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는 우화나 속담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짐승으로 대개 교활한 짐승으로 묘사됩니다.
몇몇 이야기에서는 새끼 여우가 어미 여우보다 훨씬 영리한 짐승으로 등장하기도 하죠.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여우는 '광야의 도둑'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으며 점성술 전승에서 여우의 별은 '집을 뚫고 들어오는 별'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수메르의 우화 대부분은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의 속담을 통해 고대 수메르에서도 여우에게 영리함이라는 속성을 부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홉마리 늑대가 열 마리 양을 잡았다.
늑대는 양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 몰라 당황해했다.
이때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나 늑대를 도와주었다.
여우는 아홉 마리를 갖고
남은 한 마리를 늑대들에게 나누라고 주었다.
부스부슬 풍성한 꼬리로 알아볼 수 있는 여우는 여러 경계석에 고르게 나타납니다.
하늘 위로 뛰어 오르는 모습, 또는 연단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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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경계석에 새겨진 앉아 있는 여우 | 그림 2 경계석에 새겨진 뛰어오르는 여우 |
물아핀(Mul-Apin)에 따르면 여우자리(the Fox)는 마차자리(the Wagon)의 끌개 위에 앉아있는 별입니다.
고대 그리스 별자리 전승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위치를 제공해 주는데 마차의 끌개를 구성하는 별 중 가운데 별 바로 위에 있는 희미한 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별은 오늘날 큰곰자리 제타ζ별 가까이에 있는 큰곰자리 80별로서 바로 알코르Alcor를 말합니다.)
| 수메르어로 여우자리는 '물 카-아(Mul Ka-a)'로 표기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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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드어로는 '셸레부(šēlebu)'라 읽습니다. |
| '카(Ka)' 표기는 여우의 머리를 묘사한 표기입니다. 그런데 이 표기는 짐승을 의미하기보다는 '기만적', '터무니없는', '거짓의', '반항적인' 등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여우의 본성을 묘사하는데 사용됩니다. 늑대자리(the Wolf)나 표범자리(the Panther)처럼 사악한 예언으로 점철된 별자리처럼 여우자리 역시 대개 나쁜 기운을 가진 행성인 화성의 별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카(Ka)' 표기는 화성의 또다른 별칭인 '거짓된 별'을 표기하는데 사용되는 철자이기도 합니다. '아(A)' 표기는 문법 표기로서 '카(Ka)'의 의미를 명사형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이 표기는 '기만적인 기운이 가득한 별자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여우자리의 주재신은 예측할 수 없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에라(Erra)'라는 신입니다.
이 신의 이름은 '말려버리다'라는 뜻을 가진 아카드어에서 파생된 것 같습니다.
이 신의 기원이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작렬하는 여름 태양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에라는 통제할 수 없는 불이나 열기 역병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에라를 표현하는 주요 상징은 '언월도'와 '사자머리장식의 지팡이'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만신전이 구성되던 초기 단계에 에라는 네르갈(Nergal)이라는 아카드 신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네르갈은 대개 전쟁과 역병, 죽음의 신으로 묘사되며, 수메르의 저승의 여신 에레쉬키갈(Ereškigal)과 결혼한 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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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 네르갈(Nergal) 또는 에라(Erra) |
수 세기 후 페르시아 시대까지 전달된 에라-네르갈은 헤르쿨레스(Hercules)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세 개 머리를 가진 저승의 문지기 개 케르베로스(Cerberus)를 제압하는 헤르쿨레스 이야기는 헤르쿨레스가 에라-네르갈이 가진 상징과 강력한 유사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측면에서 네르갈을 상징하는 표범머리지팡이라든가 에라를 상징하는 사자머리지팡이에서 세 개 머리를 가진 케르베로스의 원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림 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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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 네르갈의 지팡에 앞에 있는 표범자리 (기원전 12세기 경계석 문양) |
여우자리가 갖는 죽음의 본성은 <에라 서사시(Erra Epic)>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기원전 9세기나 8세기 경에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 <에라 서사시>는 에러가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는 임시 통제권을 얻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바빌로니아를 파괴하려 했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학살의 전조는 여우자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하늘에 그 비밀이 드러나게 되죠.
