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정착하기 오래 전부터 메소포타미아 남부 습지대에는 야생돼지가 살았습니다.
고대 예술작품들로 판단컨대, 돼지는 오래전부터 사냥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슴을 비롯한 다른 초식동물과 달리 야생돼지는 반격을 할 줄 아는 짐승이죠.
강력한 어금니와 완력, 웬만한 무기도 견딜 수 있는 두꺼운 가죽을 두른 야생돼지는 용기있는 자만이 공격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상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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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야생돼지 사냥이 새겨진 인장(년대 미상) |
야생돼지의 고기와 기름은 물론이고 어금이는 인장이나 옷핀, 빗을 비롯한 상아 물품을 만드는데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야생돼지자리(the Wild Boar)가 만들어진 때는 비교적 나중으로서 기원전 3천년 대 중후반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비손자리(the Bison-man)를 대체한 별자리로 추정됩니다.
이 별자리가 비손자리를 대체한 것이 맞다면 이 별자리의 위치는 오늘날의 켄타우루스자리(CENTAURUS)가 됩니다.
경계석에서 야생돼지 문양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조각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거나 보존상태가 좋지 않거나 합니다.(그림 2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양을 야생돼지로 식별할 수 있는 이유는 등을 따라 솟은 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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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 경계석에 새겨진 야생돼지 문양 |
고대 메소포타미아 원전에서 야생돼지자리 가까운 곳에 압주를 의미하는 문양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 별자리에 대해 알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야생돼지자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그림을 원형 덴데라 황도대(the Circular Zodiac at Dendera)에서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원형 덴데라 황도대에서 야생돼지는 혀를 내민 사자로 그려져 있습니다.(그림 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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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 원형 덴데라 황도대에 그려진 야생돼지자리 | 그림 4 야생돼지자리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그림 |
하지만 저는 이 그림이 원래는 야생돼지를 잘 못 그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돼지의 등을 따라 늘어선 털은 사자의 갈기로 혼동할 수 있고, 길게 늘어진 혀는 야생돼지의 어금니를 착각하여 그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짐승의 앞발 아래 지그재그 선이 그려진 작은 사각형 판이 있다는 것이 그 근거입니다.
이 사각형은 지표 아래 흐르는 지하수의 왕국인 압주를 의미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압주 뒤에 등장하는 짐승이 사자가 아닌 야생돼지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죠.
원형 덴데라 황도대 그림을 기반으로 바빌로니아의 야생돼지자리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추정할 수 있습니다.(그림 4)
물아핀(Mul-Apin)에 따르면 야생돼지자리에 좌정한 신은 메소포타미아 중부 도시 기르수(Girsu)에서 숭배된 닌기르수(Ningirsu)입니다.
닌기르수는 닌우루타(Ninurta)가 지역화된 신입니다.
닌우르타는 아버지 엔릴(Enlil)처럼 농업의 신이며, 풍요를 가져오는 권능을 가진 신입니다.
역사의 여명 시대에 닌우르타는 인간에게 농사를 가르쳤고, 메소포타미아 중심부를 촘촘이 가로지르는 관개수로망을 관리감독하였습니다.
닌우르타의 특성은 수메르 찬송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닌우르타께서 거룩한 쟁기를 올바르게 두셨고
기름진 땅을 갈아내셨도다
풍부한 열매를 맺는 씨를 뿌리셨고
엔릴의 창고에 열마가 높게 쌓일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닌기르수의 성격이 야생돼지자리 예언에 등장합니다.
야생돼지자리가 깜빡이며 출현하면
추수는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시장이 안장될 것이다.
야생돼지자리의 이상적 출현 월인 일곱 번째 달(오늘날의 9~10월)은 가을 파종기가 시작되는 달입니다.
이 시기의 도래는 '밭고랑여신자리(the furrow)가 자신의 밭을 가져올 것이다.'라는 예언으로 표현됩니다.
돼지에게 부여된 농경문화의 상징은 가축화된 돼지와 야생돼지의 조상이 떼를 지어 다니며 땅을 파헤처 먹이를 찾아다니던 습성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행동 때문에 돼지는 종종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낸 농사꾼'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가축화된 돼지를 모아 길렀던 돼지우리가 좋은 농지가 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돼지가 먹다버린 음식찌꺼기와 배설물 때문에 땅이 비옥해지기 때문입니다.
