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에의 생애와 메시에 목록 2.

2023. 10. 23. 22:451. 별과 하늘의 이야기/별지기 사전

혜성을 쫓는 사람들. 

오늘날은 놀랍도록 발전된 기술과 효율적인 프로그램으로 지구는 물론 우주 공간에서도 혜성을 찾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관측자들이 그저 맨눈으로 봤을 때 화려한 섬광을 뿜어내는 천체로서 또는 지구나 다른 행성을 때리는 위협적인 천체로서 등등, 개인적인 흥미로 혜성을 쫓고 있죠. 

 

하지만 18세기 중반의 관측가들에게 혜성은 굉장한 수수께끼였습니다. 

 

1744년, 슈조의 혜성(Cheseaux's comet)이라 불렸던  C/1743 XI이라는 혜성이 있었습니다. 
무려 6개의 꼬리를 가진 놀라운 혜성이었죠. 

이 혜성의 발견은 근대 천문학의 여명기 이래로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슈조의 혜성(Cheseaux's comet),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사건은 메시에에게 혜성에 대한 평생에 걸친 열정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 같습니다. 

 

메시에가 살던 시대에 알려진 혜성은 약 50개 정도였습니다. 
이 천상의 방랑자는 당시 망원경을 이용하여 천체를 관측하는 사람을 급격하게 늘렸죠. 
혜성을 찾는다면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환상적 도전 뿐 아니라, 성공만 한다면 명성과 주목을 끌 수도 있었습니다. 

 

메시에는 바로 이러한 열망의 최전선에서 혜성 발견에 몰두한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에는 1730년 6월 26일, 파리에서 동쪽으로 320킬로미터 떨어진, 독일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로렌의 작은 마을 바동비레르(Badouvillier)에서 태어났습니다. 

 

니콜라 메시에와 프랑수아즈 메시에 사이의 12자녀 중 10번째로 태어났죠. 
메시에를 포함해서 형제 중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6명이었습니다.


메시에의 아버지는 지방 행정관이었습니다. 
농노들에게 세금을 걷는 일도 했고, 지역에서 행실이 나쁜 사람들을 재판하는 일도 했죠.

하지만 샤를 메시에가 11살이 되던 174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샤를의 형 이아생트(Hyacinthe)가 가계를 책임졌는데 그는 어린 샤를을 자신이 특별히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던 재무담당관으로 키우려 했습니다. 
샤를은 형의 개인 서기로서 깨끗하게 글을 쓰는 법과 제도술을 익혔고, 모든 일들을 꼼꼼히 기록하는 일을 익혀나갔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샤를이 나중에 파리 천문대에 취직하는데 도움이 되었죠. 
샤를은 안정된 생활을 꾸려나갔으며 여유가 있을 때는 자연 환경에서 벌어지는 재미있는 일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로코코 양식이 절정기를 맞던 시대였습니다. 

음악에서는 고전주의, 문화적으로는 계몽주의가 유럽을 휩쓸기 시작한 때였죠. 
과학과 예술에서 발생한 이러한 중요한 전환기는 젊은 메시에의 사고에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샤를은 새로운 영역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죠. 
당시 정확히 어떤 일들이 메시에로 하여금 천문학에 흥미를 갖게 만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당시의 주요 사건이라면 1744년 드 슈조가 혜성을 발견한 일이 있었고, 1748년 6월 25일에는 금환일식이 있었습니다.

이 일식은 메시에가 살던 곳에서도 볼 수 있었죠. 

 

아마 이 두 사건은 메시에가 천문학에 흥미를 갖는데 확실히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1751년 프랑스의 정치 지형이 바뀌면서 샤를의 형 이아생트는 어머니 프랑수아즈의 고향에서 세금 징수원 일을 해야 했습니다. 
샤를도 자기 직업을 찾아야 했죠. 

