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이 수수께끼의 신들은 한때 고대 메소포타미아 만신전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신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들의 위상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이들은 물론 이들과 마주하고 있는 수수께끼의 서 있는 신들이 모두 니푸르(Nippur)에 있는 엔릴(Enlil)의 신전, 에쿠르(E-kur)와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산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에쿠르는 하늘신의 신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땅의 운명을 결정짓는 신들의 회의가 열리곤 했죠.
앉은 신자리(the Sitting Gods)가 상징하는 신들의 중요성은 이들이 엔릴과 엔릴의 아버지인 하늘신 아누(Anu)를 수행할 정당한 자격을 가진 신들이라고 기록한 점성술 문서를 통해 가늠할 수 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별자리 그림이나 설명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별자리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어땠을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이 별자리가 9개 별로 구성된, 상대적으로 큰 별자리라는 사실이 전부죠.
참고할만한 또다른 단서는, 완벽하게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이 별자리의 위치가 천구의 적도와 가깝고 천칭자리(the Scales) 바로 뒤에 위치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서로부터 앉은 신자리의 위차를 오늘날의 별자리 기준으로 땅꾼자리 즈음이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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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알 수피(Al-Sufi)의 우라노메트리(Uranometry)에 그려진 땅꾼자리 그림 |
고대 그리스의 별자리인 땅꾼자리(OPHIUCHUS)는 충분히 살펴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실 땅꾼자리는 주인공의 이름은 물론 별자리의 기원도 알려지지 않은 별자리죠.
다만 거대한 뱀을 허리에 두른 신 또는 영웅의 모습으로 등장할 뿐입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는 땅꾼자리의 중인공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나 헤르쿨레스(Hercules)로 봅니다.
하지만 이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상상 속에서 그저 거대한 뱀과 연관관계를 가진 존재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땅꾼의 이미지가 외국에서 유입된 어떤 것을 물려받았고,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친숙한 인물로 굳어졌다고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입니다.
그렇다면 땅꾼자리의 원래 이미지가 오래전 잊혀진 바빌로니아의 별자리, 앉은 신자리의 기억일 수 있을까요?
저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뱀의 형상을 한 여러 신이 있었다는 점, 그리그 그 중 한 명이 '니라(Nirah)'라는 이름을 가진 에쿠르를 지키는 신이었다는 점을 들어, 이 단서들이 올바른 방향을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니라는 완전한 뱀의 형상으로 묘사되거나 다리 하나 또는 그 이상이 뱀인 모습으로 묘사되는 신입니다.
또한 뱀신을 묘사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몇몇 그림에는 이 뱀신이 뱀 목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 형태가 그리스의 땅꾼자리와 아주 비슷하죠.
따라서 땅꾼자리의 원형이 고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전해졌을 것이라고 의심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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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 점성술적 상징과 함께 등장하는 뱀신의 모습 |
고대 그리스에는 이미 비슷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거인이나 자연신이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뱀의 하반신을 가진 신이라는 개념은 충분히 익숙한 개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별도의 개체로서 뱀을 허리에 두르고 있는 인간 형상의 땅꾼 그림이 충분히 더 합리적이었을 겁니다.
저는 상징적 전승이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전달될 때 이러한 형태 변경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 세기 후 고대 그리스의 별자리 전통이 아라비아로 전달될 때도 이와 비교할 만한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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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 뱀 다리를 가진 존재와 독수리 |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별자리 주인공이 사람의 다리를 갖춘 모습으로 변경될 때 한정된 공간으로 인해 형태가 충분히 맞아들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을 겁니다.
그래서 땅꾼의 한쪽 다리가 전갈의 뒤로 숨겨진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을 겁니다.(그림 4)
이렇게 형태가 겹친다거나 또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모순들은 별자리에 모종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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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 아라비아 필사본에 등장하는 땅꾼자리 그림 |
| 앉은 신자리는 '물 딩기 투쉬-마-메쉬(Mul Dingir Tuš-a-meš)'로 표기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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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드어로는 '딩기투슈(dingirtušu)'라 합니다. |
| '딩기(Dingir)' 표기는 별을 묘사한 것으로서 신이나 신령스러운 존재의 이름 앞에 항상 쓰이는 표기입니다. '투쉬(Tuš)' 표기의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의자를 묘사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표기는 '앉기', '깃들기', '거주하기'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메쉬(Meš)'는 복수형 표기로서 단어의 가장 끝에 위치하여 대상이 여러 개, 여러 명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전체 표기는 '앉아 있는 신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뱀신과 관련된 기본적 의미는 여러 문학 참고자료와 고대 예술 작품에서 그려진 이들의 모습을 이용하여 구성해 볼 수 있습니다.
풍요의 신을 묘사할 때와 비슷하게 뱀신 역시 종종 초목과 함께 그려집니다.
또한 뱀신은 두무지(Dumuzi)처럼, 한여름에 저승을 향해 긴 여정을 떠나는 '죽어가는 신'으로 알려져 있죠.
이들의 속성에 '풍요'가 있다는 것은 신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신화에서 이들은 수메르에 곡물을 만들어내는 신으로 등장하죠.
이는 뱀신이 모든 풍요의 신화적 근원으로 간주되며 소떼와 곡식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신성한 언덕자리(the Sacred Mound)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편 뱀신이 죽음과 갖는 연관성은 좀더 인상적일 것 같습니다.
뱀신은 지하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그곳에서 죽은 이들을 맞이하고, 지옥을 통과하는 여정을 안내하죠.
심지어 어떤 기록에서는 이들이 죽은 이들을 심판한다고 언급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뱀신은 신성한 언덕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엔릴의 조상신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신성한 언덕은 저승의 상징인 무덤의 원형으로 작용하죠.
신성한 언덕자리에 얽힌 다양한 상징주의적 흐름은 '신성한 언덕'을 '가을의 땅'을 상징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 시기의 땅은 확실히 불모의 땅으로 변하지만, 깊은 곳에 여전히 새로운 생명과 성장을 씨앗이라는 형태로 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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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5 뱀 몸통을 가진 고대 그리스의 정령들 |
이러한 상징이 보여주는 시적 결과물은 죽음이란 거대한 변형의 사이클 내에서 하나의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죽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씨앗은 땅속에 파묻혀 있지만, 이는 동시에 재생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그 씨앗을 적절한 때를 맞아 불쑥 튀어나올 것이고 새로운 생명과 풍요를 이 땅에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참고 별자리 : 우뚝선 신자리(the Standing Gods), 신성한 언덕자리(the Sacred M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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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석
1. 이 글은 천문작가 Gavin White의 책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와 천문전승을 담은 에세이집 Babylonian Star Lore (ISBN-13 : 978-0955903748)를 번역한 것입니다.
2. 별자리 이름이 현대 별자리 이름과 혼동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는 '이탤릭체'로 표시하였습니다.
3. 본 글은 저자의 허락을 받아 포스팅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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