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모님들께.

2023. 8. 14. 13:494. 끄저기/끄저기

 

1.

나는 고모님들보다 
이모님들과 훨씬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자랐다. 

그런데 이게 나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어떤 진화론 책에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었다. 

이모와 조카는 혈연적 연결관계가 확실히 보장되지만 
고모와 조카는 확실하지 않다!

ㅋㅋㅋ 그럴듯한 설명이네.

하지만 생식본능이 나의 유전자를 후손을 통해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과학의 탈을 쓴 주문"일 뿐이라고 평가하는 나에게는  
이모와 고모의 진화론적 분석 역시 허황되게 들렸다. 



2.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고모보다 이모와 친한 데에는 확실하고 단순한 이유가 있는데 

고모님들은 항상 잔소리를 주셨지만
이모님들은 항상 용돈을 주셨기 때문이다. 

명절이 다가오면
나는 친가에 가야 하는 명절 당일이 아니라
외가 어른들이 모이는 그 다음날이 기다려졌다. 
그 날이 용돈이 생기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이 틀렸다.
혈연은 개뿔.
오로지 용돈이 있을지어다!



3.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었다. 

우리 집은 아들만 셋이다. 

즉, 우리 부모님은 100% 시부모가 될 운명을,
나는 100% 시댁 일원이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엉터리 진화론 책에 따르면
이미 승부는 정해져 있어 
내가 조카들에게 환영받는 어른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다행히 내게는 배움이 있었다. 

바로 어렸을 때 
고모님들과 이모님들을 통해 알게 된 
조카에게 환영받는 어른이 되는 법!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나는 명절 때마다 안쥔마님의 핀잔을 무릅쓰고 
조카들에게 용돈 폭탄을 안겨주었다. 
"삼촌이 가진 건 돈 밖에 없어!"라고 외치듯이 말이다. 



4. 

시간이 흐르고 조카들은 어른이 되어갔다. 
나도 나이가 들고 늙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명절마다 조카들을 위해 준비한 용돈은 
그저 기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조카들에게 용돈을 아끼지 않은 건
조카들에게 우리집이 어쩔 수 없이 들러야 하는 곳이 되지 않길 바랬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 느꼈던 그 친가처럼 말이다. 

하지만 조카들이 친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두 개의 프리즘이 존재했다. 

가장 중요한 프리즘은 바로 조카들의 어머니(형수님),
그리고 변수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의 형인 조카들의 아버지라는 프리즘이 있었던 것이다. 

그 프리즘을 통해 삼촌인 내가 속한 친가는 어떻게 굴절되어 보였을까?

사실 이건 답이 나와 있었다. 

이미 형수님은 시댁에 발길을 끊은지 오래됐고
그나마 명절에 얼굴을 보는 조카들은
표정이 좋지 않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진화론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난 할만큼 한 것 같고
어쨌든 진화론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최소한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건 아니라는 위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5. 

최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큰조카에게서 깜짝 선물이 왔다. 
취직을 했다며 선물과 함께 손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조카의 선물을 받으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다시 진화론자들에게 반기를 들까?

아니다. 
그건 그거대로 필요할 때 갖다쓰자. 

중요한 건, 
내가 뭘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큰 조카가 마음씀이 어여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행복의 끝자락에서
나를 한 번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6.

생각해 보니 
나는 어렸을 때 이모님들께 그처럼 많은 용돈을 받으면서
감사하다는 표현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특히 큰 이모님이 마음에 걸렸다.

어렸을 때 큰 이모님은 살림이 넉넉하지 않으셨고
우리 집이나 작은 이모님 댁에 비해
편지풍파도 많이 겪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부름으로 찾아뵐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100원씩 용돈을 쥐어주셨다.

핫도그를 하나 사먹어도 
떡볶이를 하나 사먹어도 
반을 남길 수 있는 어마어마 큰 돈이었다. 

살림이 넉넉하셨던 작은 이모님은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뵐 때마다 기본 지폐 단위의 용돈을 주어
재벌이 어떤 기분인지 느낄 수 있게 해 주셨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니 

아무리 돈이 없어도

마음이 있으면 돈이 따라 나올 수 있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마음이 없으면 돈 따위는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이모님들께서 꼭꼭 챙겨주신 용돈은 
돈이 아니라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 한결같은 마음 씀씀이 때문에 
용돈 이상의 행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마음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7. 

큰조카에게 커다란 배움을 얻었다.

다행히 큰 이모님을 비롯하여 두 분 이모님 모두 아직 건강히 살아계시고
레이더에 곧 이모님들이 한 자리에 모이신다는 정보가 접수되었다.

평소 같으면 우리 집에서는 장남인 큰형이 어머니를 모시고 나갔겠지만
이번만은 내가 자원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나갔다.

큰 이모님과 작은 이모님께 드릴 용돈을 준비하여 정성껏 담았다. 
겉봉투에 감사 인사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만나뵌 자리에서 이모님들께 용돈을 드리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을 수 있었다. 

"큰이모, 작은이모
 제가 철이 이렇게 늦게 들었어요. 

 이렇게 늦게 철들때까지 
 건강하게 잘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이모님들의 마음씀에 
 보답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립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제가 돈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드릴 수 있게 말이에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