 

이때 지인의 도움으로 샤를은 파리로 여행을 떠났고 그 해 10월, 천문학자 조제프 니콜라 더릴(Joseph Nicolas Delisle)을 만나게 됩니다. 
더릴은 메시에를 고용하여 파리 클루니 호텔에 있는 마린천문대(the Marine Observatory)에서 도제로 일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릴은 이 젊은이의 손이 "깔끔하고 읽기 쉬운 필체로 글을 쓰는 것과 도안을 조금 그릴 줄 아는 능력을 빼고는 딱히 다른 일에 추천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더릴은 메시에에게 천체를 관측하며 기록을 남기고 별지도를 만드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메시에는 더릴의 비서였던 리보(Libour)의 후원 하에 천문기구 사용법을 익힐 수도 있었습니다. 

 

샤를은 이 기구들이 헤성을 찾는 목적에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 영역이야말로 1758년 샤를이 개척한 영역이기도 하면서 주도하게 된 영역이기도 합니다. 

 

천문대에서 일하던 3년 동안 샤를 메시에는 능숙한 관측자가 되었고 서기로 진급도 합니다. 

 

1759년 1월 21일, 메시에는 실패의 씁쓸함을 맛보게 됩니다. 
18개월간의 관측 결과 메시에는 에드먼드 핼리가 예견한 핼리 혜성을 발견합니다. 
메시에는 이를 1810년 꼬네상스 데 타(the Connaissance des Temps, 경도학회가 출판하는 천문력)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저는 6시경 희미한 빛덩어리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천체는 제가 작년에 관측했던 혜성과 비슷한 모습이었죠.

이것은 확실히 혜성이었습니다.

근일점 통과를 52일 앞둔 시점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메시에는 이 보고를 통해 자신이 이 혜성의 귀환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독일 작센주의 농부였던 요한 게오르그 팔리치(Johann Georg Palitzsch)가 이미 한 달 전인 1758년 크리스마스 밤에 망원경으로 이 혜성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메시에에게 이 소식은 큰 충격이 될 수밖에 없었죠. 

 

이 혜성의 발견은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혜성은 재앙의 징조도 아니고 신의 섭리를 보여주는 상징도 아니며 그저 중력에 이끌려 태양쪽을 향하는 궤도를 가진 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에드먼드 핼리의 예견이 적중하는 순간이었죠. 

이러한 기회를 놓친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약간의 명성이 메시에의 경쟁심에 불을 붙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메시에는 또다른 혜성을 발견하는데에 매진하였고 1760년 1월 7일 혜성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고작 19일 후 또다른 혜성을 연이어 발견했죠. 

 

메시에의 혜성 사냥은 더릴이 은퇴한 후 1761년 전성기를 맞습니다. 
이때 메시에는 천문대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금성의 태양면 통과 관측을 비롯한 중요한 관측을 성공시킵니다. 

 

하지만 메시에의 열정은 확실히 혜성을 찾는데 기울어져 있었죠. 


1762년과 1766년 사이 4개의 혜성이 새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무려 3개가 메시에가 찾은 것이었죠. 

 

그 사이, 1764년에 메시에는 자연과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1764년 발견한 혜성의 위치 목록표를 발표했습니다. 
이 목록표에서 메시에는 "파리 마린천문대에서 1월 3일 저녁 8시경 용자리에서 혜성을 발견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연속적인 혜성 발견으로 메시에는 명성을 얻기 시작합니다. 

1764년에는 천문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런던 왕립학회의 외국인 회원이 됩니다.  
1769년에 또다른 혜성을 발견한 후, 베를린과학아카데미의 두 번째 외국인 회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1770년 또 다른 혜성을 발견한 후에, 메시에는 꿈에 그리던 프랑스 한림원의 회원이 되었으며 해군 공식 천문학자가 되었죠. 
같은 해 파리 학회는 메시에의 45개 성운과 성단 목록을 1771년 회고록에 담아 출판할 것을 수락하였습니다.  
(이 목록은 최종적으로 1774년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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