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주 일식여행 5 - 고명식과 선입견

2023. 5. 23. 23:421. 별과 하늘의 이야기/2023 서호주 일식 여행기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났다.
잠을 충분히 잘 자서 그런지 몸이 가뿐했다.

호주에 입국한 다음날 하루는 온전히 퍼스 관광에 쓰기로 했다.
이제 캠핑카를 끌고 퍼스를 벗어나면 도시를 만날 일이 없기도 하거니와
운전석 방향이 반대인 호주의 도로상황을 익혀야 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산 소시지와 올리브로 아침을 챙겨먹고 9시경 길을 나섰다.

이른 아침의 퍼스 풍경은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퍼스의 가게들은 아침 일찍 문을 열고 저녁 일찍 문을 닫는 것 같다.
가까운 카페부터 손님이 제법 많았다.

윌리엄 스트리트를 따라 퍼스의 다운타운으로 이어지는 헤이스트리트까지 걸었다. 

아시아 음식점과 식재료 가게들이 몰려 있는 윌리엄스트리트 풍경 (사진 : 구글지도)

 

모든 길들에 활력이 넘쳐났다. 
좁은 길목길목마다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있었다.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새삼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이스트리트에서 울워스를 발견했다.

 

어제 깜빡 사지 못한 면도기를 살겸 울워스를 돌아봤고 이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상점에 들르기 시작했다.
K마트라는 저가 의류매장에도 들어갔다.
방글라데시를 원산지로 하는 저렴한 옷들이 많았다.
옷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티셔츠를 비롯한 옷을 샀다.
나와 안쥔마님까지 합쳐 옷을 다섯 벌이나 샀는데 가격은 10만원을 넘지 않았다.

난 유행에 둔감한 일반적인 스타일의 옷을 좋아한다. 

 

몇 달 전부터 건빵바지를 사고 싶었는데 대한민국의 건빵바지는 모두 조거바지 뿐이었다. 
조거스타일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나는 대한민국에서는 건빵바지를 살 수 없었다.
호주 K마트에서 보통 스타일의 건빵바지를 발견하여 냉큼 샀다. 

이런저럼 로컬상점에 들르다가 서점이 보여 서점 구경도 했다.
외국 서점에 들어가면 항상 부러운 게 페이퍼백에 재생지를 쓴 소박한 소설책들이다. 

 

소설책 진열대

나는 아직 eBook보다는 손에 잡히는 책을 선호하는 옛사람이다. 

비용을 줄여야 한다면 eBook보다는 페이퍼백에 재생지를 쓰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을만큼의 글을 써야겠지만 말이다.


안쪽에서 서호주 여행가이드 책도 보았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캠핑여행 가이드 책을 보면서 넓은 땅덩어리를 가졌다는게 부러워지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아시아 마켓들이 몰려 있는 윌리엄 스트리트는 퍼스의 아주 작은 구역에 지나지 않았다.
윌리엄 스트리트를 벗어난 다운타운은 호주답다고 느껴지는 상점과 사람들로 가득했다.  

 

런던코트 골목 : 평일 오전임에도 퍼스 중심가의 골목골목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성조지 성공회 성당을 구경한 후 퍼스의 무료버스인 캣버스를 타고 킹스파크로 이동했다. 

 

퍼스 부자들의 세금으로 운영된다는 무료버스시스템 캣버스
캣버스 내부 모습

 

버스에 앉아 운전방향이 반대인 호주의 도로 흐름을 신경쓰고 살펴봤다.
우회전과 좌회전의 개념이 잘 잡히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중앙선은 오른쪽!'이라는 말을 계속 되뇌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사거리 교차로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진입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혼란을 정리할 때마다 이 작은 행성에서 운전석 하나 통일시키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오른쪽 운전석은 
손님이 없는 오른쪽으로 채찍을 휘둘러야 했던 마차의 마부 문화에서 이어진 것이라고 한다. 

 

더 이상 마차를 몰지 않게 된 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산이 그대로 이어지는 걸 보면 

무엇이든 변화를 만든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꼈다. 

