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31. 20:35ㆍ4. 끄저기/끄저기
"괜히 데모해서 형이나 가족들 힘들게 하지 말아라."
내가 대학에 갈 때 어머니께 들은 얘기 중 하나다.
다행히 나는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의 단일화 실패로 정권을 노태우에게 넘겨줬을 때부터
더 이상 "독재정권 물러가라" 따위를 부르짖을 명분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내가 대학을 갔던 때는 김영삼 정권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내게 데모하지 말라는 얘기를 한 것이다.
털어봐야 벼룩도 안 나오는 전형적인 소시민 집안이었던 우리 집에서도 저런 말이 나올 정도로
연좌제란 사람의 영혼을 옭아매는 무서운 형벌이었다.
에어컨이 고장난 덕에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고 이른 새벽까지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낭만을 누리고 있다.
게다가 근래 읽는 책들이 하나하나 너무 좋다.
이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을 아버지로 둔 딸의 시점에서 바라본 아버지와 친척, 이웃들의 이야기이다.
책을 다 읽고 첫 번째 가진 느낌은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연의 아버지들처럼 소주를 한 잔 마시고 싶었다는 것이다.
냉큼 편의점에서 처음처럼 한 병을 사왔다.
소주를 한 병 비워가며
비록 취하긴 할 지언정
책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처럼 형형한 눈빛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말이다.
다짐을 한 적은 많다.
말로 이유를 풀자면 그럴듯 하고 이치에 타당하기 이를데 없는 다짐들이었다.
애초에 누구한테 주목받으며 살았던 사람도 아니다보니
내 다짐을 가로막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많은 다짐들을 쉽게 바꾸거나 포기해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다짐 때문에 사람은 물론 시대와 맞서야 했고
그 시대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찐득찐득한 연좌제의 거미줄을 처발라버리는 꼴을 봐가며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이 책에서 정말 인상깊었던 것은
그렇게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모습이
전사처럼 장렬하지도, 혁명가처럼 투철하지도 않다는 점이었다.
그 분들도 우리가 그러하듯
지리멸렬한 일상을 견뎌내며 살아야 했다.
산다는 것이 새삼 거룩하게 느껴진다.
얼마나 사무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까?
얼마나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싶었을까?
그 심정의 한 자락에 공명하니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흘렀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너무나 유쾌하게 풀어낸 작품의 마법에 빠져
이른 새벽까지 헤어나지 못했다.
소중한 시간, 소중한 생각과 배움을 던져 주신 정지아 작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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