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 여인이 죽기 전에 죽도록 웃겨줄 생각이야 - 월동 준비

2014. 12. 8. 22:564. 끄저기/끄저기

안주인께서는 인정하지 않지만, 나는 안주인께 주변 소소한 일들을 곧잘 이야기하는 편이라고 자부한다. 

 

 

생업으로 삼고 있는 일이 정체모를 영어 약어가 난무하고
하루종일 코박고 프로그램을 분석하거나 개발해야 하는 업무다보니
사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사는지를 안주인에게 설명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러다가는 대화가 끊기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혼 2년차 즈음부터, 회사 일에 대해 안주인이 이해를 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다보니, 그리고 아마도 나이가 점점 들어가다보니
회사에 대한 이야기는 기존에 업무 중심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나와 내 주위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그렇게 나와 안주인은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줄줄이 마루바닥이나 소파에 떨어져 퍼지면서
이야기속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무늬가 파동처럼 피어오른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무늬를 일컬어 '인문'이라고 하니 그 순간 우리는 진정한 인문학도가 되는 것 아닐까?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발표할 때, 그 뒤에 '기술'과 '인문학'의 이정표를 세워둔 이후부터 우리 나라에도 이른바 '인문학 열풍'이라는게 불어닥쳤다.
그래서 회사 교육 사이트에도 인문학 분야가 생기고 역사서적이나 동서양 철학사 따위 책을 대여할 수도, 관련 강좌를 들을 수도 있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느낌 그대로 말하자면 커리큘럼은 따분하기 이를데가 없다.

 

 

차라리 그 모든 커리큘럼을 싹다 날려버리고, 이 책을 한 권 올려놓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무늬,
그것도 사람이 오롯이 사람 자체로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병원'이라는 현장에서 피어오르는 파동이 책갈피마다 서려있는,
이 시대 최고의 인문학 서적!

 

바로 이 책이 충분히 그 자격이 되는 책 아닐까?

 


1. 불어!!!

 

    저자인 바티스트 보리유(Baptiste Beaulieu)는 의사이다.
    인턴으로 근무하던 중인 지난 2012년 10월, 프랑스 인턴들이 전국적인 파업을 일으켰었나보다.
   (프랑스야 뭐, 원래 그런 나라고, 그게 프랑스의 저력 아니겠어?)

 

 

    그런데 저자는 이때 이 파업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싸늘한 시선을 느꼈다고 한다.(헉...프랑스도???)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깊은 간극을 메울 상호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2013년 1월에 '자 보세요(Alors Voila)'라는 블로그를 개설했다고 한다.
  
    이 블로그는 2개월만에 2백만이 넘는 인기를 끌었고,
    저자는 이 블로그로 프랑스 최고의 의학박사 논문에 수여되는 알렉상드르 바르네 대상을 수상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단다.
  
    블로그의 글들은 2013년 9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책으로 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4월 소개되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세계에서 세번째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니, 출판사와 번역가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얘기를 드리고 싶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전히 저자의 블로그에 계속되고 있는것 같은데(http://www.alorsvoila.com)
    불어다....젠장맞을...
  

 

 

2. 전략적 지침 만들기

 

    책에 정신없이 빨려들어가 책장을 넘기다가, 넘긴 장 수가 남은 장 수를 압도해가기 시작할 무렵, 슬그머니 걱정이 피어올랐다.
    "이걸 어떻게 정리하지?"
   

    자칫 서평을 쓰겠다고 미간을 잔뜩 찌뿌리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순간, 이 책을 가지고 얄팍한 신비주의와 종교론의 썰을 풀다가, 근사체험 찍고
    릭진 파르마 링파로 화룡점정을 찍는 사태가 발생할 것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는 정말 차고 넘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결국 죽음으로 종결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근저에 깔고 있다.(저자는 윤회를 믿는 듯 하지만) 
   책의 제목으로 선정된 '불새 여인' 역시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하나하나마다 생동감이 넘치고 유머가 넘쳐난다.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다보니 공통된 그림이 하나 그려지는데

   죽음이라는 뿌리를 달고 우렁우렁 생동감이 넘쳐나는 꽃들이 가득 피어난 나무의 형상이 그것이다. 
   

