상카라의 동료 콩파오레에 의해 살해되고 부르키나파소는 과거 식민지 종주국 프랑스의 전체 경제계획에 충실히 부역하는, 즉, 자기 나라의 식량을 생산해야 할 땅을 프랑스에서 필요로 하는 작물을 공급하는 땅으로 전락시키는 나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물론 그 작물의 수입이 부패한 지도자와 관료에게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3.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저자는 이러한 부당한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들과 그 국가들을 움직이는 강력한 금권, 이른바 자유주의 시장원리주의자들의 악마와 같은 속성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풍경은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로서 제시하는 저자의 방향은  크게 공동체적 대응과 개인적 대응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 공동체적 대응이다. 
   

그는 단호히 '원조'보다는 '개혁'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혁명적인 행동'은 '인도적인 구호'를 뛰어넘는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배고픔의 고통에 시달리는 민중들이 그 문제의 원인으로서 금권에 휘둘리는 자유주의의 본질을 인식하고 그것에 놀아나는 부패한 관료들에게 단합된 힘을 과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앞서 칠레나 부르키나파소의 예에서 보듯이 한 국가가 혁명의 첫단추를 꿰기 시작했다면, 자유주의의 망상에 찌든 국가들이 이를 훼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러한 행동은 범죄행위로서 분명히 인지되어야 하고 국제적 범죄행위의 예방을 위해 세계경제의 모든 메커니즘은 한가지 대전제 즉, '기아는 극복되어야 하며 지구상의 모든 거주민은 충분히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사실에 복종해야 한다. 
   

또한 경제의 유일한 견인차는 이윤지상주의라는 입장,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두면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허구와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
시카고의 곡물거래소는 문을 닫아야 하며, 협의 등을 거쳐 제 3세계에 대한 식량 공급로가 확보되어야 하고  정치가들을 눈멀게 만드는 어리석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폐지되어야 한다. 
   

둘째, 개인적 대응이다. 
   

모든 개개인은 인간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임을 인식해야 한다.
여기에서 연대감이 싹트고, 그 연대감은 인간성의 회복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기아가 마치 자연이 스스로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어느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깨닳아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불가피한 희생에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은 사람일 확률이 높다.
즉, 그 희생은 '남'의 희생이지, '나'의 희생이 아니므로 그 점에서 이미 스스로 보편타당성이 상실한 궤변을 늘어놓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아'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전 세계의 식량 생산량이 120억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통계는 이미 1984년에 도출된 내용이다.
생산성의 증가는 분명 부양가능인구의 수치증가를 가져왔을 것이며, 지난 30여년동안 몇차례 발생한 식량가격의 폭등은 생산량의 감소 때문이 아니라 일정 식량가격을 유지하거나 이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이른바 '선진국'들의 이기심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4. 잘못된 시스템은 극복될 것인가?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절대 그 누구도 구타하거나 가혹행위를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군대를 가서 알게 되었다.
부대의 담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개인의 자질이 대입될 여지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곳에는 대한민국이라는 특정 역사를 가진 나라의, 군대라는 특정 집단의 관행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 관행은 반복적인 행동을 강요했고, 그 반복적인 행동은 다시 관행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한마디로 어떤 시스템이 있었고, 그러지 않아도 '개인'이라는 개념이 철저히 말살될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그 시스템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아마 처음 연병장 구석 창고에 집합한 날 깨닫게 된 것 같다.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시스템이 있고, 그 시스템 안에서 개인은 죄책감도, 책임감도, 수치심도 느낄 수 없으며 심지어는 존재라는 의식 자체도 쉽게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비록 이젠 군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머리에서 희미해져가고, 군대에 다시 끌려가는 꿈도 이젠 전처럼 자주 꾸지 않게 되었지만, 아직 나는 군대에서의 그 시스템보다 더 악랄하고, 더 교묘한 시스템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바로 이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통해서였다. 
   

우리는 자유주의가 만연하는 자본주의의 시스템에서 살고 있다. 
   

이른바 '낙수효과'라는 말같지도 않은 궤변이 경제이론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이 사회를 장악하고 있다.

대기업과 대형교회 목사들의 세습에도 모자라, TV에서는 유명 텔런트들을 부모로 둔 어린 아이들이 아무런 노력없이 TV 프로그램을 차지하면서 세습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 부모와 제작진의 개념없음은 둘째치고, 이를 소비하는 사람들마저도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이로인해 누군가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장을 보러 마트에 가면 진열장마다 물건이 쌓여있다.
많은 물건들이 팔려나가지만, 한편으로 많은 물건들이 폐기되고, 그 폐기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인간의 욕망을 위해 생명을 내어준 육류와 어패류들이다.

 

자신이 사회에서 약간이라도 뒤쳐지는 '것 같다' 면,  또는 진열장에 물건이 약간이라도 빈 구석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이는 곧바로 패배의식과 불안감으로 개인을 억누른다.
바로 이 부분이 이른바 강고한 자유주의 자본사회가 기생하는 부분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자유주의나 세계화는 원활한 경제활동을 위한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들의 불안 심리에 기생하고 있는 시스템인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이러한 시스템에 익숙해져버린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 그리고 이에 기반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끊임없이 질문과 의심을 던져야 한다.

이러한 질문과 의심들이 우리를 각성하게 만들것이고,  거대하게만 보이는 잘못된 시스템은 바로 개개인의 각성에 의해 붕괴될 것이다. 
   

지금은 불가능해 보여도 이 자본주의 역시 언젠가는 낡은 패러다임으로 폐기될 것이다.
늘상 과거는 폐기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래했던 인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준다. 
   

공감하는 인간의 본성을 되찾고, 이러한 공감을 지구와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게 확장해 나가는 길목에는 헌신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사건이 있을 것이고, 불행하게도 희생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노력에 나도 작은 하나의 디딤돌이 되고 싶다. 
   

우리가 얼마나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수를 줄일 수 있느냐는 바로 이러한 노력의 측정치가 될 것이다.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그 때, 우리는 새로운 시스템의 꽃이 만개한 그곳에 서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