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023. 7. 24. 00:364. 끄저기/끄저기

'착짱죽짱'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착한 짱개는 죽은 짱개'의 줄임말이다. 
'짱개'란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이니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 뿐...그러니까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중국인은 죄다 나쁜 중국인'이라는 섬뜩한 뜻을 가진 말이다. 

어떻게 이런 말이 온라인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일 수 있을까?

중국인에 대한 강렬한 혐오의 근저에 흐르는 선동과 왜곡은
20세기 초, 유럽에 만연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와 그렇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물론 21세기 중국인과 20세기 유대인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혐오의 대상인 중국인이나 유대인이 아니라 
그때도 이방인 집단을 혐오하고 지금도 이방인 집단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인식에 대한 것이다. 


평소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이제서야 봤다.

'악의 평범성'
너무나도 유명한 말이다. 

미디어에서 전해 듣기로는 
이 책에서 말하는 '악의 평범성'이란
그렇게 주목할만한 가치도 없고 중요한 사람도 아닌 나치의 중간간부 '아이히만'이 
지극히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가지고,  
어떻게 대규모 학살에 기여할 수 있었는가를 분석할 결과 나온 개념이라고 한다. 

물론 여기에서 얘기가 끝나버리는, 그저 과거의 일이라면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이히만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자기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그 분위기는
오늘날의 세계, 오늘날의 대한민국 사회 기저에도 똑같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 또아리를 한 번 파헤쳐보자. 

첫째. 모범이 될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 왜곡되어 있다.

         모범이 될 사람, 그래서 따라야 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돈이 많은 사람일까?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일까?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것이 존경받아야 할 가치라면 
         아이히만이 히틀러를 존경하는 이유는 흠잡을 데가 없게 된다.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000만에 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을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이는 아이히만이 히틀러를 존경한다며 한 진술이다. 

         아이히만의 진술은 따를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당연히 그 기준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도, 재력도, 업적도 아니다. 

         모범이 되고 따라야 할 사람의 유형은 단 하나 
         이 책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양심의 명령대로 살다 간 사람들'이다. 

         이러한 조건을 깨닫는다면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미쳐 날뛰는 수많은 가짜들을 걸러낼 수 있는 식견이 생긴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존경할 필요도, 따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그저 비판적으로 바라보면 된다. 

         어차피 제대로 된 평가는 그가 죽은 뒤에 나올 것이고 
         다행히 모든 사람은 죽는다. 


둘째. 개념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일이 만연하다. 

         이 책을 보며 놀라웠던 것 중 하나는 
         중간 간부 역할을 수행한 아이히만을 비롯해서 나치 조직 어디서도 
         '학살'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고, 이것이 문서로 전달된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책'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었다.
         물론 여기서 '해결책'이란 우리가 결과적으로 알고 있듯 대량 학살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대량학살은 나치 조직은 물론 일반 독일인에게는 '해결책'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아이히만이 맡았던 임무는 ‘해결책’을 위한 임무 수행이었지 
         누구를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 

         실제 아이히만 재판에서 중요한 관건 중 하나는 아이히만이 임무를 수행한 결과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밝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실을 은폐하고 죄책감을 무력화 시키는 수단으로 의미를 왜곡한 예는 더 있다. 

         가스실에 사람들을 몰아 넣어 죽이는 것은 ‘의학적 문제’,
         죽음의 열차를 탈 유대인을 선별하고 이송하는 것은 ‘특별 취급’,
         구덩이에 몰아넣어 사람을 죽이고 덮어버리는 것처럼 차마 인간으로 하지 못할 짓을 
         임무로 인식하게 하는 ‘강인성’ 등 여러가지 사례가 등장한다. 

         이러한 의미 왜곡 역시 오늘날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일인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의미 왜곡' 자체가 아니라 '의미 왜곡'이 갖는 '의도'이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핵연료봉에 노출된 물을 
         '오염수'라고 부를 것이냐 '처리수'라고 부를 것이냐 하는 문제가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처리수'라는 단어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이 단어는 과학적인 사실도, 피해가능성이 있는 대상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단어도 아니다.
         이 단어는 하지말아야 할 일을 벌이는 범죄 당사자들의 죄의식을 완화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다. 