   그러니 이런 그림을 놓고 나처럼 상상력이 빈약한 모질이가 어떻게 종교나 사후세계, 인간의 유한함을 한탄한 철학을 얘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바티스트 보리유는 이러한 심각함을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을 친절하게도 잘 가르쳐주고 있다.

 

 

   거대한 불운이 닥쳤을 때, 중심을 잃지 않고 헤쳐 나가기 위한 전략적 지침이 바로 그것이다.

   첫째, 수첩을 펼치고 환자들이 남긴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문장들을 다시 읽는 것.
   둘째, 경적을 울려라!
         왼손을 들어 오른쪽 겨드랑이에 넣고 상대방 눈을 바라보며 "빵빵' 소리를 내는 것이다.
   셋째, 응급실 진료 사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들을 읽고 또 읽는 것. 
   

   사실 이게 무슨 얘긴가 싶겠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책이 마무리가 거의 되어가는 즈음 등장하는 이 지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세가지 지침은 철저하게 바티스트 보리유의 것이다.
   따라서 저 지침은 나의 지침은 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바티스트 보리유와 같은 직업을 가진 의사들도 지침으로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지침에 구태여 하찮은 나의 주석이나마 달자면, 그건 바로 자신의 상황에 가장 걸맞는 지침을 스스로 마련해보라는 것이다.

   즉, 저 지침은 나의 지침이 될 순 없지만 그의 방법만은 모방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은 소소한 일상을 눈여겨 보고, 언뜻언뜻 떠오르는 생각을 무지막지한 인터스텔라의 시공간 속으로 보내버리지 말고, 

   메모장위에 붙여놓고 핀으로 박아버리는 것.
   아마 이 정도를 하게 되면 첫번째 지침은 모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만의 액션을 만드는 것.
   사실 나는 나만의 액션이 하나 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벼르고 있는 음울한 분위기를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액션 말이다.

   다만 바티스트 보리유가 확실히 고수라고 생각하는 점은 그의 액션은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사람에게도 사용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좀더 대중적인 액션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면 두번째 지침도 모방이 될 것 같다.
   

   마지막 하나는 상상력이다.
   어떻게하면 이런 현상이, 이런 짓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상상해 보는 것,  그리고 그 상상을 그대로 인정해보는 것이다.
   거기다 나의 잣대나 나의 기준점을 들이대지 말고 말이다.

   사실 나로서는 가장 어려운 점이다. 그래서 그만큼 노력이 필요한 점이기도 하다.
   혼자 상상의 구렁텅이에 빠져 가끔 혼잣말을 지껄이는 무서운 미친 아저씨 코스프레가 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을 자신의 기준으로 수시로 자르고 떼서 오려붙이는 사람들보다는 확실히 덜 미친 사람일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계속 노력하면 세번째 지침도 모방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전략적 지침이 다듬어지면, 언제고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이 치열한 전쟁터에서 잠시 엉덩이를 깔고 앉아 한바탕 웃을 권리쯤은 있을테니 말이다.
  

 

어제밤에는 이른 새벽에서야 잠이 들어 월요일 출근길이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자정 넘어 갓 쌓이기 시작한 눈을 밟은 것은 참 행복한 기억이 되어주었다.

 

 

날이 많이 추워졌으니 월동 준비 하나 공유하고 싶다.

기름값이 많이 나오겠지만 보일러도 틀어야 하고, 행동이 굼떠지겠지만 내의도 단단히 갖춰입어야 하고, 옷 사이사이로 빈틈이 없도록 잘 여며줘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퇴근 후 소파에 앉아 이 책의 책장을 한장한장 넘긴다면, 하루의 업무와 추위에 꽁꽁얼었을 몸과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