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을 바로 잡는 굉장한 경험 - 최초의 역사 수메르

2023. 8. 22. 13:034. 끄저기/끄저기

 

1. 

'수메르 신화'는 나의 지식탐구 여정에 한 축을 차지한다. 

신화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조철수 교수님의 책 <수메르 신화>를 통해 처음 수메르 신화를 접했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수메르 신화를 접하고 성경을 비롯한 다른 신화는 다 애들 장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를 사로잡는 것은
수메르 신화에서 별자리의 원형이 읽힌다는 것이다. 

우르 3왕조 때 만들어진 인장에서 
염소자리 그림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전율은 지금도 나를 압도하고 있다. 

그 이후 수메르,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와 관련된 책들은 닥치는대로 사 읽었다. 
별자리 기원에 대한 단서를 뽑아내기 위해서였다. 

그 와중에 길가메시 서사시에 깊게 빠져들기도 했다. 

그 옛날 삶의 본질을 꿰뚫은 위대한 사상과 
그 사상을 써 내려간 아름다운 문장 속에 빠져 
얼마나 행복한 순간들을 만끽했는지 모른다. 

친구와 수메르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최초의 역사 수메르' 책을 샀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으레 내 서가에 꽂힌 여러 수메르 책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제목이 다 고만고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김산해 선생님이 2021년 12월에 새 책을 내셨다는 것을 말이다. 

김산해 선생님의 책을 오랜만에 접하니 옛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처럼 반가왔다.


2.

이 책은 진짜 수메르 이야기이다. 
악카드나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따위 메소포타미아로 퉁쳐지는 잡탕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수메르 이야기 말이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수메르를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됐다. 

수메르 신화를 처음 접했을 때 겪었던 곤란 중 하나가
시대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똑같아 보이는 점토판 인장이라도 
어떤 것은 고바빌로니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어떤 것은 신바빌로니아 후대로서 
무려 1,200년 이상의 시간 간격을 벌린 것들도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책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걱정이 없다. 

말 그대로 수메르의 찐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메르의 패권국 라가쉬에 대한 집중은 
그동안 내가 잘못된 시각으로 수메르를 바라봤음을 알게 해 주었다. 

사실 이 이전에 비슷한 책이 있었다.

일본 고고학자 고바야시 도시코가 쓴 '5천 년 전의 일상'이라는 책 역시 
라가쉬에 중점을 두어 쓰여진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나는 수메르 초보였기 때문에  
정통 수메르 역사가 얼마나 귀중한 자료인지 깨닫지 못했었다. 

이번에 김산해 선생님께서 우리 글로 직접 쓰신 수메르 이야기를 읽으며 
수메르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 지
관점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굉장한 경험을 했다. 

특히 김산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최초의 제왕 에안나툼이라는 시각은 무척 신선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당혹스러운 감정은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그 당연함을
김산해 선생님과 같은 분이 깨우쳐주지 않았다면
나라는 멍청한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랬다. 

에안나툼을 가려버리고 
악카드 왕국의 시조 사르곤을 최초의 패권 군주로 보는 것은
샘족에 연줄을 두고 있는 서양 문명의 불순함이 묻어 있는 접근이었던 것이다. 

왜 메소포타미아 관련 책들을 수도 없이 읽었다고 자부하면서도 이런 걸 깨치지 못했을까?

 

새삼 나의 무식이 얼마나 깊은지,
나의 눈이 얼마나 어두운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나의 지적 갈증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늘 상세한 내용을 찾지 못해 아쉽기만 했던
우르 3왕조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도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더불어 
김산해 선생님께서 장대한 지식의 나열을 통해 
이 세상에 외치시고자 하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가슴이 아파왔다.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그렇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를 
이러한 어마어마한 지식의 기반 위에 올라
하실 수 있다는 게 말이다. 


3. 

지난 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메소포타미아 문명전을 관람하면서
전시품 중 어떤 쐐기문자 기록에서 
'인안나 신전'을 읽어낼 수 있었던 나 스스로가
괜히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쐐기 문자를 익히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저 외우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아마존에서 수메르어 사전을 구입했다. 
하지만 그 책은 전혀 못 보고 있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쐐기문자였다. 

 

하지만 내가 구입한 수메르어 사전에는 
쐐기 문자는 없고 맨 영어 투성이었다. 

만약 그 책을 인터넷이 아닌 국내 서점에서 살 수 있었다면 한 번 책을 펼쳐보고 
내 목적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지적 자산이 얕다는 건 이런 피해를 남긴다. 

예전에는 내가 알고 싶지만 책이 없는 현실에 대해 
우리 나라의 빈약한 지적 자산을 함부로 예단하여 탓하곤 했다. 

하지만 직접 세월을 겪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창작자가 소중한 지적 자산을 만들어내거나 번역하는 것과 
그 글이 책으로 출판되어 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그건 창작자의 노력과는 별개로
이 세상이 그 책을 받아줄 기반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출판사로서는 팔리지 않을 책을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벌써 나 자신부터도 별자리와 관련된 책을 두 권이나 번역하고서도 
출판을 해줄 출판사를 만나지 못해 이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 세상에 그런 식으로 공개되지 못한 책들이 얼마나 많을까?
김산해 선생님의 책상 서랍에도
여전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쌓여 있는 글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어마어마한 책을 쓰신 김산해 선생님은 물론
그걸 책으로 만들어주신 출판사에도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2023년 9월 18일 추가.

 

김산해 선생님께서 이 책의 출판을 보지 못하시고 영면하셨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김산해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