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사분의자리 별비 알현기

2024. 1. 12. 07:101. 별과 하늘의 이야기/하늘앓이 - 별지기의 이야기들

저는 별똥별을 좋아합니다. 

별지기가 될 생각을 하기 전부터 
이미 본능적으로 별똥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별지기가 된 후에도 유성우는 꼭 챙기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2014년에 별비를 제대로 보려면
강화도 정도의 하늘로는 어림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2015년부터 최대한 어두운 곳을 찾아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멋진 별비를 만났습니다. 

특히 소원보다 별똥별이 남아돌았던
2017년과 2018년 쌍둥이자리 별비는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참고 링크 :

2017년 쌍둥이자리 별비 알현기
2018년 쌍둥이자리 별비 알현기  )

페르세우스 별비는 기대만큼 많은 별똥별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래도 계절이 계절인지라

추위 걱정 없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미리내를 보며 낭만적인 여름밤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사분의자리 별비는 늘 관심 밖이었습니다. 

아마도 쌍둥이자리 별비와 보름여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고
1월이 12월보다 대체로 더 추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여튼. 

3대 유성우 중 하나인 사분의자리 별비를 찬밥 대우하는 건
별똥별을 좋아한다 자부하는 별지기의 자세가 아니죠. 

그래서 올해는 
다른 별비 알현 때 그랬듯이 
밤을 지새우며 
사분의자리 별비를 알현드려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2024년 1월 4일. 
하늘이 가려지지 않을 것으로 예보된 남부지방 황매산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만 3년만에 찾아온 어머니의 산, 황매산

 


미리 생각해 놓은 화각에 맞춰 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드라마 세트로 많이 쓰이는 황매산성 누각 위로 큰곰자리가 떠오를 각도죠. 

카메라를 설치하고 콘트롤러를 구동시킨 후 
모쪼록 멋진 모습이 담기길 바라며 주차장으로 내려왔습니다.

해가 넘어가며 선명한 자태를 뽐내는 지리산 천왕봉 모습



주차장에 내려와 제 망원경 하늘이를 펴는데 
길고양이 한마리가 다가왔습니다. 

이 추운 곳에 길고양이라니...

 

소금이 밴 사람 음식을 먹이는게 맘에 걸리긴 했지만
이 추운날을 버티려면 든든이 먹어야죠. 
밤에 먹으려고 준비했던 프랑크 소세지를 하나 뜯어 잘게 쪼개 주었습니다. 

 

이윽고 밤이 찾아왔습니다. 

캠핑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다가 
가끔 보고 싶은 대상을 망원경으로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이따금 오늘 우주쇼가 펼쳐진다는 멘트가 흘러나았습니다. 



우주쇼가 펼쳐진다는 저 멘트는 여전하군...
저 멘트에 속아 휘황찬란한 도시에서 하늘을 올려다봤었지. 쯧쯧쯧... 

하지만 오늘밤 이 하늘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네!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다지 않은가?
시궁창 속에서도 우리 중 누군가는 별을 보고 있다고.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2시가 지날무렵
지금 이곳에 나만 있는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뭔가 꼬물거리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헉...머...머야?



그렇습니다.

아까 내가 먹을 것을 준 고양이가 
자기 새끼들을 데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이 꼬물이들이 여기저기를 들락거리고 있었습니다. 

 

신들 나셨어 아주!



먹을 걸 추가로 더 내어줄 수밖에 없었죠.
제가 먹으려고 준비한 프랑크 소세지와 카스타드가 하나하나 줄어갔습니다. 

고양이 가족 덕에 홀로 있는 황매산은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잠잠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러다 새벽 2시경 

기다란 별똥별 하나가 북쪽 하늘에서 나와
마치 자신이 흘러가는 경로에 있는 별들을 하나하나 깨우고 가는 것처럼 
투둑, 투둑 하고 지나가더군요.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돌려보는 것 같았습니다. 

아! 
이게 사분의자리 별비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작년에 사자자리 유성우를 관측할 때 
마치 총알처럼 쓩~ 하고 하늘을 가로질러가는 별똥별을 두 개나 봤습니다. 
정말 야수의 힘이 느껴지는 별똥별이었죠. 
별비마다 특징이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도 잠시, 
하늘은 여전히 잠잠했습니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가자 동쪽 능선이 
이미 지평선 위로 떠올랐을 달 때문인지 밝아오기 시작했죠. 

황매산 월출

 

사분의자리 별비는 역시 만만치 않은 별비구나

관측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일어나 망원경으로 향했습니다. 
제 망원경을 잡고 돌리는데 

허걱...

휠베이스에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잠자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는 놀라서 달아나는데
한 마리는 여전히 방해하지 말라며 자고 있더군요.

바로 옆이 미러박스라고..ㅜㅜ;;;

 

그래도 차마 추운 날씨에 간신히 잠들었을 아기 고양이를 깨우기가 미안했습니다. 

 

혹시 모를 미러 손상은 막아야겠기에 
결국 조용히 미러박스를 닫는 선택을 했습니다.

할 수 있는게 없네요.
다시 자리에 앉아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그런데 그 때 커다란 별똥별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방향이 사분의자리 별비가 분명한 별똥별이었죠. 

그러더니 10분도 지나지 않아 또 하나, 
곧 이어 또 하나의 별똥별이 떨어졌습니다. 

3시 반을 넘어가는 시간.
드디어 사분의자리 별비가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때마침 
디제이 없는 라디오방송에서는 Morning Train이 나오더군요. 
얼마나 신났는지 저도 모르게 음악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췄습니다. 

그런데 또 춤을 추다보니 
아무도 없는 새벽 산 위에서 나 혼자 춤을 추고 있다는게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이어지는 익숙한 선율에 
중년 아저씨의 막춤을 계속 춰 댔습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지만
그 이후로도 별똥별이 떨어질 때마다 벌떡 일어나 막춤을 추어 댔습니다.

그렇게 이날 총 12 개의 사분의자리 별똥별을 봤네요!

사분의자리 별비는 여전히 
마치 지구의 하늘을 유람하듯 천천히 내렸고 
피어오르는 달빛에도 그 위용을 잃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은 후 별아띠 천문대를 찾아갔습니다. 

 

새벽 두 시까지 버텼지만 별똥별 하나 밖에 못 보고 잠들었다고 아쉬워하시는 젊은 내방객 부부 앞에서 
새벽 3시가 넘어가서야 본격적으로 별똥별이 쏟아졌다고 자랑질 했죠.

비록 내 모습은 눌려 헝클어진 머리에 온통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거지꼴이었지만
그 별똥별들은 분명 그 자리의 저를 빛나게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살펴보니 총 4개의 별똥별 궤적이 잡혔습니다. 

너무나 희미해서 살리기 어려웠던 하나를 빼고 

세 개를 이용하여 그 날 느낌을 담은 사진을 만들었습니다. 


2024년 사분의자리 별비


별이 가득한 높은 산 위에서 맘껏 춤을 출 수 있으니
별지기가 된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