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원인은 자신일 뿐 - 폴란드의 풍차

2023. 8. 20. 12:434. 끄저기/끄저기

 

1. 


마치 유튜브 타임라인에 내가 선호하는 영상이 주로 뜨듯이
책을 선택하는 기준에도 내 무의식이 작용한다.

그러고보면
'나'라는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도 그닥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 중 하나가 
도서관에서 무작위로 책을 빌려 보는 것이다. 

이번에 도서관에서 뽑아온 책은 '폴란드의 풍차'였다. 

무작위 책보기가 아니라면 만날 수 없는 책이었는데
아주 재미있었고
생각할 거리를 한 아름 안겨주었다.


2. 

2대, 3대에 걸쳐 내려오는 이야기라면
으레 서가 한 켠을 꽉 채우는 
토지나 아리랑과 같은 대하소설을 생각하게 마련인데 
이 책은 무려 5대에 걸친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아주 얇은 책이다. 

5대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가 명확하기 때문인데
그 주제란 바로 '저주받은 코스트 가문'이라는 것이다. 

1대 코스트 씨는 아내와 두 아들을 짧은 간격을 두고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로 잃었다.

2대 코스트 씨의 두 딸은 평범한 농부의 아들과 결혼했다.
그런데 그 중 딸 하나의 가족은 열차사고로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한 딸의 장남은 행방불명 되고  
둘째 딸은 버찌씨가 목에 걸려 죽고 
본인은 막내 아들 자크를 낳다가 죽고 만다. 

3대 자크는
장이라는 아들과 쥴리라는 딸을 두는데 
이들은 또래 집단으로부터 유령이라고 놀림을 받는다.
그 결과 장은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쥴리는 우발적인 사고로 얼굴의 반이 일그러지고 만다.

4대 쥴리는
마을 사람들의 조소와 놀림의 대상으로 살다가
조제프 씨라는 외부인과 결혼한 후 
더 이상 누구의 놀림도 받지 않고 
어엿한 대접을 받으며 살게 된다. 

이는 순전히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수수께끼의 권위를 풍기는 조제프 씨 덕분이었다.

 

조제프 씨와 쥴리 사이에서 레옹스라는 아들이 태어난다.
조제프 씨는 평화로운 임종을 맞는다.  

어느 겨울 밤 
쥴리는 집을 나가버린 레옹스를 찾아러 가야 한다며 사라져 버리고 
소설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3. 

이 이야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 이 가문을 악마의 가문으로 규정했는가이다. 

놀랍게도 그것은 남도 아니고 비극적인 사건도 아닌
1대 코스트 씨 자신에 의해서였다.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연달아 잃는 비극적인 사건을 
자신의 가문에 깃든 불운한 운명 때문이라고 판단했고
마치 포도주에 물을 섞어 술을 희석시키듯
불운을 희석시키기 위해 
두 딸을 최대한 평범하고 평화로운 집안과 결혼시켰다. 

문제는 이 와중에 
중매쟁이에게 내건 이러한 조건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후 마을 사람들도 이들을 '불운한 운명을 가진 사람들'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 터진 일련의 사고들로 인해 
잘못된 인식은 더더욱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애초에 코스트 씨가 
세상의 모든 불행이 자기 가문을 노린다는 식의
엉뚱한 판단을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비극의 소용돌이에도 빠져나갈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 중에는
결코 이 가문이 불행이라는 운명에 짓눌려 있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중매쟁이였던 오르탕스 양, 
두 번째는 쥴리의 남편이었던 조제프 씨였다. 

하지만 정작 코스트 가문 사람들은 
잘못된 인식을 넘어설 의지가 없었다. 

결국 언제든 남의 불행을 즐길 준비가 된 이웃 사람들에 의해 
코스트 가문은 비극의 가문으로 남게 된다. 

결국 모든 비극은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4. 

비슷한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엊그제 속초 여행지 숙소에서 
한경 arte 채널을 보다가 
우연히 연세대학교 동문음악회라는 걸 보게 됐다. 

연세대 출신이며 KBS 아나운서임을 자랑하는 사회자 입에서 

집단성을 독려하는 조잡한 멘트들이 흘러나왔다. 

 

제법 번듯한 대학을 나왔다는 사람들이
뭐가 무서워서 
한때 어렸을 때 몸담았던 집단에 저처럼 고착되어 있는걸까?

 

하긴.

이 뿐이랴?

대한민국 검찰에, 검찰총장에, 대통령까지 한다는 사람은
무당을 옆에 끼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뭐가 그렇게들 무서운 걸까?

 

뭐가 무서워서 
무당까지 불러가며

사는 집터를 정해야 하는 걸까?

그러고보면 
내가 회사 생활을 했을 때 본
점을 보러 다닌다는 프로그래머들의 행동은
애교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 모든 행동의 기저에 흐르는 인식은 결국 동일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불행이 
자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그 불행에 휩쓸리지 않은 것은

자기가 제대로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비뚤어진 주인공 의식일 뿐이다. 

그래서 결론도 동일하다.

결국 자신을 망치는 건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