         즉, 히틀러의 나치가 '해결책'이라는 단어를 끝끝내 사용하며
         이에 기여한 사람들의 죄의식을 지워버린 것과 동일한 의도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 왜곡은 사회 곳곳에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벌어진다. 
         '바이든'이 '날리면'을 잘못 들은거라고 우기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속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내가 겪은 의미 왜곡의 대표적인 사례가 '긍정적인 사고'라는 말이라 생각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라는 말은 
         '눈앞에 보이는 부조리에 둔감해지라'는 말이다. 
         
         애초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라는 말 자체가 폭력적이다. 
         왜냐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저 본 그대로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셋째. 인간을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일들. 

         2년 전에 인천의 어떤 빌라에서 벌어진 흉기난동 사건에서 
         경찰이 피해자를 두고 자리를 비운 것이 논란이 됐었다. 
         온라인이 여경 논란으로 들끓었다. 
         오죽하면 지금도 '인천 여경'이라는 검색어로 찾을 수 있을 지경이다. 

         하지만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얘기한대로 
         이건 여경의 문제가 아니라 경찰이 제 소임을 제대로 하지 않은 문제이다. 
         
         이처럼 어떤 사건이나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려면
         우선 본질을 제대로 규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기 위해 장애요소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는 유럽 전역에 존재하는 유대인들을 여러 특징으로 구분하였다. 
         혼혈인지 순혈인지에 의해 구분하었고 
         그들이 사는 지역이 서유럽인지, 동유럽인지, 독일인지 독일 밖인지 등에 의해 구분하였으며 
         독일에 공을 세운 이들을 조상으로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구분하였고 
         기독교 세례를 받았는지 여부에 따라 구분하였다. 

         이처럼 수많은 기준으로 유대인을 구분한 의도는 분명하다. 

         구분에 의해 최악으로 분류된 유대인을 죽인다면 
         마치 그들이 '죽어야 할 이유를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고 착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난질에 저항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사람'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라고 불러야 할지 '호모 이티어트'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은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건 다른 사람도 좋아할 것이고
         내가 싫어하는 건 다른 사람도 싫어할 것이다.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이 '사람'이라는 개념 위에 
         국가, 민종, 종교, 성별, 지역, 인종 등 
         다른 개념이 아무런 생각없이 덧씌워지다 보면
         저 사람은 나와 다른 '어떤 존재'로 왜곡되어 버린다. 

         '착짱죽짱'이라는 섬뜩한 말이 그 대표적 예이다. 

         세상에 어떻게 모든 중국인들이 나쁜 사람일 수 있겠는가?
         똑같은 '사람'을 국적으로 갈라 죽어야만 착해진다고 저주하는 것은
         동부 유대인은 우리와 달리 문화인이 아니어서 죽여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당시 보통 독일인들의 인식과 끔찍하게 닮아 있다. 


역사에는 수많은 대학살의 기록이 존재한다. 

유대인 학살은 지금 역사를 주도하고 있는 유럽 백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라서 더 많이 부각되었을 뿐,
유사한 시대에 동아시아에도 대량학살이 벌어졌고 
우리 나라 역시 같은 동족을 무차별 살해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가 있다는 건
동일한 일이 또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과거 선조들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를 외치고 죽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국가를 부르짖게 만든 그 무엇이 나를 소름끼치게 만든다. 

악의 평범성.
그것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언급했듯이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평범한 악마가 되는 건

그저 그 옛날 아이히만의 이야기로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스스로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말하고 생각하기를 포기한다면

그 순간 이 세상에는 또 하나의 평범한 악마가 탄생하는 것이다.

선동과 왜곡에 속지 말자. 
권력자들의 의도를 항상 생각하자. 

말하고 생각하는 것. 
그게 '악'에 대항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이다. 

 

추가 내용 - 내면적 이주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