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장에서는 고대 바빌로니아 별지도를 개괄적인 측면에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바빌로니아의 별지도가 본질적으로 그림으로 표현된 달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달력에는 두 개의 지점인 동지와 하지, 두 개의 분점인 춘분과 추분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습니다.
동지점을 시작으로 태양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경로를 따라가면서 각 계절별로 가장 독특한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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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 바빌로니아 별자리 배치도 |
그림 1을 처음 본다면,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그림이 뒤섞여 혼란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좀더 주의를 가지고 본다면, 비슷비슷한 그림이 서로 모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물고기를 들 수 있습니다.
물고기를 상징하는 그림은 동지점(12시 방향)이 지나 등장하는 별자리 사이에 여러 번 반복되어 보입니다.
반면 봄철의 하늘(3시 방향)에는 목자와 가축 그림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가을철의 하늘(9시 방향)에는 농사와 관련된 그림이 눈에 띱니다.
이러한 사실은 별지도가 전체적으로 통일적인 맥락을 갖는 정보체계임을 말해줍니다.
각 별자리는 두 개의 지점(동지, 하지) 및 두 개의 분점(춘분, 추분)과 느슨한 연결관계를 갖는 6개 덩어리로 묶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천구의 북극 주위 별자리 역시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낼 수 있죠.
즉, 전체 별자리는 7개 주요 덩어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별지도를 구성하는 각각의 별자리를 의미있는 순서로 분석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잉태와 탄생과 삶에 이어 마지막으로 죽음과 지하세계로의 여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별지도는 서로 이어져 끊임없이 순환하는 각 계절의 상징이 조합된 하나의 그림 달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별지도는 '거룩한 한 해'라고 묘사될 수 있으며 별자리의 순환은 시간의 순환을 표현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담아 '별달력(the stellar calendar)'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번역자 주 '별달력'이라 번역한 the stellar calendar는 '천문력'과는 다른 용어입니다. 천문력은 해와 달을 포함한 모든 천문현상을 포함하는 달력입니다. 반면 저자가 사용한 Stellar Calendar는 양력Solar Calendar, 음력Lunar Calendar 등과 대비되어 '별자리'에만 한정되는 달력이며,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한 '별자리(𒀯물)'라는 단어는 여러 별로 구성되는 별자리, 자리별, 단독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별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어서 '별달력'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별달력에 담겨 있는 시간 관념은 현대 일반인에게 익숙한 '직선형'의 개념이 아닙니다.
직선형 시간은 시작점을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뻗어나와 오늘을 통과하여 역시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래로 뻗어갑니다.
반면 고대의 시간 관념은 하나의 '전형', 또는 '원형(archetype, 原型)'으로서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며, 중첩된 다른 층위 세계에서의 일도 동시에 다뤄지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시간 관념은 한 해를 구성하는 각각의 하루에 수없이 많은 탄생과 죽음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로 증명됩니다.
그것은 지각있는 모든 존재의 일생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거대한 창조 주기, 창조의 물로부터 생겨난 세계질서의 탄생과 궁극적으로 파괴에 이르는 방향성이라는 관념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별달력을 '거룩한 한 해'로 바라보는 것은 포괄적인 관점입니다.
반면 한정된 관점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데, 이 중에서 바람직한 세 가지 한정적 관점으로, '양력', '두무지의 일생', '인류의 삶'을 들 수 있습니다.
우선 '양력'이라는 관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시피, 별달력은 1년 동안 태양의 움직임을 담은 거대한 측정 정보입니다.
태양의 움직임은 직접적으로는 서로 다른 계절을 만들어내며, 각 별자리에 저마다의 상징적 성격을 부여합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 있듯, 하지와 동지, 춘분과 추분 같은 태양의 특정 지점은 전체 주기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지점을 선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한정적 관점은 '두무지의 일생'입니다.
'양력'이라는 관점이 별달력을 천상 사건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라면, 인간이 사는 땅의 관점에서 바라본 별달력은 두무지(Dumuzi)의 신화적 생애 주기를 구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 '두무지'는 모든 층위의 세계를 넘나드는 불굴의 영혼으로 상징됩니다.
초목의 영혼이자, 소를 잉태시키는 힘으로서의 두무지는 매년 탄생을 반복하며 풍요를 가져다 줍니다.
하지만 이 풍요는 일시적인 일에 불과합니다.
여름의 강력한 열기에 초목이 죽어나가 땅은 황무지가 되고 맙니다.
이때 두무지 역시 죽음을 맞습니다.
두무지는 '죽음을 맞는 신'의 원형입니다.
두무지의 영혼은 지하세계로 향하며 모든 피조물이 그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하지만 두무지의 영혼은 지하세계에 영원히 갇혀버리지 않습니다.
두무지는 다시 되살아나 새로운 한 해를 열어 젖히고, 모든 생명이 새로운 시작을 맞을 수 있게 합니다.
별달력에 대한 마지막 한정적 관점은 '인류의 삶'입니다.
인류 역시 별달력이라는 거대한 상징체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인간의 탄생과 삶, 죽음이라는 일련의 과정은 태양과 두무지의 생애주기가 설정한 원형적 패턴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인간의 관습과 제의는 공동체가 즐기는 축제의 주기로서 별달력과 통합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축제는 왕권제도, 농업과 목축업, 죽음과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갖는 다양한 제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요소는 궁극적으로 시간에 대한 고대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우아한 시스템인 별달력에 그대로 새겨져 들어갔습니다.
참고로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길가메쉬 서사시>의 기본 줄거리도 이러한 일련의 체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멸의 삶을 얻기 위한 길가메시의 여정을 별달력의 순환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별의 움직임을 담은 별달력은 신화와 별자리의 여러 연관성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맺는 심오한 상호관계를 알려주는 거대한 체계인 것입니다.
번역자 주석
1. 이 글은 천문작가 Gavin White의 책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와 천문전승을 담은 에세이집 Babylonian Star Lore (ISBN-13 : 978-0955903748)를 번역한 것입니다.
2. 본 글은 저자의 허락을 받아 포스팅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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