킹스파크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이었다.
스완강이 눈아래 펼쳐지면서 아름다운 풍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킹스파크에 다다를수록 지대가 높아지면서 도시풍광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킹스파크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호주에서 처음으로 가는 '식당'이었다. 

 

퍼스 킹스파크에서 처음으로 '식당'이라는 곳을 들어갔다.


호주 식당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나라처럼 물을 그냥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한창 목이 말랐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져다 마시라는 말이 얼마나 반가왔는지 모른다. 
팁문화가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음식은 대체로 맛이 없었다.

 

나는 호주 음식에 '고명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떤 음식을 주문하면 그 음식이 감자튀김 위에 고명처럼 얹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등어 튀김을 시키면 고등어 튀김 한 조각이 접시를 가득 채운 감자튀김 위에 살짝 얹어져 나왔다.

음식값은 비쌌다.
킹스파크에서 먹은 피시앤칩스, 소고기버거, 커피 두 잔이 60불, 우리나라 돈으로 54,000원이었다.
공원 식당이라서 더 비쌌던 건지도 모르겠다.

54,000원짜리 밥상 : 감자튀김에 얹어져 나오는 본식. 내가 고명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호주의 모든 것이 대체로 비쌌던 것 같다.

 

사람의 노동이 개입되는 서비스 요금은 당연히 비쌌고 제조업 기반이 없는 나라라서 그런지 공산품도 비쌌다. 
사람을 쓰는 비용에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한다. 
다만 가격에 걸맞는 서비스가 제공되지 못하는 부분은 호주 여행 내내 아쉬웠다.

 

킹스파크 State War Memorial 풍경 : 1차 대전 전사자 위령탑이다. 호주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그 대가로 영국으로부터 자주권을 획득했다.
킹스파크에서 내려다본 아름다운 퍼스의 풍경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거대한 나무들이 너무 좋았다.
말리 장미(Rose Mallee)라고 한다. 독특한 꽃들도 많았는데 유독 독특해서 사진에 담았다.
수령 70살의 이 유칼립투스 나무는 '여왕의 나무'라 불린다. 1954년 3월 27일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식수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킹스파크에서 산책을 즐긴 후 다시 캣버스를 타고 헤이스트리트몰로 내려왔다.

여행선물을 마련할 목적으로 이런 저런 가게를 돌다가 다섯 시쯤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인근에 저녁식사를 할만한 곳을 찾으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는데
우리 호텔이 있는 노스브리지 인근이 치안이 안 좋다는 블로그 포스팅이 있었다.

신경쓰지 않고 나갔다.
사실 오면서 봐둔 곳이 있었다.
마치 동남아의 푸드 스트리트같은 골목이었다.
우리나라 음식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다양한 아시아 식당이 몰려 있는 올라 샹하이 입구풍경

그곳에서 이런저런 나라의 음식 구경을 하다가
사타이 클럽이라는 말레이지아 식당에서 음식을 담아 진저비어와 함께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걸아왔다.

 

치안이 안 좋기는커녕 골목 놀이터에서 오붓한 시간을 즐기는 가족들을 비롯해

여유있는 밤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호텔이 있는 노스브리지는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이 많은 것 같았다.

당연히 이들의 생활수준은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백인들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곳을 슬럼으로 치부하는 선입견이 작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노스브리지가 치안이 안 좋다는 블로그 글에는 살인사건이 있었다는 말도 있었다. 


여행객에게 '치안이 안 좋다'는 말은 예민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울이나 도쿄처럼 이른바 '슈퍼 세이프'라는 수식어가 붙는 곳에서도 사건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사건 하나를 가지고 와서 
'치안이 안 좋다'는 주홍글씨를 붙여버린다면 그게 과연 타당한 일일까?

난 다른 말을 하고 싶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고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도 밤늦게 돌아다니는 건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건 서울에서도 도쿄에서도 통하는 말이듯 이곳 노스브리지도 마찬가지다. 

밤늦게 돌아다니지 않는다면 노스 브리지도 충분히 안전한 곳이다.

지금도 노스브리지에서 성실히 삶을 일구고 계시는 우리나라 교포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이민자들이 
이런 잘못된 정보에 피해를 입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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