돼지와 농사와의 밀접성은 가을에 열리는 테스모포리아(Thesmophoria)축제에서 데메테르(Demeter)에게 새끼돼지를 바치는 그리스 신화 및 제의에 잘 드러납니다.
이 축제에서는 희생제물로 바친 돼지가 부패하도록 지하동굴에 놔 두었고, 지난 해에 희생제물이 된 썩은 돼지고기는 비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농부들에게 배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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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5 저승의 신에게 새끼돼지를 바치는 신도(고대 그리스) |
| 수메르어로 야생돼지자리는 '물 엔-테-나-바르-훔(Mul En-te-na-bar-hum)'으로 기록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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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드어로는 '쥐 같은'이라는 의미의 '하바시라누(habaşiranu)'라 읽었습니다. 이 단어는 '커다란 쥐' 또는 '설치류'를 의미하는 '훔시루(humşiru)'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밀교 문서에 등장하는 '하바시라누(habaşiranu)'라는 이름은 약간의 문학적 허용을 적용한다면 '이히부트 세르 아누(ihbut şer Anu)'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는 '아누의 땅을 훔친 도둑'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러한 언어 유희가 의미간의 연관성을 밝히는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 이를 근거로 이름과 별칭 간에 어원학적 관련성이 반드시 있다고 말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
| 수메르어에서 복합어 단어인 '엔테나(Entena)'는 '추운 계절' 또는 '겨울'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간' 또는 '계절'을 의미하는 '엔(En)'과 '추운'을 의미하는 '텐(ten)'이 합쳐진 것입니다. '바르훔(Barhum)' 역시 복합어로서 '털뭉텅이'로 해석할 수 있으며 등을 따라 돋아난 터럭을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전체 이름을 가장 그럴듯하게 해석한다면 '겨울의 털투성이 짐승' 정도가 될 것입니다. |
앞서 야생돼지자리가 비교적 후대에 만들어진 별자리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야생돼지자리는 신화와 별자리 간에 이상적인 상호 연관성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별자리가 만들어지던 때의 환경을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가치가 있습니다.
원래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오늘날의 켄타우루스자리에 대응되는 별자리는 비손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따르면 비손은 바다 깊은 곳에서 닌우르타에게 살해당하고 말죠.
비손을 비롯하여 사라져버린 고대 신들의 별자리를 '살해당한 영웅들(the Slain Heroes)'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살해당한 영웅들에 해당하는 별자리에 대해서 오늘날엔 거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비손을 죽은 닌우르타가 하늘에서 비손의 형상을 없애버리는 대신 자신의 농경이라는 속성을 이어받는 별자리로 야생돼지자리를 설치했을 거라는 점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기원전 3천 년대 중반에 발생한 별자리 재편의 일정부분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른 별자리에서도 간간이 설명하고 있듯이, 이 시기는 고대 별자리가 지워지고 새로운 형태의 별자리가 대체되던 시기입니다.
이러한 별자리 재편은 세차효과 때문에 별이 떠오르는 시점이 달라지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특정 시기의 상징인 별자리가 더 이상 자연현상과 맞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사자와 투쟁을 계속하는 비손은 '여름의 끝'과 연관된 상징입니다.
하지만 세차 운동 때문에 가을 농경의 상징인 야생돼지자리와 이 별자리의 주제신 닌기르수로 대치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비손을 살해한 닌우르타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로 이어져 에리만토스의 돼지를 죽인 헤르쿨레스 이야기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현명하고 어진 켄타우로스인 케이론을 죽인 헤르쿨레스 이야기를 포함하여 그리스 신화의 많은 이야기가 메소포타미아 신화를 그 기반에 깔고 있습니다.
참고 별자리 : 비손자리(the Bison-man), 살해당한 영웅들(the Slain Heroes), 멧돼지자리(the Sw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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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석
1. 이 글은 천문작가 Gavin White의 책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와 천문전승을 담은 에세이집 Babylonian Star Lore (ISBN-13 : 978-0955903748)를 번역한 것입니다.
2. 별자리 이름이 현대 별자리 이름과 혼동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는 '이탤릭체'로 표시하였습니다.
3. 본 글은 저자의 허락을 받아 포스팅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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