에라의 별이 빛을 쏟아내면...
사방으로 펼쳐진 그의 망토가 펄럭일 것이고
모든 이들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죽음의 테마는 점성술 예언에도 등장합니다.
왕조차도 여우자리가 예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내용이 등장하죠.
위대한 신, 여우자리의 별이...
그 해에 모든 땅의 왕이 죽게 될 것이다.
여우자리가 갖는 다양한 상징은 수메르 신화에 등장하는 여우의 성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그 다양한 성격 중 하나는 여러 신이 죽음을 피하도록 돕는 것으로 나타나죠.
여우는 이쉬쿠르(Iškur)가 지하세계를 벗어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엔키(Enki)가 치명적인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중재에 나서기도 합니다.
바빌로니아 점성술에서 여우자리는 화성의 별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점성술에서 화성이 가진 사악한 본성을 묘사하는 일곱 개 이름이 있습니다.
사악한 자(the Sinister), 이방인(the Strange), 적(the Hostile), 거짓말쟁이(the Liar), 악마(the Evil), 엘람의 별(the Star of Elam), 이상 여섯 개 이름에 별자리 이름으로는 유일하게 여우자리(the Fox)가 추가됩니다.
또다른 예언 기록에서 화성은 늑대나 표범과 같은 육식동물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우자리의 이름을 둘러싼 말놀이를 통해 여우자리에서 파생된 또다른 의미를 추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점성술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여우자리는 집을 뚫고 들어온다.
이 문구는 언뜻 봐서는 물건을 훔치는 여우의 본성을 서술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좀더 심층적인 내용을 아카드어 사전을 통해 찾을 수 있죠.
아카드어로 여우자리는 '셸레부(šēlebu)' 입니다.
이 단어는 아카드어로 '갈라진 틈'이나 '구멍'을 의미하는 '필슈(pilšu)'와 발음을 뒤바꾼 관계에 있습니다.
발음이 뒤바뀐 관계라는 것은 두 단어의 어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우의 경우 어원은 '쉴브(šlb)' 갈라진 틈의 경우 어원은 '플쉬(plš)'입니다.
앞에서 여우자리는 고대 그리스 별자리 전승에도 알려져 있다는 언급을 한 바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 아라토스(Aratus, 315~243BC)는 플레이아데스의 별 중 하나가 트로이가 참략당할 때 자매를 떠나 '막대의 두 번 째 별 위로 이동'했으며 '어떤 이들은 이 별을 여우의 별이라 부른다'고 기록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이 철학자 프로클로스(Proclus)는 이와 관련하여
여우의 별은 하늘과 지상을 엮어놓은 멍에의 끈을 지속적으로 갉아먹고 있다
라는 인상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한 밧줄이라는 상징은 메소포타미아 초기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고할 자료는 다소 난해합니다만, 본질적으로 하늘의 극점에 '밧줄'이 걸려 있고, 밧줄의 반대편 끝은 지평선 아래 고정된 '계류 기둥'에 묶여 땅을 고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고대인의 인식 속에 담긴 하늘과 땅을 설명합니다.
하늘과 땅이 비록 창조 과정에서 분리되긴 했지만 이 둘이 여전히 서로 연결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우가 갉아 먹고 있는 멍에끈'이라는 개념은 밧줄이 마차의 마구로 작용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에 대해서는 하늘의 밧줄자리(the Ropes of Heaven)에서 좀더 상세하게 다룰 것입니다.
일단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여우자리에 얽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세계관은 여우의 별이 밧줄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나면 지금의 세계가 파국적인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때 하늘은 무너지고 갈라진 틈을 통해 죽은 이들의 군대가 지하세계에서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참고 별자리 : 표범자리(the Panther), 마차자리(the Wagon), 늑대자리(the Wolf), 하늘의 밧줄자리(the Ropes of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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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석
1. 이 글은 천문작가 Gavin White의 책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와 천문전승을 담은 에세이집 Babylonian Star Lore (ISBN-13 : 978-0955903748)를 번역한 것입니다.
2. 별자리 이름이 현대 별자리 이름과 혼동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는 '이탤릭체'로 표시하였습니다.
3. 본 글은 저자의 허락을 받아 포스팅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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